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71화 (71/203)

# 71. defeat - 패배시키다, 물리치다 (2)

71.

***

촬영장 옆에 설치된 간이 천막.

강원준은 응급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아, 아...”

스태프가 찜질과 압박붕대를 감아준다.

참으려고 했지만 악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온다.

“야, 아프면 아프다고 해도 돼. 괜히 무리하다가 더 큰 일 난다고. 네 몸값이 얼만지나 알아?”

차연우 팀장이 걱정스러운 듯 자꾸 말을 건다.

“좀 조용히 해 봐. 안 그래도 신경 쓰이니까.”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 솟구친다.

“괜히 또 나한테 성질이야.”

입술을 비죽거리며 차 팀장이 서운한 듯 말한다.

하긴, 잘 못 한 건 자신인데 애꿎은 차 팀장에게 화풀이할 수는 없었다.

강원준은 이내 숨을 고르며 입을 연다.

“작가님은, 아직이셔?”

“응.”

강원준이 한숨을 내쉰다.

‘다 나 때문이야...’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자책을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괜히 무리하다가 작품을 망쳐버렸다.

여태까지 공들여 쌓아온 탑이 한 번에 무너진 기분이었다.

‘좀 더 완벽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 씬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그토록 노력했건만 오히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작가님을 믿어보자. 대안이 있으시겠지.”

“...”

권서준 작가라면 대안을 만들어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차선책이라는 뜻이니까.’

가장 좋은 장면, 가장 완벽한 씬은 이미 망가져 버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베테랑 연기자는 개뿔. 그저 주제도 모르고 날뛰다가 모두를 고생시키는 허접이지.’

진심을 다했던 만큼 자책이 깊어진다.

“이제 슬슬 30분 되어가는 거 같은데...”

차 팀장이 시계를 보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30분.

권서준 작가가 자신 있게 말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걸어가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채 20분도 안 되는 시간. 그 안에 대본을 수정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 나 때문이야...’

또다시 자책이 이어진다.

그런데 그때,

언덕을 바라보던 차 팀장의 눈이 커진다.

“어? 저기 작가님 오신다!”

“뭐? 벌써?”

놀란 강원준이 벌떡 일어나다가 다시 인상을 찡그리며 주저앉는다.

“아...”

시큰거리는 발목.

그러나 시선은 재빨리 다시 정면을 향한다.

차 팀장의 말대로 저 멀리 노트북을 든 채 내려오는 권서준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더없이 평온한 얼굴에 여유 넘치는 걸음.

‘설마, 벌써 수정하신 건가?’

검은 눈동자엔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었다.

***

“아니, 이렇게 빨리 수정하신 건가요?”

진영민 CP가 놀란 듯 묻는다.

“네, 다행히 잘 나온 것 같습니다.”

나는 재빨리 정 피디에게 파일을 넘겼다. 자연스럽게 단톡방에 올린 정 피디에 의해 수정 대본이 스태프와 감독, 그리고 배우에게 전달된다.

순간,

촬영장 내엔 정적이 흐른다.

눈으로 바뀐 대본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정 피디였다.

“이거, 그림이 훨씬 더 좋은데요?”

옆에 있던 본부장이 거든다.

“내 말이. 이전 버전이 완벽한 줄 알았는데, 수정본을 보니까 더 그림이 선명해지네요.”

“맞아요. 게다가 강원준 씨가 다친 다리로도 충분히 연기할 수 있을 것 같고요.”

“...”

그런데 가장 중요한 강원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태플릿 PC만 바라볼 뿐이었다.

완벽주의 가까운 그의 성격을 알기에 나는 농담 섞인 말을 건넨다.

“어때요? 마음에 드시나요?”

그제야 강원준이 고개를 든다.

“이건...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죠.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님.”

나를 바라보는 강원준의 얼굴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강원준은 이내 다시 태블릿 PC에 담긴 대본으로 눈을 돌린다.

뜨겁게 타오르는 눈동자.

연기에 갈급한 진짜 배우의 눈빛이었다.

***

“자, 이러다가 해 떨어집니다! 어서 촬영 시작합시다.”

정 피디의 진두지휘에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잠시 뒤,

준비를 마친 촬영장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쏠리는 순간.

“레디, 액션!”

정 피디의 사인과 함께 촬영이 시작된다.

문체반정에 의해 좌절한 이옥이 도성 떠나 산을 넘어간다.

그러다가 이내 주변 경치에 취해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예서 쉬어가자.”

“예? 여기서요?”

“그래. 아름답지 아니하냐?”

주변을 둘러보던 몸종의 얼굴에 난처함이 드러난다.

“아이고 어르신, 이러다가 영락없이 밤이슬을 맞으실 겁니다. 부지런히 걸어야 해지기 전에 고을에 들어설 텐데...”

걱정하는 몸종과 달리 이옥의 표정은 태평했다.

“오늘 가나, 내일 가나 무엇이 문제가 되겠느냐?”

“그래도 밤이슬이 찰 텐데...”

“그깟 밤이슬이 선비의 앞길을 막을쏘냐. 고작해야 옷자락을 적시는 정도겠지.”

이옥은 이내 바위에 털썩 걸터앉아 가만히 산 아래를 바라보며 시조를 읊조린다.

佳故來(가고래)

無是佳 無是來(무시가 무시래)

“잠시 쉬어가자. 아름답지 않았다면 예까지 오지도 않았을 터...”

그의 의지와 감정선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밤이슬은 시련을 상징했다.

이옥은 시련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닌 머물러 견뎌내며 그 안에서 또 다른 아름다움은 찾아내는 데 주목했다.

세상은 변했으나 변하지 않았고,

꿈은 좌절했으나 아름다운 것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리고 선비는 붓을 들어 그 세상을 묵묵히 기록한다.

해가 저물고,

산속에 천천히 어둠이 잠긴다.

그러나 석양을 받은 이옥의 얼굴엔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자신감이 내비친다.

이옥.

그가 어떤 자인지,

이 모든 장면에 응축되어 있었다.

“컷! 오케이!”

그 순간,

정 피디의 시원한 목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진다.

NG도 없이 마무리된 촬영.

가장 멋진 그림이 나오는 데엔 한 번의 테이크면 충분했다.

***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장의 분위기가 더없이 좋았다.

촬영이 끝났지만 정 피디는 몇 번이나 마지막 장면을 확인하고 확인했다.

그리고는 환한 얼굴로 다가온다.

“작가님, 보세요. 이거 정말 대박인데요?”

모니터 안에 담긴 장면.

씁쓸하면서도 다소 상기된 강원준의 표정은 이옥의 복잡한 심경을 충분히 담아내고 있었다.

이옥이 강원준이고, 강원준이 이옥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연기.

게다가 마침 해가 넘어가는 장면까지 예술이었다. CG로 담을 수 없는 따스함이 담겼다.

“아니, 어떻게 그런 연출을 생각하셨어요?”

정 피디가 놀란 듯 다시 묻는다.

“위에서 보니까 주변이 마치 북한산 산세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아, 맞아요. 그래서 고르긴 했었는데...”

“그 덕에 자연스럽게 이옥의 중흥유기(重興遊記)가 떠올랐죠.”

“하아, 그 짧은 시간 내에 그게 가능하다니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렵네요.”

정 피디는 연신 혀를 내둘렀다.

그때, 먼발치에서 보던 본부장이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다가온다.

“역시, 우리 작가님. 대단하십니다.”

진영민 CP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고생하셨어요. 이렇게 촬영장을 방문한 게 천운이었네요.”

“그러게. 이번 작품 대박 나라고 이옥 선생이 굽어 살피시나 보다.”

본부장의 농담에 웃음꽃이 터진다.

그때,

다리를 절며 다가온 강원준이 고개를 숙인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제대로 신세 졌습니다.”

“별말씀을요. 모두 작품을 위해 고생한 거잖아요. 도움이 되었다니 작가로서 기쁠 뿐이고요.”

“그래도 이렇게 그냥 넘어가기엔 제 마음이 편치 않죠. 다들 저 때문에 고생하셨는데, 오늘 회식은 제가 시원하게 쏘겠습니다!”

강원준이 모든 스태프들이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높여 외친다.

“와!”

동시에 사람들이 환호성으로 화답한다.

하긴, 고된 작업 후에 찾아오는 회식만큼 행복한 시간도 없지.

신이 난 사람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

강원도에 위치한 강릉 선교장.

사극 촬영장으로 유명한 이곳에선 또 한편의 사극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으아앗! 네 이놈, 이러고도 살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사내놈이 혀가 길구나. 내 검을 받아라!”

듣기 좋은 저음과 함께 긴 검이 달빛에 반짝인다.

순간, 검은 무복을 입은 복면 쓴 사내가 칼을 휘두른다.

단발적인 기합과 함께 현란한 검술이 이어지고, 수십 명의 도적이 순식간에 볏단처럼 쓰러지고.

“컷, 좋았습니다!”

오 감독의 외침이 들리고 촬영이 멈춘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검을 휘두르던 배우가 거칠게 복면을 벗는다.

조한웅.

폭넓은 팬덤을 가진 배우이자 사극 「검은 달」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복면을 벗은 조한웅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하아, 감독님 가면 벗으면 안 돼요? 기껏 분장했는데 다 가려지잖아요.”

불만을 토로하는 모습은 매섭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오 감독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오른다.

“아... 그래도 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암습하는 주인공이 복면도 안 쓴다면 시청자 입장에선 말 나올 수도 있거든요.”

“뭐 드라마가 다 그런 거죠. 그렇게 사실적으로 따지면 혼자서 이 많은 도적을 때려잡는 게 말이나 돼요?”

“...”

틀린 말은 또 아니었기에 오 감독이 머뭇거린다.

“애초에 제 얼굴 보려고 시청하는 거지, 복면 보려는 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구 CP님?”

조한웅이 뒤를 보며 말한다.

그러자 한 남자가 급히 다가온다.

“그래, 오 감독. 너무 빡빡하게 하지 말고 우리 한웅 씨가 원하는 대로 가자. 솔직히 그림이 중요하지, 현실성이 뭐가 중요해?”

구진식 CP의 말에 오 감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메가폰을 잡는다.

“하아, 다시 갑시다.”

감독의 사인에 스태프들이 또다시 위치를 잡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구진식 CP.

그런데 그때,

조연출 하나가 급히 다가온다.

“CP님, 강원준이 발목을 삐었다는대요?”

“뭐? 그게 정말이야?”

“네, 그쪽 촬영장에 제 동기가 있는데 좀 전에 병원까지 갔대요.”

“하아, 활동이 많은 사극에서 하필 발을... 참나, 망하려니까 별별 일이 벌어지는군.”

“저희한텐 좋은 소식 아닌가요?”

순간, 구진식 CP의 얼굴에 소름 돋는 미소가 떠오른다.

“물론이지. 이보다 기쁜 소식이 없지.”

동시간대, 같은 장르로 맞붙어야 하는 경쟁사의 비보는 희소식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 책임자가 진영민이라면 더 기쁠 수밖에 없었다.

‘영민아, 이거 어쩌냐? 이번에도 내가 이길 거 같은데?’

구진식의 얼굴엔 비릿한 미소가 남아있었다.

***

촬영이 끝나고 우리는 다 같이 이동했다.

목적지는 강원도 횡성에 위치한 고급 식당이었다.

우미원.

‘소고기 맛은 우리가 세계 최고다’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

“이야, 역시 강원준 씨 손이 크네.”

식당에 도착한 본부장이 알은 채를 한다.

“유명한 집인가요?”

“그럼요. 방송가 사람들에겐 소문이 난 집이에요. 여긴 방송 출연도 안 해요. 안 해도 잘 되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한우전문점이라 그런지 메뉴판에 적힌 가격만 봐도 쉽게 오기 힘든 가격대였다.

“자, 오늘은 제가 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껏 드세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근처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온 강원준이었다.

“어때요? 괜찮대요?”

정 피디가 다급히 묻는다.

“네, 다행히 인대가 놀란 정도라 일주일 정도 안정을 취하면 괜찮다네요.”

차 팀장이 대답했다.

“정말 다행이네요. 내일부턴 실내 씬이라 무리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요.”

“그러게요. 정말 아깐 가슴이 철렁했다니까요.”

사람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권 작가님이 침착하게 수정하셨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러고 보니 권 작가님이 가장 침착하셨네요?”

“하, 나이만 어리시지 담력이 보통이 아니라니까요?”

사람들은 놀란 모양이었지만 내 입장에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전생에선 이보다 훨씬 더 다이내믹한 순간들을 수없이 경험했으니까.

화기애애한 회식.

내일도 촬영이 있기에 술은 간단히, 대신에 고기는 원 없이 먹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강원준이 술 대신 음료수를 따라준다.

나는 운전 때문에, 강원준은 다리 부상 때문에 술 대신 음료수를 선택했다.

얼굴엔 고마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오늘, 본의 아니게 쪽 대본을 드리게 되었네요.”

농담 삼아 던진 말.

강원준이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이런 쪽대본이면 언제든 환영이죠.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럼, 오늘 촬영은 만족스러우셨나요?”

13번에 걸친 재촬영을 고집한 배우였기에 궁금한 부분. 그러자 강원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만족하다마다요.”

음료수를 한 잔 마신 강원준이 말을 잇는다.

“아마, 오늘 장면이 우리 작품의 최고 명대사가 될 거니까요.”

보기 드문 강원준의 단언하는 모습.

확신에 찬 배우의 표정 무엇보다 좋은 징조였다.

그리고 강원준의 확신은 후에 여러 인터뷰에서 유명한 에피소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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