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defeat - 패배시키다, 물리치다 (3)
72.
***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짧고 굵게 진행된 회식이 마무리되었다.
“원준 씨, 잘 먹었어!”
“강 배우님, 정말 잘 먹었습니다!”
든든히 배를 채운 스태프들의 힘찬 인사가 식당 안에 울려 퍼진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엄청난 금액이 나왔을 텐데도 강원준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어이구, 정말 많이 나왔네.”
슬쩍 계산서를 본 본부장이 혀를 내두른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오늘 권 작가님이 저한테 주신 선물에 비하면요.”
강원준의 말에 본부장이 눈을 깜빡인다.
“선물? 권 작가님, 제가 모르는 거래가 있던 겁니까?”
본부장이 너스레를 떨며 묻는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진영민 CP가 본부장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오늘 수정 대본 말하는 거잖아요.”
“아, 아아... 그거 하하하하.”
그제야 이해한 본부장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난 또 뭐라고. 하긴 대본이 죽이긴 했지.”
넉살 좋은 본부장의 리액션에 웃음이 한 번 돈다. 자연스럽게 계산을 마친 강원준이 나를 바라본다.
“오늘 마지막 씬은 정말 좋았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강 배우님의 연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늘 같은 열정, 저도 한 수 배워가네요.”
일이 아닌 연기를 하려고 노력하는 배우의 열정은 언제 봐도 작가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이제 5부 능선이지만, 끝까지 잘해볼게요. 제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될 거 같거든요.”
수많은 대표작이 있음에도 강원준은 오직 「이옥」만 떠올리고 있었다.
“이번 작품은 정말 특이한 거 같아요. 예전엔 그저 멋진 역할을 잘 해내면 ‘아, 내가 연기를 잘했구나’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이번엔 멋진 역할도 아니고, 그저 이옥 선생의 삶을 담담히 따라가는 기분인데, 이게 뭔가 묘한 기분이 들어요. 나와 이옥 선생이 마치 하나가 되는 느낌인데... 이게 처음 겪는 기분이라 제대로 설명을 못 하겠네요.”
강원준은 솔직하게 자신이 느끼는 이질감에 대해 털어놓았다. 물론 나는 그가 느끼는 이질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단순히 연기가 아닌 삶으로 살아내고 있어서 그런 거예요. 따지고 보면 그게 진짜 연기이기도 하고요.”
“아...”
강원준이 짧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맞는 거 같아요. 솔직히 이제야 진짜 연기 맛을 알게 된 기분이랄까...”
진한 여운이 남는 10년 차 베테랑 배우의 진솔한 고백이었다.
강원준이 이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작가님, 조만간 저랑 술 한잔하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음료수로 대체한 오늘 회식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하긴, 연기의 맛을 알아버린 배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진 않으니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저 심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리처드 버비지, 그 친구도 그랬었고.’
밤마다 술잔을 기울이며 연기에 대한 열정을 토해내던 오랜 지기의 얼굴이 떠오른다.
“좋습니다. 조만간 뵙죠.”
“그럼, 다들 조심히 올라오십시오.”
차를 타고 멀어지는 강원준의 표정엔 만족감이 가득해 보였다.
“후아, 이제 우리도 돌아갈까요?”
강원준이 떠나자 그제야 본부장이 깊게 숨을 내뱉으며 말한다.
“술 많이 드셨어요?”
진영민 CP가 묻는다.
“그럼, 차 팀장이 보통 술고래야? 계속 따라주는데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이미 거하게 취기가 올랐지만 배우 앞이라 아무렇지 않은 척한 모양. 이 사람도 은근 프로패셔널한 사람이었다.
나는 운전을 위해 술을 마시지 않은 터라 두 사람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어떤 놈이 이렇게 개념 없이 차를 세워뒀어?”
내 옆자리에 주차한 차주의 목소리였다.
삐딱하게 주차를 한 탓에 운전석 자리가 비좁은 상태. 본인이 잘 못 주차를 하고는 내 탓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주의 얼굴을 슬쩍 본 진영민 CP의 표정이 굳어진다.
“구진식?”
“어? 이게 누구야? 진영민 아냐?”
탁한 목소리가 귀를 긁는다.
웃으면서 다가오는데 그리 호감인 얼굴은 아니었다.
“이야, 하 본부장님도 계시네요.”
남자는 썬샤인 제작사의 구진식 CP였다.
구진식 CP.
이번에 우리와 맞붙는 썬샤인 제작사의 CP였다.
이곳이 방송가 내에서 유명한 맛집이라더니 맞는 모양.
그런데 구진식을 바라보는 진영민 CP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는다.
“반갑게 인사할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좋게 말할 때 가서 밥이나 먹고 가지?”
“아이, 왜 이럴까? 사람이 예나 지금이나 옹졸하다니까.”
슬쩍 보던 구진식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럼 설마, 이쪽이 강원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던 그 유명한 입봉 작가님인가?”
말투에선 비꼬는 뉘앙스가 다분했다.
“...가시죠.”
진영민 CP는 말조차 섞고 싶지 않은 듯 앞장선다.
그러자 뒤편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구진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봐봐, 진영민도 한물갔다니까. 이젠 되지도 않는 입봉 작가한테까지 기대다니. 쯧쯧.”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모양새였지만 누가 봐도 일부러 들으라고 내뱉은 말이었다.
물론 그 의도는 정확하게 목표를 향했다.
“...”
철컥.
차 문이 닫힌다.
보조석에 탄 진영민 CP는 그 뒤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
서울로 출발한 뒤 1시간 뒤.
우리는 휴게소에서 잠시 멈췄다.
“으, 죽겠다. 금방 다녀올게.”
“본부장님 벌써 몇 번째에요. 이러다가 휴게소마다 들르겠어요.”
진영민 CP의 핀잔에도 본부장은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 뿐이었다.
“인마, 너도 나이 들어봐. 방광 힘이 얼마나 약해지는지. 서럽게 하지 말고 얼른 문이나 열어.”
본부장은 바지춤을 잡은 채 서둘러 화장실로 뛰어간다. 가만히 본부장의 뒷모습을 보던 진영민 CP가 입을 연다.
“...죄송하게 됐네요.”
“아닙니다. 생리현상을 어떻게 할 수 없죠.”
그러자 고개를 젓는다.
“그게 아니라, 아까 주차장에서요. 저 때문에 괜한 소리를 들으셨잖아요.”
이번엔 내가 고개를 저었다.
“진 CP님이 사과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요?”
쓴 미소를 짓던 진영민이 한숨을 내쉰다.
복잡해 보이는 표정에선 말로 할 수 없는 깊은 앙금이 느껴진다.
“실례가 아니라면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후. 사실 무슨 일이랄 게 있나요? 이 바닥에 있으면 이 꼴 저 꼴 다 보게 되는데 그중 하나일 뿐이죠.”
정 피디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쉰다.
나는 말 없이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진영민 CP 같은 성격은 재촉하기보다는 기다려 주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해지는 스타일이었으니까.
십여 차례 말없이 한숨을 내쉬던 진영민 CP가 힘겹게 입을 뗀다.
“혹시 괜찮으시면, 서울 가서 술 한 잔 더 하실래요?”
***
1시간 뒤.
본부장을 데려다준 뒤, 나는 집 근처에 주차를 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늦은 밤.
포장마차를 떠올리는 분위기의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진영민 CP는 이미 소주 한 병을 비워내고 있었다.
“벌써 시작하셨어요?”
“아, 죄송합니다. 눈에 술이 보이는데 견딜 수가 없어서...”
진영민 CP가 멋쩍게 웃더니 술잔을 채워준다.
“...”
자연스럽게 흐르는 침묵.
진영민 CP의 표정을 복잡해 보였다.
진영민과 썬샤인 제작사 사이에 앙금이 있다는 내용은 정 피디를 통해 들은 적이 있어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술잔을 비워낸 채 그가 먼저 털어낼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
“그게... 한 8년 전쯤 일이었어요.”
한 십 분쯤 술잔이 오간 뒤에야 진영민 CP의 입이 열린다.
“그 당시 전 타이거 스튜디오에 입사한 지 3년 차 되는 피디였어요. 차기작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입봉 작가와 엄청 씨름을 했죠. 대한민국의 입시 문제를 다룬 내용을 다뤘거든요.”
대한민국 입시와 공부법.
그 안에 얽히는 아이들의 신경전.
그리고 학부모들의 허세와 치열한 욕망.
거기에 조미료처럼 들어가는 학교, 학원, 입시 전문가들의 갈등까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관심이 없을 수 없는 소재였다.
“좋은 아이템이었네요?”
“그렇죠? 지금 생각해도 아이템은 괜찮았던 거 같아요.”
진영민 CP의 미소가 빠르게 식는다.
“그런데... 편성이 잘 안 됐어요. 저야 그 당시 좋은 성적을 거둔 작품이 있었지만, 작가가 입봉도 못한 초짜라 위에서 못 미더워했거든요. 솔직히 초반 대본 퀄리티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고요.”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이제야 처음 이번 작품을 하게 되었을 때 나를 바라보던 진영민 CP의 시선이 이해된다. 입봉 작가로 인한 스트레스를 이미 받아본 탓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죠. 아이템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까요. 거의 2년 가까이 같은 아이템을 디벨롭 시켰고 결국 우리는 방법을 찾아냈죠. 그런데...”
말을 멈춘 진영민 CP가 입술을 곱씹는다. 그리고는 벌컥 소주를 들이켜고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런데 그 작가를 웬 놈이 와서 채갔어요.”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화.
진영민 CP가 말하는 웬 놈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게 구진식 CP였던 거군요?”
진영민 CP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연은 놀라웠다.
생각보다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
영국 런던.
피어슨 출판사.
“뭐? 번역본을 안 보내겠다고?”
“네, 작가가 차기작을 쓸 예정인데 그 작품이 탈고되면 보내겠다는데요?”
직원의 보고를 받던 올리버 편집장이 한숨을 내쉰다.
흐린 런던 시내를 배경으로 들고 있던 원고를 바라본다. 정 회장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며칠 뒤 보낸 원고였다.
‘권서준이라고 했었지?’
정 회장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작가였다.
들고 있는 건 서문만 간신히 번역한 원고.
작품 자체는 좋았다.
그러나 국가와 인종을 뛰어넘는 보편성에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정서에 맞지 않아.’
지나치게 한국적인 작품이었다.
최근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로 난리가 난 상황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상 매체에 국한된 이야기라고.
글로 읽고,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워지는 문학은 전혀 다른 분야였다.
‘이대로라면 다음 작품도 볼 필요 없겠어.’
잠시나마 가졌던 기대감이 차갑게 식기 시작한다.
똑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린다.
“편집장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미팅 약속이 없었기에 조금 의아한 듯 고개를 돌린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웨스트 엔드(West End)에 위치한 포스 극단의 디렉터이자 친구인 아서였다.
“어? 아서 자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올리버, 자네 시간 좀 괜찮나? 내가 급한 부탁이 있어서 말이야?”
아서는 달려왔는지 땀을 뻘뻘 흘리며 들고 온 대본을 올리버에게 내밀었다.
“이것 좀 한 번 봐주게.”
“뭔데 그러나?”
“이게 한국에서 온 희곡인데... 지금 내가 느낀 감정이 맞나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
아서의 표정은 어딘가 다급했고, 들떠 있었다.
“한국에서?”
올리버 편집장의 미간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진다. 연극은 다른 매체와 달리 영어로 공연해야만 했다.
그런데 웬 한국 작품일까?
올리버는 의문을 품은 채 대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등장인물을 보자마자 이해할 수 있었다.
‘크리스토퍼 말로라니...’
셰익스피어와 함께 천재 작가로 불리는 비운의 작가. 그의 삶을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있었다.
‘이건 좀 흥미를 끄는군.’
자연스럽게 대본을 넘긴다.
그런데...
“어?”
한 장, 두 장.
그렇게 대본이 빠르게 넘어간다.
작품을 읽을수록 올리버 편집장의 눈이 커진다.
안경을 고쳐 쓰고 어느새 상체는 바짝 앞으로 향해 있었다.
“이 작품, 수준이 엄청난데?”
놀라 묻는 올리버 편집장.
지켜보던 아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래, 나도 딱 그 반응이었다니까. 자네 반응을 보니 내가 착각한 게 아니었어. 이건... 정말이지 센세이셔널한 작품이야. 어쩌면 웨스트 엔드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킬 작품이라고.”
뉴욕 브로드웨이와 함께 세계 뮤지컬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웨스트 엔드.
그곳의 디렉터가 확신하고 있었다.
“좀처럼 가슴이 진정되질 않는군.”
아서는 평소와 달리 들뜬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건 대본을 읽고 있던 올리버 편집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 작가가 누구야?”
영어권도 아닌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대본. 영국인보다 더 영국인의 느낌을 살린 완벽한 작품.
다른 장르였지만 문학계 종사자로서 갖게 되는 자연스러운 관심이었다.
아서는 말없이 희곡 첫 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엔 영문으로 된 이름이 적혀 있었다.
Seojun Kwon.
작가가 한국인이라는 걸 증명해주는 이름.
그런데,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었다.
“서준...권, 서준 권...”
그리고 그 순간 올리버 편집장의 눈이 커진다.
“궈, 권서준? 권서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