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fairyland - 요정 나라 (3)
69.
***
주말을 하루 앞둔 금요일.
지난번 주상진 편집장의 말대로 통장엔 소설 인세가 꽂혔다.
통장 잔고는 확인할 때마다 무서울 정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이번 생의 목표가 돈은 아니었지만 언제 봐도 열심히 일한 결과에 대한 보상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일이었다.
‘대본 하나를 푼돈에 팔았던 그 시절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지.’
기분이 좋아진 나는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가족들과 함께 서울 근교 나들이 계획을 세웠다.
공유 차를 렌트한 뒤, 한적한 곳으로 드라이브를 떠났다.
물론 아무 의미 없는 나들이는 아니었다.
나는 적어도 이 나들이를 통해 두 가지를 얻을 생각이었다.
첫째는 가족들과의 시간이었다.
내가 전생에 누리지 못한 시간들.
이번 생에선 원 없이 누리기로 마음먹은 행복이었다.
“어머 저거 봐라. 강물이 어쩜 저렇게 예쁘니?”
차창 밖으로 햇빛을 받은 북한강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엄마는 소녀가 된 것처럼 들떠있었다.
“뭐야, 엄마 이렇게 드라이브 좋아하는 사람이었어?”
“그럼, 너희 아빠랑 얼마나 많이 돌아다녔는데. 물론 그때는 오토바이였지만.”
엄마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며 그 시절의 향수를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떠올리는 모습이었다.
“앞으로 자주 오자. 바람 쐬니까 나도 좋네.”
내 말에 엄마가 미소를 짓는다.
애틋해지는 시간을 잠시 보낸 뒤 우리는 지난번 정 회장과 갔던 백숙집에 들러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누나가 인타스로 찾은 예쁜 카페에 들러 맛있는 후식도 즐겼다.
“너무 좋다, 여기...”
카페 밖 풍경을 음미하던 엄마가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며 넌지시 물었다.
“엄마, 이런 곳에서 살면 좋을 거 같지 않아?”
엄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좋지. 이런 곳에서 텃밭 가꾸면서 살면 소원이 없겠다.”
엄마의 아련한 눈빛에선 벌써부터 자연과 하나 된 삶의 그려지는 듯했다.
옆에 있던 누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 서울에서 멀지도 않고 글도 술술 써질 거 같은데?”
누나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말했다.
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속으로 다짐해본다.
조금만 기다려.
그 꿈 다 이뤄줄 테니까.
그리 머지 않은 미래.
곧 다가올 우리 가족의 행복이기도 했다.
***
와이즈 출판사 마케팅팀.
사무실로 들어오던 양 대리가 다급히 묻는다.
“편집장님, 권 작가님 작품 「덧없는 행운이여」 해외번역 업무는 모두 올스톱 된 건가요?”
“그래, 회장님 지시로 끝났잖아.”
양 대리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대체 왜 그랬을까요? 피어슨 출판사면 엄청난 기회가 될 텐데요?”
“그 작품보다 훨씬 더 멋진 작품이 있으니까.”
“...네? 설마 차기작이 나오나요?”
“쉿.”
주 편집장을 주변을 살피며 주의를 줬다.
“입조심 해. 아직 계약도 못 한 상황에서 설레발을 쳤다가 괜히 엎어질 수 있으니까.”
안 그래도 심상치 않은 작품의 인기에 최근 여러 출판사에서 권서준 작가와 접촉을 시도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드라마에 집중하고 싶다는 권 작가가 모두 거절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혹시 생각이 바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덕분에 며칠 사이 주상진 편집장의 업무가 부쩍 늘었다. 편집 중이던 작품을 올 스톱하고 권서준 작가와의 계약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차기작도 차기작이지만 이번 작품 인기도 심상찮네요. 9쇄를 찍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쇄를 찍어야 할 정도로 판매가 빠르잖아요?”
주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인터뷰도 거절하고, 사인회 요청도 다 거절하는데 이 정도 성과는 정말 이례적이지.”
젊은 작가가 만들어낸 명작.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작품성.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다.
보여주되 생각은 독자에게 맡기는, 모든 사건을 쥐고 흔들되 막판의 결론은 독자에게 맡기는 이야기.
그래서 읽는 사람마다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다양한 결말과 깨달음을 얻어간다.
자연스럽게 인터뷰 요청과 사인회 요청이 늘어가지만 권서준 작가는 그때마다 사양했다.
‘저는 독자분들이 보다 작품 속 내용에 집중하기 원합니다. 아직 제가 나서는 건 내키지 않네요.’
그 말인즉슨 철저히 작품으로만 승부 보겠다는 뜻이었다.
만일 일반적인 신인 작가 이렇게 말했다면 대번에 세상 물정 모르는 초짜 작가라고 언성을 높일 일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권서준 작가였다.
“작가가 적극적으로 마케팅하지 않아도 판매가 된다면 굳이 할 필요는 없으니까.”
작품 속으로 대중의 흥미는 끌되 작가의 삶은 다 보여주지는 않는, 그래서 팬으로 하여금 더 안달 나게 만드는 마케팅.
권서준은 정확히 그 지점을 알고 있었다.
대중의 니즈를 읽어내는 감각이 예사 실력이 아니었다. 마치 십수 년 넘게 출판 업계에 종사해본 사람처럼 뛰어났다.
‘능숙해. 어쩌면 나보다 더...’
권서준 작가의 예측대로 대중들은 고요한 작가의 행보에 더 열띤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차기작이 더 기대되는 상황이었다.
만일 첫 작품이 워밍업이었다면, 두 번짼 얼마나 멋진 작품이 나올까.
이미 살짝 맛을 본 주 편집장이었기에 그 기대가 더욱 컸다.
***
서울 근교에 있는 카페.
모처럼 이런저런 옛날얘기를 하다가 각자 음료수를 하나씩 챙긴 채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을 시작한다.
그래, 산책.
이게 나들이를 온 두 번째 이유였다.
내가 산책을 즐기는 이유는 명확했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큰 영감의 보고였으니까.
나는 저물어가는 햇살을 음미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빛을 받아 깨진 유리처럼 반짝이는 강물이 내 옆을 유유히 흐른다.
‘아름답다...’
나는 산 중턱에 앉아 가만히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자연의 모습.
나의 문장 속 수사와 감각은 모두 자연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내가 이곳을 찾은 진짜 이유는 차기작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함이었다.
주제와 캐릭터는 정해진 상황.
다만 내 안에서 두 가지 욕구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하나는 밝고 경쾌한 희극을 쓰고자 하는 마음, 또 하나는 가슴이 저미는 아픔을 담은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마음.
희극과 비극으로 나뉘는 두 가지 선택지 안에서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동일한 주제, 동일한 캐릭터지만 어떤 분위기로 가느냐에 따라 전달되는 메시지는 전혀 달랐다.
‘어느 쪽이 좋을까?’
희극일지, 아니면 비극으로 갈지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생각이 깊어진다.
나는 고개를 들어 가만히 풍경을 바라본다.
바람에 풀이 눕고,
향긋한 꽃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들이치는 따스한 햇볕이 푸른 들판을 보석처럼 빛나게 만든다.
문득 한 작품이 떠오른다.
「한여름 밤의 꿈」.
내가 쓴 대표적인 낭만 희극으로 사각 관계에 빠진 두 쌍의 남녀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었다.
연인들의 사랑싸움을 초자연적인 힘을 빌려 해결되는 꿈같은 이야기. 환상적이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로 유명한 작품이었다.
‘사랑으로 인한 고난, 그리고 맹목적인 사랑이라는 주제를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이지.’
자연스럽게 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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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강둑이 있는데 거기에는 야생 백리향 꽃이 피고,
앵초 꽃과 고개 숙인 제비꽃도 자라고,
어여쁜 사향 장미, 들장미와 함께,
향기로운 인동덩굴이 지붕처럼 우거져 있지.
거기에서 티타니아가 가끔 밤에 잠을 자기도 해.
춤과 기쁨에 취해 그 꽃들 속에서 잠드는 거지.
그리고 거기에 뱀이 번들거리는 허물을 벗어놓는데,
그 품이 꼬마 요정 하나가 넉넉히 깃들 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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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에서 요정 왕 오베론이 하는 대사.
그 대사 속 풍경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요정의 여왕 티타니아가 잠드는 아름다운 세상.
어느 순간 나는 증발해 버리고 요정들의 세계만 오롯이 남는다.
‘만일 천국이 있다면 저토록 아름답기를...’
소중한 이들이 머무는 곳이 그저 아름답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간절한 소망.
그 소망을 떠올리는 내 마음은 다소 복잡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지만 마음 한편이 서글퍼진다. 그러나 그 마음은 이내 소중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다시금 미소를 짓게 만든다.
슬픔과 기쁨이 교차되더니 이내 뒤섞여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순간,
순간의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래. 인생이란 단순히 희와 비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희비가 뒤섞인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삶이지.
극한의 슬픔도, 극한의 웃음 뒤에도 눈물이 맺히는 건 결국 그 뿌리가 하나라는 의미였다.
전혀 다른 두 가지 맛.
그러나 끝내 하나로 귀결된다.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의 인생.
‘그래, 이거지...’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희비(喜悲)라는 이분법적인 기준을 넘어서 보다 우리의 삶에 가까운 이야기가 내 안에서 솟구치기 시작한다.
지이잉.
그리고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정영만 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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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즈 출판사 회장실.
정 회장은 직접 권서준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하는 중이었다.
“그래, 긴히 할 말이 있는데, 혹시 오늘 시간 좀 괜찮나?”
-지금은 가족들하고 나들이를 와서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 드라이브라도 간 건가?”
-네, 모처럼 시간이 돼서 차를 렌트해서 밖에 좀 나왔거든요.
“그렇군. 그럼 혹시 언제가 괜찮을까?”
-아마 서울에 들어가면 저녁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다마다.
아쉬운 건 정 회장 쪽이었다.
“물론이지. 그럼 이따 보자고.”
통화를 끊은 정 회장이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쉬는 날에 가족들하고 보내다니 기특하네. 저 나이 때는 가족 생각하기 쉽지 않은데 말이야.”
사실 가족만큼 소중한 것도 없었다.
잃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사무치는 소중함이었다.
그러나 이내 정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잘 됐어. 어쩌면 내 선물이 도움이 되겠군.”
***
나는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아들 덕에 오늘 너무 좋았어. 고마워. 호강도 시켜주고.”
엄마는 고작 하루의 드라이브를 호강이라 말했다.
그동안 해준 게 얼마인데 이 정도로 고마워하면 안 되지. 그러기엔 아직 누려야 할 게 너무 많이 남아있다고.
물론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때가 돼서 그저 엄마가 마음껏 누리게 해주면 될 테니까.
“엄마, 드라이브 종종 가자. 나도 바람 쐬니까 머리도 상쾌해지고 좋네.”
엄마가 내 손등을 두드리며 미소를 짓는다. 그래, 다른 게 행복인가, 이런 게 행복이지.
어느새 8시.
나는 서둘러 공유 차를 반납하고 급히 약속 장소로 향했다.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고급 SUV 한 대가 내 앞에 멈춘다.
누군가 싶어 보니 뒷좌석에 탄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정 회장이었다.
“서준아, 어서 타.”
정 회장은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나를 차에 태웠다.
“그래, 나들이는 잘 다녀왔고?”
정 회장이 친근하게 물었다.
“네, 지난번 정 회장님이 사주셨던 백숙집에 다녀왔습니다.”
“아, 맞아. 그때 어머니 모시고 오고 싶다고 했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용건을 꺼낸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 보여준 네 작품 말이야. 우리 출판사에서 계약하고 싶어서 내가 이렇게 찾아왔다.”
정 회장은 기사에게 전달받은 계약서를 직접 내밀었다.
“섭섭지 않게 적었는데, 어때?”
정 회장의 말 대로였다.
일반 순문학 작품보다 무려 5% 높은 정산비율, 게다가 선인세로만 억 단위가 넘었다.
내 작품을 잡고 싶다는 의지가 보이는 제스쳐였다.
“20페이지 보시고 투자하시기에는 너무 과한 투자가 아닐까요?”
“용의 발톱을 보고도 용인지 모르면 까막눈 아닐까? 그런 사람이라면 사업을 하면 안 되지.”
정 회장은 내 작품의 가치를 용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역시 작품을 보는 눈은 무시 못 할 위인이었다.
업계 최고 대우.
게다가 정 회장이 직접 찾아온 건 향후 작품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는 의미와 다를 바가 없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지.’
자연스럽게 사인이 이어진다.
간인까지 끝나고 계약서를 주고받자 정 회장이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다.
“이번 작품, 기대가 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정 회장이 부드럽게 내 어깨를 두드린다.
노장의 자상한 눈빛에 담겨있는 건 후배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이었다.
“참, 계약을 기념해서 내가 선물도 하나 가져왔는데, 어때 마음에 드나?”
“선물이요?”
“그래. 너무 커서 안 보이나?”
뒷좌석을 아무리 봐도 보이는 건 없었다.
그러자 정 회장이 웃으며 입을 연다.
“지금 타고 있지 않은가?”
그제야 내 눈에 차 내부가 보인다.
그것도 유명 해외 브랜드가 만든 고급 SUV의 내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