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73화 (73/203)

# 73. defeat - 패배시키다, 물리치다 (4)

73.

***

이른 아침.

와이즈 출판사 회장실.

“뭐? 피어슨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뜻밖의 보고에 정영만 회장은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

“네, 권서준 작가의 차기작을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헐레벌떡 회장실을 찾은 주상진 편집장은 조금 전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다시 한번 반복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닌가? 분명 이번 작품은 같이 할 생각이 없다고 제대로 전달한 거 맞지?”

“네,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담당자와 직접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정 회장이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올리버 편집장, 그 깐깐한 친구가 그렇게 나왔다고? 기분 나빠해도 할 말이 없는데, 오히려 기다리겠다니...”

“솔직히 저도 이해가 되지 않긴 하지만 분명 그렇게 전달받았습니다. 한술 더 떠서 다른 출판사가 아니라 꼭 자신들과 얘기를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확인을 하더군요. 기회가 되면 바로 영문 버전으로 출판하자는 제안까지 했고요.”

“흠.”

정 회장이 가만히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긴다.

이번 작품이 아닌 차기작에 대해 논의하자고 했을 때 내심 걱정스러웠던 게 사실이었다.

‘서준이의 완고한 성격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피어슨 입장에선 기분이 상할 수도 있으니까.’

먼저 요청한 것도 아니고, 이쪽에서 어필했던 작품을 갑자기 진행하지 않겠다고 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오는 거지?’

게다가 단순히 번역본을 보내 달라는 게 아니라 아예 영문 버전으로 영국에서 출판해보는 건 어떤지 역으로 제안을 하고 있었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피어슨의 반응.

그러나 걱정할 건 없었다.

‘뭐, 기다려 준다는데 우리 쪽에서는 고마울 뿐이지.’

올리버 편집장은 까다로운 만큼 경거망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분명 권서준의 작품을 통해 어떤 가능성을 본 게 분명했다.

‘그쪽에서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오면 우리 쪽에서도 어느 정도 성의는 보내는 게 맞겠지. 우리나라가 또 동방예의지국이니까.’

정 회장은 직접 올리버 편집장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피어슨 출판사의 의견 잘 전달 받았습니다. 불쾌하실 수 있는 연락에도 오히려 기다려 주신다는 배려에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권서준 작가와 상의해서 영문 출판과 관련된 얘기도 상의해보겠습니다. 아무쪼록 기다려주신 만큼 놀라운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물론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짧은 내용.

그러나 그 안엔 작품에 대한 정 회장의 자신감과 기대감이 듬뿍 담겨 있었다.

***

다음 날.

나는 가벼운 숙취를 느끼며 일어났다.

“음.”

거실에 나와 냉수를 마시자 조금 정신이 돌아온다.

“이제 일어났어? 어젠 대체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신 거야?”

거실에서 노트북을 보던 누나가 나를 보며 묻는다.

생각해보니 거의 새벽 두 시까지 마신 것 같았다. 둘이서 비운 술병만 대략 5병 가까이 되는 것 같고.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마셨는데도 이 정도 숙취밖에 느끼지 않는다니, 역시 젊음은 신이 준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였다.

“난 새벽이 되도 안 들어오기에 데이트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너 혹시...”

뭔가 건수가 없냐는 듯 떠보는 누나.

나는 쓸데없는 누나의 망상이 이어지기 전에 적절히 찬물을 끼얹는다.

“진영민 CP님 만나서 술 한잔했어.”

“아, 뭐야. 대체 남자 둘이 무슨 할 얘기가 많기에 그 시간까지 술을 마셨대?”

자연스럽게 전날 밤 진영민 CP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의외야.’

진영민 CP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연은 이랬다.

예전에 진영민 CP와 함께 2년 가까이 작품을 준비하던 작가가 있었는데, 그 작가를 구진식 CP가 꼬드겨 채간 것.

구진식 CP는 그 길로 바로 썬샤인으로 가서 대박을 터트렸고, 진영민 CP는 말 그대로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업계에선 비일비재한 일이죠. 다만 그게 내 일이 되니까 충격적인 거고, 아직까지 쓴 뿌리처럼 남아있는 거고요.’

씁쓸하게 술잔을 기울이던 진영민 CP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하긴, 몇 년간 공들여 만든 아이템을 빼앗긴 기분이 어떨지는 당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진영민 CP를 배신한 작가가 바로 김연숙 작가였고...’

그 뒤로 세 사람은 앙숙이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취중 진담이라고 했던가.

남자 둘이 술 한 잔 기울이며 대화를 나눈 덕분에 진영민 CP의 얘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추가로 이번 시청률 대결에서만큼은 절대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고스란히 전해졌고.

“누나, 혹시 김연숙 작가님 알아?”

“김연숙 작가? 작가 지망생이 그 사람을 어떻게 모르니. 히트 친 드라마가 몇 갠데. 특히 드라마 「학원의 신」은 시청률 27%나 찍었잖아.”

하필 누나가 예로 든 작품이 바로 진영민 CP가 빼앗긴 드라마였다.

“근데, 김연숙 작가님이라면 소문이 안 좋긴 해.”

“왜?”

“말이 좀 많은 작가잖아. 명대사 제조기로 유명하긴 하지만 실상은 그 아래 서브 작가들의 아이디어를 빨아먹었다는 소문이 돈 적도 있고.”

하긴 나도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메인 서브 작가가 빠지자 그 유명하던 대사 빨이 급격히 망가졌다는 소문도 있었다.

‘근거 있는 루머라는 건 시청률이 알려줬지.’

메인 서브 작가가 빠진 뒤 흥행 불패를 이어가던 김연숙은 크게 주춤하고 말았다.

물론 망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김연숙 작가라는 이름에 걸맞은 성적은 아니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가 많군.’

구진식 CP, 진영민 CP, 그리고 김연숙 작가까지 얽힌 치열한 다툼.

예나 지금이나 배신, 복수, 증오, 갈등은 최고의 소재이자 최고의 관심거리였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나올 결과.

벌써부터 호기심이 동한다.

내 관심은 자연스럽게 누나에게 흐른다.

“근데, 누나는 지금 뭐 하고 있어?”

“구직 사이트 좀 보고 있지.”

“구직 사이트?”

“어. 대본 작업도 거의 끝났고, 수정 땐 내 역할도 거의 필요 없잖아. 이제 나도 다음 스텝을 준비해야지.”

누나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모니터를 보여준다.

뜻밖에도 출판사 구직 정보였다.

“이번에 경험해보니까 난 작가보다는 편집자로서 재능이 있는 거 같아. 작가가 온전히 집필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고, 큰 틀에서 개요를 잡아주고 기획하는 게 더 잘 맞는 거 같아. 그게 또 성취감도 더 크더라고.”

누나는 이번 경험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깨달은 모양이었다.

“글을 좋아하지만 꼭 작가가 되어야만 글을 쓰는 건 아니잖아. 글과 관련된 일을 통해 내 꿈을 펼쳐나가려고.”

다행히 내 의도와 상황이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

“그래, 누나는 잘할 거야. 내가 도움 받아봐서 알잖아.”

나는 진심으로 누나를 응원했다.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미련하게 계속 작가하겠다고 원고만 붙잡고 있었을 거야. 이제야 뭔가 속 시원하네.”

미소를 지으며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좋은 징조였다.

이대로라면 다섯 번째 책 정도엔 누나와 함께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

늦은 오후.

타이거 스튜디오.

휴대폰으로 각종 기사를 살펴보던 하 본부장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어? 이야, 이쪽도 홍보 엄청나게 하네?”

“그 정도예요?”

진영민 CP가 슬쩍 고개를 내밀며 화면을 본다. 그러자 본부장의 말대로 길게 이어진 홍보 기사들이 보인다.

“이거 온통 「검은 달」 기사뿐이네. 홍보팀에 빨리 연락해서 우리 것도 팍팍 좀 올리라고 해!”

“네, 안 그래도 좀 전에 연락했습니다.”

“하아, 보니까 썬샤인 이것들도 이번에 목숨 걸었네.”

본부장의 말대로 썬샤인 제작사에선 아주 작정을 한 듯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천하의 타이거 스튜디오 홍보팀이 밀릴 정도면 마케팅 비용으로 얼마를 쓰고 있을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

“하반기 농사가 이번 작품으로 결정 나잖아요. 올해 최대 제작비가 들어간 작품이니까.”

“인마,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여기서 죽 쓰면 너도 나도 난리 난다고.”

“뭐, 죽 쓰는 놈이야 난리가 나겠죠.”

차분한 진영민 CP의 대답에 본부장이 쳐다본다.

“근데, 넌 오늘 왜 이렇게 태연하냐?”

“태연한 게 아니라 이미 할 수 있는 걸 다했으니까 담담히 결과를 기다리는 거죠. 강원준 주연에 신하율까지 캐스팅했고, 감독인 정 피디는 촬영장에서 밤새우면서 혼을 갈아 넣으면서 찍고 있는데 이 이상 뭘 더 어떻게 해요?”

“인마, 그걸 내가 몰라? 근데 저쪽도 똑같잖아. 우리에게 강원준이 있으면 저쪽엔 조한웅이 있고, 저쪽 감독은 뭐 놀면서 찍냐?”

본부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배우, 스케일, 제작진 세팅까지 모든 것이 비슷한 상황.

그러나 진영민 CP의 얼굴엔 여전히 자신감이 흐른다.

“뭐야, 너 표정이 왜 그래? 뭐 믿는 구석이 있는 눈치인데?”

“딱 한 가지 다른 게 있잖아요.”

“다른 거? 아...”

이제야 본부장도 알아차린 듯 자기 이마를 소리 나게 친다.

그래.

두 제작사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바로 작가.

‘닳고 닳은 김연숙 작가의 대본은 뻔해. 근데 우리 권 작가님 대본은 다르거든.’

현업 CP가 볼 때마다 놀라는 대본이 바로 권서준 작가의 대본이었다.

‘곧 사극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할 거라고.’

확신에 찬 진영민 CP의 얼굴.

그건 근거 있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

늦은 오후.

타이거 스튜디오 글로벌콘텐츠개발팀.

차동혁 팀장은 메일을 받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야? 포스 극단에서 연락이 왔다고?”

“네, 확실합니다.”

오수정 대리가 야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 팀장이 이해 안 되는 건 당연했다.

거의 반년 가까이 두드렸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반응이 없었으니까.

제목 : 거장의 숨결.

영국의 천재 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연히 제일 먼저 영국 극장가를 두드렸지만 한국에서 보낸 희곡에 관심을 보이는 극단은 없었다.

그만큼 웨스트엔드(West End)의 콧대는 높았다.

‘그럴 만도 하지. 웨스트엔드야말로 전 세계 연극 시장의 양대 산맥과 같은 곳이니까.’

웨스트엔드.

영국 런던 서쪽의 극장 밀집 지역으로 런던극장협회에 속해있는 50여 개 극장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연극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포스 극단이었다.

‘솔직히 그쪽은 생각도 못 했는데...’

오히려 브로드웨이 쪽을 노렸다.

그런데 뜻밖의 연락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순간 차 팀장의 머릿속에 박준태 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수정할 게 없었다고. 이건 이 자체로 완벽해. 내가 손을 댔다가는 오히려 본래 의미가 퇴색되고 말 거야.’

박준태 선생도 인정한 번역 실력.

그게 영국 본토에서도 먹힌 모양이었다.

“권 작가, 역시 대단하군...”

모처럼 올릴 해외 실적에 차 팀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

“포스 극단에서요?”

오랜만에 걸려온 차 팀장의 전화.

기분 좋은 희소식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계약 내용을 주고받은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거의 성사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살짝 격앙된 차 팀장의 목소리가 오히려 기분 좋게 들린다.

-이거 계약만 성사되면 첫 케이스가 될 겁니다. 우리나라 오리지널 작품이 영국 본토 무대에 올라가는 첫 작품이니까요.

통화를 끊고, 차 팀장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적당히 차오르는 고양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아무래도 영국 본토에서 내 작품이 공연된다는 건 그만큼 신나는 일이니까.

그러나,

나는 들뜬 마음을 천천히 다독였다.

영국 진출 이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결과 때문이었다.

바로 며칠 뒤에 다가올 드라마「이옥」의 첫 방영.

‘어떻게 될까?’

물론 걱정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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