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defeat - 패배시키다, 물리치다 (5)
74.
***
며칠 뒤.
드디어 모두의 관심 속에 드라마 「이옥」의 첫 방영 날이 되었다.
“후아, 미치겠네.”
아침부터 하 본부장은 잔뜩 긴장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왜 이렇게 긴장하세요. 아마추어처럼.”
지켜보던 진영민 CP가 핀잔을 주며 앉는다.
“야, 긴장을 어떻게 안 하냐? 이거 하나에 100억을 태웠는데?”
“그러니까 1, 2화를 먼저 보시라니까 왜 자꾸 안 보겠다고 하세요?”
“인마, 감동이 없잖아, 감동이. 시청자와 똑같은 시선에서 1, 2화를 한 번 봐야 아, 이 작품이 어디까지 가겠구나... 그런 느낌이 빡 든다고.”
본부장의 오랜 습관이었다.
제작자로서의 감각뿐만 아니라 시청자의 시선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여태까지 본부장의 판단은 꽤나 높은 확률로 맞아떨어졌다.
‘이거 된다. 적어도 두 자리는 찍을 거야. 한 12%?’
재작년에 찍은 로맨스물도 맞췄고,
‘흠. 좋지 않네. 한 5% 나오려나?’
올 초에 찍은 의학 드라마도 맞췄다.
그런데 아쉽게도 몇 년째 그의 입에서 ‘이건 대박이다!’라고 외치는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래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고.
“참, 권 작가는 어떻게 한다고 했어?”
“이따 시간 맞춰서 온다고 했어요.”
“홍보팀도 세팅된 거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본부장은 확인한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촬영진과 배우들을 제외한 실무진과 작가가 다 같이 보여 첫 방송을 보기로 한 상황.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
“컷, 오케이!”
정은미 피디의 사인과 함께 씬 하나가 마무리된다.
연기를 마친 강원준이 쓰고 있던 갓을 벗으며 다가온다.
“어때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 멋있게 나왔으니까.”
“그보다 연기는요? 괜찮았나요?”
“물론이죠. 갈수록 연기가 더 사는데요?”
“후, 다행이네요.”
강원준은 연기가 괜찮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 피디가 미소를 짓는다.
“확실히 다르시네요.”
“뭐가요?”
“대부분의 톱스타들은 본인 얼굴 잘 나왔는지, 멋있게 나오는지만 확인하던데, 연기파 배우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정 피디의 말에 강원준이 쓴 미소를 짓는다.
“저랑 처음 작업하셔서 그런 말씀 하시는 거예요.”
“네?”
“제가 바로 정 감독님이 말씀하신 그런 배우였거든요. 총, 칼 쥐여 준다면 장르 불문하고 멋있게 보이려고 애쓰는 그런 배우요.”
정 피디가 놀란 듯 말없이 쳐다본다.
강원준은 정 피디 옆에 놓인 대본을 자연스럽게 집어 들며 말을 잇는다.
“그런데, 이옥의 삶을 보면서 나는 저토록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옥 선생에 비하면 발끝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연기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진 건 사실이니까요. 다 권 작가님 덕이죠.”
톱스타 입에서 나오기 힘든 겸손한 대답.
듣고 있던 정 피디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권 작가님과 작업하기 전까진 저 역시 그저 입봉만 생각하고 조급해하는 웹드라마 피디였거든요. 근데, 권 작가님과 같이 작업해보고 처음으로 내가 찍는 게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라 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번엔 듣고 있던 강원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제가 권 작가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잘 아시겠네요?”
“물론이죠.”
공감대가 형성되자 두 사람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오른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등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뒤를 돌아보니 곱게 분장한 신하율의 모습이 보인다.
“제가 연기할 수 있게 이끌어 주신분도 권 작가님이시거든요.”
“너도?”
강원준이 놀라며 묻는다.
“네, 생각해 보니 여기 있는 사람은 다 권서준 작가님한테 도움을 받았네요?”
정 피디와 강원준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잘나가는 톱스타와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 그리고 입봉감독을 한 데 엮어준 건 바로 한 사람의 힘이었다.
“그러고 보니 드디어 오늘이네요.”
신하율이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많은 것이 생략된 한 마디.
그러나 무엇을 말하는지 세 사람 모두 알 수 있었다.
***
강남에 있는 대형 서점.
나는 타이거 스튜디오를 찾기 전 잠깐 서점에 들렀다.
[순문학 특별 기획전]
국내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이 쭉 진열된 자리. 그 가운데에 내 작품도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덧없는 행운?”
지나가던 행인이 무심코 손을 뻗어 내 책을 집어 든다.
한 장, 두 장, 거칠게 쓱쓱 넘기던 손길이 이내 느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새 모든 걸 멈춘 채 책에 집중한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대형 서점 한가운데.
그러나 남자는 지금 내가 창조한 세상 속에 있었다.
일종의 초대장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새 책 안으로 들어간 남자의 눈빛.
책에 몰입한 사람의 눈빛은 언제나 작가를 설레게 만든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가벼운 호기심과 함께 기분이 고양된다.
기분 좋은 감각을 느낀 채 나는 천천히 서점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때, 한쪽에서 진행 중인 사인회가 눈에 들어온다.
[김연숙 작가 데뷔 10주년 기념 「검은 달」 대본 사인회]
썬샤인 측도 홍보에 엄청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긴 150억이 넘는 제작비를 들였는데 이 정도는 하는 게 맞지.
물론 난 김연숙 작가의 사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기에 자연스럽게 주차장으로 향했다.
시동을 켜고,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저 앞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구진식 CP와 김연숙 작가였다.
사인회를 막 마치고 나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온다.
“참, 어제 진영민 CP 만났다면서요?”
“아, 강원도 들렀다가 우미원 다녀왔거든. 거기서 진 CP랑 하 본부장 만났어.”
김연숙 작가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진다.
“운도 없네. 하필 거기서 만났대?”
“내 말이. 밥맛이 확 떨어지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많이 드셨어요?”
“아, 그거야 우리 김 작가님이 쏘시는 거였는데 그 정도는 먹어줘야지. 예의 차리고 안 먹으면 오히려 우리 김 작가님 인색하다고 소문 돈다니까?”
“아이고,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지.”
장단이 맞는 게 한 쌍의 바퀴벌레를 보는 기분이었다.
“참, 그 권 작가라는 사람은 어땠어요?”
“뭐 딱 봐도 그냥 애던데?”
“그래요? 소문엔 글발 좀 좋다고 하던데?”
“에이, 글발로 작가할 거면 김 작가 서브 애들은 다 날아다녔게?”
“참나, 이분이 말은 참 잘해요. 피디 말고 영업을 하지 그랬어요?”
“그럴까 하던 참에 김 작가 만난 거잖아.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고.”
“아이고, 이렇게 넉살이 좋으니 내가 거절할 수가 없다니까.”
“그래서, 다음 작품도 나랑 하는 거지?”
“그걸 물어 뭐해요. 대신 조건은 알죠?”
구진식 CP가 알겠다는 듯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든다.
“근데, 일단 이번 작품부터 신경 쓰자고. 아직 대본 많이 남았잖아?”
“그거야 문제도 아니죠. 날 뭐로 보고. 근데, 이번에도 잘 되겠죠?”
“당연한 소리를 왜 해? 마케팅 비용으로만 쓴 돈이 얼만데. 제아무리 타이거 스튜디오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힘들 거야.”
자신감 넘치는 구진식 CP의 말에 김연숙 작가가 웃는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지고, 진영민 CP 충격 받아서 사표 쓰면 어떡해요?”
“그거야 그쪽 사정이지. 그러게 누가 애송이 데리고 작품 하래?”
구진식 CP와 김연숙 작가가 서로 웃어댄다.
잠시 뒤 멀어지는 차.
그들의 차는 이미 주차장을 빠져나갔지만 자신만만해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과연 그쪽 생각대로 될까?”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었다.
한 대 쳐 맞기 전까지는.
하긴,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나를 상대로 자신만만했던 작가는 많았다.
그 시절 나를 까마귀라 비난했던 로버트 그린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그 대결은 누가 이겼냐고?
말해 뭐할까?
누구의 작품이 살아남았는지 결과가 말해주고 있잖아.
점점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슬슬 이옥 1화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
타이거 스튜디오 기획제작 7팀.
회의실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른다.
기대와 염려.
전혀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뒤섞인 공기.
그때, 타이머가 멈추고 한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제 시작합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회의실 불이 꺼지면서 전면에 설치된 커다란 모니터가 상대적으로 밝아진다.
대금으로 시작하는 애절한 OST 위로 떠오르는 이옥과 정조의 모습.
눈빛만으로도 두 사람의 갈등이 보이는 듯 연출.
‘일단 시작은 좋아...’
본부장의 눈빛이 반짝인다.
***
1화 장면.
눈으로 뒤덮인 북한산.
한 선비가 태연히 산을 오른다.
언덕 위에 선 이옥의 절친 김려.
그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바라보며 나직이 외친다.
임금의 총애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요,
그저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세상을 만나는 것, 그것이 자네의 꿈 아니었나?
벗이여, 어디 있는가?
혼이나마 이 땅에 편히 머물렀는가?
살아있다면, 기별 한 번만 주면 내 이리 답답하지 않을 것을...
그러나,
그것이 사내 이옥의 삶이겠지...
아쉬운 듯 허공을 바라보는 김려의 눈동자.
김려의 시선으로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북한산 설경이 부감(俯瞰)으로 잡힌다.
이내 빠르게 20년 전 과거로 되돌아간다.
“어때?”
하 본부장이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목소리를 낮춰 묻는다.
옆에 있던 직원이 재빨리 입을 연다.
“현재 2%입니다. 검은 달은 7%고요.”
“흠.”
본부장이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쉰다.
3배 넘는 스코어.
아직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
성균관 대성전.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밑으로 어명을 받든 관군이 행차한다. 그리고 이내 이옥의 면전에서 들고 온 답지를 거칠게 바닥에 내려놓는다.
“어명이다. 며칠 전 유생 이옥이 답안지에 쓴 말은 순전히 소설의 말이었으니, 사습이 해괴하다. 사륙문을 50수가 될 때까지 매일 짓도록 하여 옛 문체를 확실하게 고치게 한 다음에야 과거에 나아가게 하라!”
과거에 나가지 못하게 막는 어명.
유생에게, 아니 선비에게 가장 큰 처벌이었다. 그러나 이옥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걸... 어쩌나?”
김려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써야지 별수 있는가? 지엄하신 어명인 것을.”
이옥은 은행나무 잎이 곱게 깔린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호기롭게 붓에 먹을 먹인다. 그리고는 기교 있게 글귀를 써 내려간다.
그런데,
종이가 아닌,
은행나무잎 위에 쓰기 시작한다.
“자네,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임금께서 내 벼슬길은 막을 수 있지만 내 붓까지 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
“뭐, 뭐라고? 자, 자네 설마...”
이옥은 노란색 은행 나뭇잎에 소품체로 글을 써내려간다.
바람 한 번 불면 사라질 글이었지만 그는 오로지 자신의 세계에 몰입한다.
권력과 환영받지 못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이옥은 웃었다.
예술적 신념을 위해 왕의 핍박에도 굽히지 않은 유일한 선비의 미소였다.
그 순간,
붓을 든 이옥의 표정이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광기와 자신감, 애환과 후련함이 동시에 보이는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담긴 장면.
그 얼굴 위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
임팩트 있는 마무리.
“와...”
그제야 사람들의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전개였다.
정 피디는 그림을 잘 잡았고,
강원준의 연기는 이옥 그 자체였다.
1화엔 짧게 등장했지만 사연 많은 기생 연화역의 신하율의 등장도 임팩트 있었다.
고작 1화였지만 실무진 역시 놀란 기색.
특히 홍보팀 직원의 반응이 놀라웠다.
“너무 재미있는데요? 일할 생각도 못 하고, 그냥 감상해버린 기분이에요.”
하나같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 본부장의 반응이 없었다.
“본부장님, 뭐 하세요? 오늘은 시청률 예상 안 하세요?”
진영민 CP가 궁금한 듯 먼저 묻는다.
그러자 팔짱을 낀 채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던 본부장이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시청률이 중요한 게 아니야.”
드라마에서 시청률이 중요하지 않다니,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다들 쳐다본다.
그러자 본부장은 천천히 입을 연다.
“이제부터 대한민국의 사극 드라마는 권서준 작가 이전과 이후로 나뉠 테니까.”
비장하기까지 한 본부장의 예언.
그 말이 사실로 드러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