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defeat - 패배시키다, 물리치다 (1)
70.
***
패밀리 카 선호도 1위.
가장 갖고 싶은 레저용 SUV 수입차 부문 1위.
정영만 회장이 준 선물에 대한 인터넷 검색 내용이었다.
나야 차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몰랐지만 가격만큼은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이, 이게 1억이 넘는다고?”
차를 본 누나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깡통 모델이 1억이지 풀 옵션을 하면 1억을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아이고, 이렇게 귀한 걸 받아도 되는 거니?”
엄마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누나가 나선다.
“엄마, 지금 서준이 책이 베스트셀러 되고 아주 난리가 났거든. 그래서 다음 작품도 계약하려고 출판사에서 준 거야.”
“그래?”
“그렇다니까. 서준이 정도 되니까 이런 선물도 주는 거지 아무한테나 주는 거 아니야.”
순간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매가 여덟 팔자로 늘어진다. 애잔하면서 대견한 미소.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이었다.
“그리고 이 차가 어떤 차냐면 얼마 전에 유명 연예인이 고속도로에서 큰 교통사고가 났거든? 근데 그 사람이 병원도 들르기 전에 다시 이 차를 샀대.”
“왜?”
“그만큼 튼튼하니까. 영락없이 죽는 각이었는데 살았거든.”
“어머, 그래서 그런지 딱 봐도 튼튼해 보인다.”
엄마는 조심스럽게 차체를 쓰다듬는다.
그리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래도 운전 조심해야 해. 알았지?”
엄마 눈엔 아직도 난 영락없는 어린 애였다.
“걱정하지 마. 조심히 할 테니까.”
속도 좀 즐기려다가 50년 먼저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떻게 얻은 인생 2회차인데 허망하게 날려버릴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나는 가만히 차를 바라본다.
깔끔하면서 다부진 외관.
높은 보닛으로 인해 웅장한 느낌을 자아내는 모델은 튼튼한 사내를 연상시키는 생김새였다.
그러나 내 눈길을 끄는 건 가격이나 디자인이 아니었다.
[안전한 해외 차 1위]
아마 이 타이틀이 정 회장이 이 차를 선물로 고른 이유겠지.
정 회장의 마음이 고스란히 읽힌다.
사고야 막을 수 없겠지만 최대한 안전하게 가족들과 드라이브 하라는 의미.
가족을 잃은 그 마음을 알기에 이런 선물을 한 것이었다.
가격을 떠나 진심이 가득 담긴 선물.
그 마음 씀씀이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나만큼이나 힘든 시간을 보냈겠지.’
동병상련이라더니, 자식 잃은 부모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번 작품을 더 열심히 써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기분이었다.
***
다음 날.
오전 내내 새로운 작품 집필 구상을 하던 나는 오후 무렵이 되어서 타이거 스튜디오를 찾았다.
일주일 만에 이곳을 찾은 이유는 촬영장을 한번 방문하기로 한 일정 때문이었다.
현재 강원도에서 촬영 중이라 하 본부장, 그리고 진영민 CP와 함께 만나 그쪽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진영민 CP와 먼저 만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본부장이 허겁지겁 뛰어 내려온다.
“으아, 이거 어쩌지? 마누라가 갑자기 차를 쓴다고 해서 아까 가져갔는데...”
본인이 직접 모시겠다던 본부장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어쩔 수 없죠. 제가 올라가서 회사 차 가져올게요.”
진영민 CP가 재빨리 움직인다.
그러나 굳이 다시 올라가서 낡은 회사 차로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
이제 나도 오너드라이버니까.
“그러지 말고 제 차로 이동하시죠.”
내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쳐다본다.
스마트키를 누르자 주차되어 있던 차에 불이 들어온다.
“어? 우와... 차 사셨어요?”
진영민 CP가 차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뜬다.
“산 건 아니고, 선물 받았어요.”
“선물이요? 아니 어떤 사이기에 이런 고가의 선물을...”
오해가 생기기 전에 설명이 필요했다.
“출판사에서 주셨어요. 이번에 증쇄도 있었고, 차기 계약 관련해서 좋은 제안을 주셨거든요.”
“아, 출판사요? 대박...”
본부장이 놀란 얼굴로 차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
“이야, 권 작가님. 역시 대단하시네요. 제작사도 아니고, 출판사에서 이런 선물을 준다는 건 처음 들어서... 그리고 이 차는 정식으로 구매해도 한 참 걸리는 인기 모델이거든요.”
“그래요?”
진영민 CP가 되묻는다.
“그래, 장 대표 알지? 그 친구가 이 모델 사려고 구매했는데 6개월째 기다리고 있잖아. 안전성 하면 이 차가 최고거든.”
“승차감도 죽이겠네요?”
“말해 뭐해. 권 작가님, 길게 말할 것 없이 촌놈에게 승차감 좀 경험하게 해주시죠?”
“물론이죠.”
농담 섞인 본부장의 말과 함께 우리는 차에 올라탔다.
버튼을 누르자 기분 좋은 엔진소리와 함께 배기음 들린다.
“크으... 소리부터 죽인다.”
“와우, 이 승차감은 뭐죠?”
“이래서 좋은 차를 타야 한다니까. 이 부드러운 코너링 봐봐.”
“대박, 역시 비싼 값을 하네요.”
“그렇다니까. 역시 사람은 우리 권 작가님처럼 성공해야 한다고. 책 재계약하고, 게다가 이런 차도 선물 받고, 얼마나 좋아?”
촬영장으로 떠나는 길.
나는 무려 2시간 동안 추임새에 가까운 감탄사를 들어야 했다.
물론 웬만한 음악보다 기분 좋은 반응이었고.
***
늦은 오후.
차가 막히는 바람에 우리는 예정된 시간보다 30분쯤 늦게 촬영장에 도착했다.
“으아, 하도 떠들었더니 배고프다. 촬영은 이미 끝났겠지?”
원래 예정이면 이미 촬영이 마쳤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아직 촬영 중이었다.
어딘가 묘한 기류가 느껴지는 촬영장 분위기.
그 분위기를 가장 먼저 체크한 본부장이 스태프에게 다가간다.
“뭐야? 왜 아직도 촬영 중이야? 무슨 일 있어?”
본부장이 의아한 듯 묻자 옆에 있던 조연출이 얼른 대답한다.
“무슨 일까지는 아니고요. 강원준 배우님이 자기 연기가 만족스럽지 못한 가 봐요.”
“뭐?”
본부장과 함께 우리는 정 피디 옆으로 다가가 모니터를 바라봤다.
따각따각따각.
말고삐를 잡아채고 굽이진 산길을 호쾌하게 내달리는 장면.
속세에 대한 마음을 접는 모습이 시원하게 담기는 장면이었다.
게다가 강원준은 스턴트 없이도 난도 높은 승마 연기를 하고 있었다.
“다시 해도 될까요?”
벌써 12번째 재촬영.
중요한 씬이라 강원준도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아. 역시 강원준 저 친구, 대충하는 법이 없다니까.”
본부장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하긴, 듣기로는 이 장면을 위해 몇 달째 승마장에서 살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완벽의 완벽을 기하는 모습은 내 입장에서도 환영할 일이었고.
물론 그 열정을 리스펙하기에 정 피디를 포함해 모든 촬영진들도 함께 고생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짜증 나는 NG가 아니라 공든 작품을 만드느라 촬영이 더뎌지는 순간.
“레디, 액션!”
정 피디의 외침과 함께 13번째 테이크가 돌아간다.
“이랴!”
조연출의 신호를 받은 강원준이 삿갓을 쓴 채 산길을 내달린다.
표정도,
자세도,
뒤편에 펼쳐진 산새마저도 완벽했다.
정 피디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느낌.
카메라에 담긴 모습은 영락없이 이옥이었다.
드디어 나왔다!
강원준의 연기를 바라보던 모든 스태프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마지막 장면이라고 확신하던 그 순간,
이히히힝!
갑자기 잘 달리던 말이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앞발을 번쩍 지켜 들었다.
“어, 어?”
순간 강원준은 고삐를 잡은 손을 놓치고 순식간에 낙마하고 말았다.
“워, 원준 씨!”
모든 스태프들이 촬영을 중지한 채 강원준에게 달려갔다.
“아, 괜찮습니다.”
강원준은 괜찮다는 미소를 보이며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오른발을 딛던 강원준이 미간이 순간 일그러진다.
“설마...”
지켜보던 차연우 팀장이 얼른 다가가 강원준의 발목을 살핀다. 멀리서 봐도 꽤 부어오른 발목이 보인다.
“살짝 접질린 거 같네요.”
낙마의 충격으로 발목이 삐끗한 것.
“이 정도는 괜찮습니... 아, 아!”
차 팀장이 힘을 주자 강원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괜찮기는 무슨. 정 감독님, 이 대로면 말 타는 씬 촬영은 불가능하겠는데요?”
배우가 최우선인 차 팀장은 자기 생각을 솔직히 전달했다.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오기 부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
“형, 나 진짜 괜찮다니까?”
“발목이 이렇게 부었는데 말이 돼?”
강원준은 베테랑답게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지려 했다. 그러자 정 피디가 나선다.
“차 팀장님 말이 맞아요. 오늘 무리하다가 나머지 촬영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어요. 우리 아직 10회 넘게 남았는데 남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강원준이 고개를 숙인다.
입술을 곱씹는 게 안타까워하는 게 보인다.
“어떻게, 지금이라도 대역을 쓸까요? 이 장면 말고는 당분간 말 타는 장면이 없어서 괜찮을 거 같은데요?”
조연출이 말했다.
“이 장면이 어떤 장면인지 몰라서 그래? 대역 쓸 거였으면 강원준 씨가 왜 13번이나 같은 장면을 찍었겠어?”
“아,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 피디의 말에 조연출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사과를 한다.
순식간에 촬영장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이쯤 되자 지켜보던 본부장과 진영민 CP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정 피디. 어떻게, 촬영은 되겠어?”
“일단 촬영을 연기하는 수밖에 없을 거 같아요. 다만 방영 스케줄이 문제네요. 당장 내일부터 전라도 촬영이라 당분간 여기 오기는 힘들 텐데...”
정 피디 말에 진영민 CP의 얼굴이 굳어진다. 첫 방영도 하기 전에 날벼락 같은 소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연 배우의 부상 때문에 이대로 촬영은 불가능했다.
모두가 심각한 분위기.
답은 하나였다.
“대본 수정은 어떨까요?”
내가 말했다.
정 피디의 얼굴이 순간 환해졌다가 이내 다시 어두워진다.
“그러면 감사하지만 이 장면, 작가님께서 가장 힘쓰신 부분이잖아요.”
“그건 맞지만 이대로 촬영 못 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길 거 같은데요?”
“...”
내 말에 정 피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30분만 주세요.”
“...네?”
“그거면 충분합니다.”
“...”
정 피디가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혹시 무리가 아니냐는 듯한 시선.
그러나 정말로 충분했다.
이런 상황, 한두 번 겪어 본 일도 아니었으니까.
***
30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그러나 당황할 건 없었다.
나는 노트북을 들고 산길을 올랐다.
정확히 강원준이 말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한 그 부근이었다.
나는 한적한 공간에 머물러 가만히 주변을 바라본다.
이옥이 속세를 등지는 장면.
강원준이 그토록 열심히 재촬영한 만큼 중요한 포인트였다.
‘물론 그게 독이 되긴 했지만.’
강원준의 진심을 알기에 탓할 수도 없었다.
하긴 이럴때야 말로 드라마 작가의 역량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물론 나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고.
‘생각보다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지.’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주변을 살폈다.
어쨌거나 오늘 촬영은 이곳에서 끝내야 했다.
속세를 등지는 이옥의 심정을 대변하면서 발목을 접질린 강원준의 연기를 살려야만 했다.
‘말은 절대 못 탈 거 같고...’
여러 가지 조건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자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어딘가 낯익은 산세.
‘이건 마치 북한산과 같군.’
아마 정 피디가 이곳을 선택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인 듯싶었다.
자연스럽게 이옥의 글귀가 떠오른다.
佳故來(가고래)
無是佳 無是來(무시가 무시래)
아름답기 때문에 왔다.
아름답지 않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산을 유람하며 썼던 이옥의 마음이 내 가슴으로 흘러들어온다.
‘가만...’
순간 내 머릿속에 영감이 떠오른다.
속세를 등지는 걸 꼭 말을 타고 떠나는 장면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그건 마치 등을 지기보다는 도망치는 듯한 느낌을 풍길 수도 있잖아?
그러나 이옥은 절대 도망친 게 아니었다.
순간,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옥이 산 정상에 서서 도성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외치는 한 마디.
‘잠시 쉬어가자. 아름답지 않았다면 예까지 오지도 않았을 터.’
날이 저물어가는 산을 태연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오히려 그의 성격과 맞아떨어졌다.
‘그래, 이거다...’
심지에 불이 붙듯 머릿속이 밝아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타닥타닥타닥.
고요한 산속엔 타자 소리만이 고요히 흐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