# 75. defeat - 패배시키다, 물리치다 (6)
75.
***
다음 날.
아침부터 연예란은 두 사극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OTT에 밀려 침체된 방송계에 희소식]
[사극의 새바람이 불어오나?]
[이 배우들을 한 작품에? 영화 같은 K 사극의 클라쓰 ‘이옥’]
[드라마 ‘이옥’ 화제성 드라마 2위]
[‘이옥’ 신하율, 첫 사극 도전, 안정적 연기력 ‘호평’]
[강원준 주연의 사극 ‘이옥’ 큰 반향...]
물론 드라마 이옥에 대한 기사만 많은 건 아니었다.
[조한웅, 사극 ‘검은 달’로 연속 홈런 예약]
[믿고 보는 김연숙 작가의 ‘검은 달’ 첫 방송은 순항 중]
[조한웅 ∗ 김신호 강렬한 만남...‘검은 달’ 첫 회 반응 뜨거워...]
1화가 끝나고 초반 성적표.
검은 달 : 9%
이옥 : 5%
종편이라는 걸 고려했을 때 결코 나쁜 출발은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요일에 비해 시청률 동반 상승효과도 큰 상태.
다만 썬샤인 제작사 작품과 시청률이 두 배 가까이 차이 나는 건 아쉬운 상황이었다.
***
늦음 바.
썬샤인 제작사 회의실.
「검은 달」 2화가 방영한 지 1시간이 지났다.
숨 가쁘게 달려왔던 드라마는 점점 엔딩으로 치달았다.
“네, 이놈들. 내가 조선 팔도를 다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을 테다. 내 꼭 그리할 테다!”
주인공이 딸을 빼앗기는 장면에서 조한웅의 연기력이 폭발한다.
“크으, 역시 명불허전이야.”
감탄하던 구진식 CP가 손뼉을 친다.
이윽고 엔딩 크레딧이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뒤를 돌아본다.
“야, 시청률은 어때?”
“대, 대박입니다! 벌써 11%를 찍었습니다!”
대박이었다.
2회 만에 시청률 두 자리를 찍었으니까.
환호성에 가까운 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진다. 덩달아 구진식 CP가 주먹을 움켜쥔다.
‘그래, 이거지.’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결과.
동시에 상대와의 격차를 보여주는 결과였다.
구진식 CP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이웃 동네로 향한다.
“저쪽은 어때?”
“최종 7%로 집계됐습니다.”
“쳇, 그사이 많이 쫓아왔네.”
격차가 꽤 많이 나는 상황.
그러나 구진식 CP는 오히려 아쉬웠다. 방영 초반보다 시청률이 많이 올라왔기에 저쪽 시청률을 뽑아왔나 싶었는데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극을 잘 보지 않는 시청자들, 그리고 채널을 계속 돌리던 시청자들까지 붙잡은 것. 저쪽 역시 꽤나 선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심 불안했지만 구진식 CP는 다시 한번 시청률 성적표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래도 거의 더블 스코어라고.’
초반에 승기를 잡은 이상 역전될 확률은 극히 낮았다.
‘천재지변이 나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지.’
일종의 선점 효과 덕분이었다.
내일이면 시청률 1위로 온통 기사가 도배될 게 분명했다. 그게 시청률 1위를 찍은 작품이 누릴 권리이기도 했고.
구진식 CP의 얼굴엔 벌써부터 성급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
1주일 뒤.
총 3화까지의 시청률이 공개됐다.
[이옥 : 9%]
성적표를 본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이제 곧 두 자리도 가능하겠는데?”
종편에, 정통 사극이라는 걸 고려해도 놀라운 성적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1위를 넘어서지 못한 상태였다.
“저쪽은 어때?”
“오늘까지 13% 찍었습니다.”
피디의 말에 본부장이 슬쩍 진영민 CP의 표정을 살핀다.
“왜 그렇게 보세요?”
“어? 아, 아니야.”
“저 신경 쓰시는 거면 괜찮아요. 지난번처럼 초반에 박살 난 것도 아니고, 아직까진 할 만하니까요.”
진영민 CP는 여전히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리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조한웅과 김연숙 작가의 조합은 생각보다 파워가 있었다. 팬들이야 두 작품을 골라 볼 수 있어서 좋겠지만 타이거 스튜디오 입장에선 불안한 요소였다.
‘언제 시청률이 잡아먹힐지 모르니까.’
지금이야 대등하게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앞서나가기 시작하면 시청률은 무서울 정도로 한쪽으로 편향되기 시작한다.
이슈된 작품, 대세에 따라 이동하는 시청자 패턴 때문이었다.
‘한방이 필요한 시점이군.’
1~4화가 빌드업 과정이라면 본격적인 승부처는 바로 5화였다.
1화에서 4화가 스토리의 전개 방향을 알려주는 서문이라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지점이었으니까.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겠지.’
아마 각종 볼거리를 통해 어그로를 끌 게 분명했다.
사실 계속 가면 작품성과 대본 차이로 이기게 되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보다 완벽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래,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할 타이밍이었다.
“어? 어디 가세요?”
자리에서 일어나자 본부장이 묻는다.
“사람들의 생각을 좀 보려고요.”
“생각이요?”
나는 의아해하는 본부장을 둔 채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두 시간 뒤.
나는 장현웅과 함께 동네 찜질방을 찾았다.
“진짜? 식혜도 쏘는 거지?”
찜질방을 가자는 말에 녀석은 신이 나서 달려왔다.
“당연하지. 마음껏 먹어.”
“앗싸, 구운 계란도 먹어야지.”
어깨춤을 추던 녀석이 순간 나를 쳐다본다.
“참, 근데 너 졸업식은 올 거냐?”
“가야지. 넌?”
“당연히 가야지. 근데 실감이 안 나네. 우리가 벌써 졸업이라니...”
장현웅의 말대로 시간은 참 빠르게 흘렀다.
“하아, 그나저나 이제 난 뭐하지?”
졸업과 동시에 찾아오는 취준생의 고민.
장현웅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준이 넌 좋겠다. 이제 글만 쭉 쓰면 되니까.”
“그렇지도 않아. 인간의 삶은 언제나 선택과의 싸움이니까. 오늘도 작품 때문에 온 거고.”
“아, 「검은 달」 시청률이 생각보다 높아서 그런 거지? 초반 시청률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녀석은 생각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자 녀석이 피식 웃는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친구가 드라마 작가인데 그 정도는 신경 써야지. 그뿐만 아니라 니 책 성적도 다 파악하고 있다고.”
스스로도 대견한지 어깨를 으쓱거린다.
자식, 기특하긴.
언제 봐도 참 의리 있는 놈이었다.
“네 말이 맞아. 보다 나은 시청률을 위해선 이쯤에서 한 방이 필요하거든. 그래서 방송 반응을 좀 봐야 할 필요가 있지.”
“근데 방송 반응 보고 싶은데 찜질방은 왜 온 거야?”
“가장 날 것 같은 시청자들의 반응을 볼 수 있는 곳이 여기니까.”
“아...”
장현웅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나는 이곳에 시청자들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다.
‘언제나 해답은 관객과 소비하는 사람에게 있거든.’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1587년, 내가 최초로 가입한 ‘여왕극단’
나는 내 작품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같은 자리에 서서 무대가 아닌 객석을 지켜봤다.
내 눈은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냉철하게 관객들의 반응을 살폈다. 내가 쓴 극의 어떤 부분이 쓸모없는 지를 관객의 반응을 분석하며 대본을 수정해 나갔다.
‘소리를 지르고, 울고, 웃는 관객을 보며 사람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장면들을 걸러냈지.’
하루하루가 수정의 연속.
그 과정에서 가장 좋은 대사, 가장 좋은 연출과 플롯을 떠올리는 건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터득해야만 하는 생존법에 가까웠다.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훈련된 능력.
그렇게 터득한 나의 경험이 지금 이 순간 도움을 주고 있었다.
한 시간 뒤.
드디어 드라마 방영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식혜 하나씩을 문 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뒤이어 대형 TV 앞에 아줌마들이 모여든다.
이제 곧 「이옥」이 시작할 시간.
그런데 그때, 두 아주머니가 TV 채널을 두고 다투기 시작한다.
“아 왜 채널을 돌려요?”
“「검은 달」 시작하잖아요.”
“우린 「이옥」 본단 말이에요.”
“아니, 여기 아주머니가 혼자 봐요?”
파마머리 아주머니는 「검은 달」,
단발머리 아주머니는 「이옥」파였다.
“이옥 뭐 그것도 재미있긴 한데 시원한 맛이 없잖아요.”
“그래도 드라마가 남는 게 있어야지. 온종일 칼싸움만 하는 거 뭐 재미있다고 봐요?”
“왜 남는 게 없어요? 스트레스도 풀리고 보는 재미가 있잖아요?”
“그래도 뭔가 이렇게 묵직한 맛이 있어야 드라마죠. 무슨 무협 영화도 아니고....”
두 사람의 의견은 팽팽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의견도 갈린다.
그래.
엎치락뒤치락하는 시청률의 원인이 바로 여기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한 가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두 드라마의 시청률 차이.
그건 연기나 편집, 대본의 부족함이 아니었다.
그저 대중들의 취향이 좀 더 단순한 플롯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생각하고 고민하는 게 싫어진 현대 사회.
뭔 얘긴지도 모르지만 격렬하게 칼싸움을 하는 모습에 몰입하고, 그렇게 악인을 응징하는 단순한 플롯을 즐기게 된 변화가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그 속도를 맞춰서 몰입감을 올리면 될 터...
순간 해결책이 떠오른다.
“찾았다. 역전의 한방.”
“뭐, 뭐? 벌써?”
장현웅이 놀라 묻는다.
***
나는 급히 회의를 요청했다.
마침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정은미 피디와 본부장, 그리고 진영민 CP가 회의실에 모였다.
나는 작품의 속도감을 높이기 위해 압축 편성을 요청했다.
“뭐라고요? 5,6화를 압축 편성하자고요?”
진영민 CP가 놀라 되묻는다.
“네. 전체 회차를 줄이는 건 아니고 초반부 내용을 압축하자는 뜻입니다.”
“분위기 좋은데 왜 그래야 하는 거죠? 대본대로 잘되고 있는 거 아닌가요?”
전개 속도도 적당한데 무리수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 진영민 CP의 의견 역시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럴수록 강하게 어필해야 했다.
“지금은 정조와 이옥의 대립이 심화 되는 부분입니다. 좀 더 두 사람의 대립을 극대화 시켜서 시선을 붙잡아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본부장이 나선다.
“흠. 스토리에 속도감을 높이자는 뜻이죠?”
“맞습니다.”
대답을 들은 본부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전 찬성입니다.”
“보, 본부장님?”
진영민 CP가 놀라서 되묻는다.
그러자 본부장이 타이르는 말투로 대답을 잇는다.
“사실 나도 좀 아리까리했거든. 우리 작품은 말도 안 될 만큼 웰메이드야. 대본, 연기, 편집까지 빈틈이 없잖아? 근데, 이게 또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생각해봐. 한동안 아침드라마가 흥한 이유가 뭐야? 청소기 돌릴 시간에 따귀 날리면서 싸우고 머리 쥐어뜯는 장면 나오니까 돌리던 청소기도 멈춘 거잖아.”
“본부장님, 그래도 이 작품이 아침 드라마는 아니잖아요.”
“그래, 오히려 지나치게 웰메이드지. 그런데, 시청자들은 웰메이드를 원할까?”
“그건...”
순간 진영민 CP의 말끝이 흐려진다.
흥행의 본질을 떠올린 탓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싫어하진 않겠지. 근데, 시청자들이 가장 원하는 건 웰메이드 드라마가 아니라, 재미있는 드라마야.”
그때,
듣고 있던 진영민 CP의 눈이 커진다.
“...그러니까 일단 초반 템포를 올려서 스토리에 대한 재미를 주고, 그 뒤에 우리 템포로 가자는 말씀이신 거죠?”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정확해. 웰메이드 평가는 나중에 종영한 뒤에 들어도 나쁘지 않아. 지금은 최대한 시청자들이 재미를 느끼게 만드는 게 중요하지. 그게 바로 권 작가님이 말씀하신 거고. 제 설명이 맞나요?”
내가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자 본부장이 피식 웃는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도 이 바닥 짬밥 좀 먹은 놈입니다. 그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죠.”
역시 연륜이라는 건 거저먹는 게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영민 CP의 표정도 많이 가벼워졌다. 상황이 이해된 만큼 자신의 주장을 굽히는 속도도 빨랐다.
“어느 정도 진도를 빼실 생각입니까?”
“2화 분량이면 충분합니다.”
“2화라... 바쁘게 움직이면 가능할 거 같네요.”
“추가 분량은 이틀 내로 집필하겠습니다.”
아직 촬영에 들어가지 않은 후반부 부분이라 가능했다.
“그래요, 한번 해봅시다.”
비로소 네 사람의 의견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
그날 밤.
정 피디는 5화를 다시 편집했다.
“후, 마무리했습니다.”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한 편집 작업.
그러나 오히려 얼굴엔 뿌듯한 미소가 가득했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아니에요. 말씀하신 대로 수정하니까 훨씬 더 몰입감이 생기네요. 역시 대단하세요.”
정 피디가 잠시 숙직실에서 쪽잠을 자는 사이, 나는 다시 찜질방으로 향했다.
“수정은 잘 된 거야?”
수건으로 양 머리를 한 장현웅이 식혜를 가져오며 묻는다.
“물론이지.”
식혜를 쪽쪽 마시면서 기다리는데 드디어 드라마가 시작된다.
오늘은 단발머리 아주머니가 이겨서 이옥 5화를 본다.
커다란 TV 화면 위로 5화가 시작된다.
정조와 이옥,
그리고 연암 박지원이 얽힌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문체반정(文體反正).
생각 없이 시행한 정책이 아닌 시대의 흐름에 맞춘 정조의 커다란 그림이 보인다.
그것이 무조건 옳다라고 말할 순 없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수긍하게 만드는 스토리.
“하아, 문체반정이 엿 같긴 한데, 그냥 한 짓은 아니구먼?”
“그래, 정조가 어떤 왕인데, 아무 생각 없이 그랬을 리는 없지.”
아주머니들의 대화가 들린다.
선과 악이 아닌, 자신들의 신념에 의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두 남자의 갈등이 이목을 이끈다.
자연스럽게 시청자들의 시선은 이옥의 삶으로 이어지고,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빠르게 지나간다.
어느새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뭐야, 이야기 속도가 엄청난데?”
“내 말이, 잠시도 눈을 못 뗐네...”
아주머니도, 아저씨도, 남녀노소 놀란 듯 한목소리를 낸다.
덕분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고, 예고 영상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켜보던 장현웅이 눈을 크게 뜬다.
“서준아... 아무래도 네 생각이 맞은 거 같은데?”
새삼스러운 반응.
뭐 당연한 걸 묻고 그래.
이제 남은 건 결과를 확인하는 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