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fairyland - 요정 나라 (2)
68.
***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은 비극과 희극을 이렇게 구분했다.
[죽음으로 끝나면 비극이고, 결혼으로 끝나면 희극이다.]
그렇게 따지면 내 인생은 비극이었다.
그것도 감동 하나 없는 지독한 비극.
덕분에 그 시절 나는 오랫동안 불면증을 앓았다.
나의 불면증은 내가 쓴 작품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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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찌든 수많은 나의 신민들은
이 시간 잠들어 있다! 오 잠이여, 조용한 잠이여,
자연의 부드러운 유모여, 내 그대를 얼마나 놀라게 하였기에,
내 눈꺼풀을 더는 감기게 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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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4세의 불면증은 병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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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리가 외치는 것 같았어, ‘더는 잠들지 말라, 맥베스는 잠을 살해했다’, 그 죄 없는 잠을.
근심의 해진 옷소매를 다시 짜주는 잠을,
나날의 삶의 죽음, 쓰라린 노동의 목욕,
상처 입은 마음의 향유, 위대한 자연의 두 번째 코스,
삶이란 축제의 중요한 자양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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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의 불면증은 죄의식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불면증은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둘 다였었지.’
처음엔 성공을 위한 부담감에 잠 못 이룰 때가 많았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끼니조차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서 밤마다 질병처럼 찾아오는 불면증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성공을 했음에도 나의 불면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번엔 붙잡고 있던 성공이 언제 날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움켜쥔 성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매일같이 작품을 써 내려가야 했다.
하루하루가 전쟁과도 같은 그 시절.
그러나 모든 것을 움켜쥐려 했던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끝내 내 아들의 죽음조차도 지켜주지 못했다.
오 하느님! 내 아이, 내 아서, 어여쁜 내 아들!
나의 생명, 나의 기쁨, 나의 양식, 나의 온 세상!
이 과부의 위로, 내 슬픔의 치료 약!
작품 「존 왕」 속의 대사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나의 외침이었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아픔.
내가 이번 작품을 써야만 하는 이유였다.
주제는 이미 정해진 상태.
내가 전생에 잃어버린, 그러나 현생에선 놓치고 싶지 않은 그 소중한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나 자신과 소중한 이를 잃은 수많은 사람을 위하여...’
차창밖에 펼쳐진 한강의 모습이 처연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
늦은 밤.
정 회장은 툇마루에 앉아 스무 장 남짓한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
쭉 훑어보는데 채 20분도 걸리지 않는 짧은 분량. 그러나 정 회장은 그 원고를 벌써 수십 번째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희극과 비극.
그 어느 장르도 아닌, 잔인하리만큼 심장을 저미는 아픈 이야기가 달려든다.
제목도,
주인공의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그저,
소중한 자식을 잃은 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은 자식의 후회가 먹먹하게 담긴 이야기.
“하아...”
정 회장은 권서준이 남기고 간 원고를 들여다보면서 탄식을 쏟아낸다.
옆에 있던 송영도 교수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정녕 서른도 안 된 친구의 글이란 말인가?”
정 회장의 감탄에 송 교수도 공감한다.
“이건 마치 슬픔과 아픔, 그리고 후회가 사라지기 전에 어떻게든 세상에 남기기 위해 악착같이 써 내려간 느낌이네요. 그래서 더 그 울림이 더 절절한 하게 와닿고요...”
소설로 따지면 서두에 해당되는 분량. 그러나 그 흡입력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18세기 고딕 소설의 선구자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이 이런 말을 했지.”
The whole world is a comedy to those that think, a tragedy to those who feel.
“‘세상은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비극’이다. 난 이보다 더 절묘하게 비극과 희극에 대해 정의 내린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네. 그런데 이 작품은...”
분명 비극이었다.
그러나 읽어갈수록 고요한 위로가 차오른다. 그리고 느낄수록 뜨끈한 기운이 올라온다.
가슴은 시큰거리는데, 묘한 안정감과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되는 신기한 이야기.
“다음 장이 없다는 게 이렇게 아쉬운 적이 없었는데...”
이야기에 대한 갈증이 차오른다.
뒤에 이어질 내용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단언할 수 있었다.
‘이건, 전작보다 훨씬 더 의미가 깊다...’
고작 20페이지를 보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을 만큼은 충분했다.
‘기대가 되는 군.’
정 회장은 주저 없이 휴대폰을 들었다.
“그래, 나야. 원고 하나 보내줄 테니 빨리 확인 좀 해봐.”
나이 든 거장의 염원.
그것은 권서준의 작품이 세상에 널리 퍼져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
다음 날.
나는 영감을 다듬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싱그러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산을 올랐고, 때론 해가 어스름해지는 시간에 한강 변을 거닐며 머릿속으로 작품을 다듬었다.
뜨겁게 달궈진 이야기를 차분하게 두드려 가장 어울리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수십 차례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마치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의 노고처럼, 그렇게 내 머릿속에선 또 하나의 글감이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나는 타이거 스튜디오 본사를 찾았다.
검수를 마친 24부작 대본을 정은미 피디에게 넘기기 위함이었다.
“헐, 벌써 다 쓰신 거예요?”
“네, 누나가 자료 조사를 도와준 덕에 집필이 빨리 끝났어요. 지난번 보여주신 초반 편집본 영상 때문에 캐릭터 잡기도 수월했고요.”
“그래도 이 속도는... 기성 작가보다 훨씬 빠른데요?”
집필 속도에 혀를 내두르던 정 피디는 그 자리에 앉아서 추가 대본을 확인했다.
“아... 이옥과 연화는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하아.”
정 피디는 아쉬운 탄식과 함께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는다.
미간을 모았다가, 입을 틀어막았다가, 다시 흐뭇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그야말로 영화 한 편 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정 피디가 대본을 읽는 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고층 빌딩에서 내려다보는 도심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좋군.’
탁 트인 시야를 만끽하며 나는 조금 전 정 피디의 표정을 떠올렸다.
대본을 읽던 정 피디는 내가 만든 상상 속 세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고작 글이었지만 정 피디의 한껏 상기된 표정은 마치 천국을 맛본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래.
그게 바로 글이 가지는 매력이었다.
이 세상에서 영상보다 멋진 이미지를 선사할 수 있는 게 바로 글이었으니까.
‘바로 독자의 상상력 덕분이지.’
글은 그러한 독자의 상상력을 가장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장르였다.
그 어느 감독과 연출가도 독자의 상상력을 뛰어넘을 순 없었다.
‘작가의 상상력보다 더 뛰어나고 멋진 세계를 상상하는 게 바로 독자들이니까.’
나 역시 그랬다.
그 옛날 라틴어로 된 고전 문학을 읽으며 놀라운 세상을 떠올렸다.
유럽을 중심으로 각종 신화 속 인물과 영웅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멋진 세상과 이야기들. 나는 세상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게 내 꿈이었으니까.’
지금도 내가 글을 쓰는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내가 창조한 세상을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울고, 웃고, 행복하고, 사색에 잠기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 그것이 평생토록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성공한 작가가 아니라, 작가 그 자체로의 삶이니까.’
가슴 뻐근할 정도로 행복감이 밀려온다.
자연스럽게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솟구친다.
그 이야기는 또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게 될까.
벌써부터 손끝이 간지러워진다.
***
두 시간쯤 지났을까.
모든 대본을 확인한 정 피디가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와... 역시 작가님 대본은 뭔가 다른 게 있다니까요?”
정 피디는 대본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디테일과 이 극적인 갈등 구조... 어떻게 칼 한 자루 나오지 않는 사극에서 이런 긴장감을 연출할 수 있는 거죠?”
질문이 아니라 감탄사였다.
나 역시 그 마음을 알기에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엔딩까지... 정말, 감탄 밖에 안 나오네요.”
감격에 젖어있던 정 피디의 눈빛이 이내 단단해진다.
“이 느낌, 제대로 담아볼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 지난번에 보여주신 1, 2화도 엄청났고요. 작가와 피디가 같은 그림을 그리니까 퀄리티도 걱정할 게 없던데요?”
“저야 뭐 작가님이 써주시는 걸 최대한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을 뿐이죠.”
정 피디는 지금 자신의 역량 이상의 일을 해주고 있었다. 특히 드라마 흥행을 위해 가장 중요한 초반부의 연출은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울 정도였다.
‘첫 사극인데 이 정도의 성장을 하다니 역시 내 눈은 정확해.’
이제부터의 진행은 정 피디에게 전적으로 맡겨놔도 좋을 정도였다. 물론 예상치 못한 사건만 없다면 말이었다.
“현재 촬영은 어느 정도까지 진행된 건가요?”
“아, 11화 분량을 촬영 중이에요. 아마 오늘, 내일이면 12화까진 충분히 가능하고요.”
“생각보다 빠르네요?”
사전 제작 작품이라는 걸 고려해도 벌써 절반 가까이 찍었다는 건 매우 이례적이었다.
“대본이 좋잖아요. 작가님 대본을 보면 장면이 머릿속에 촥 펼쳐진다니까요? 배우들도 마찬가지고요. 무엇보다 캐릭터가 확실하니까 NG도 거의 없이 진행되거든요.”
좋은 소식의 연속이었다.
“혹시 대본 수정할 일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이 대본이라면 수정할 일은 없을 거 같은데요?”
정 피디가 웃으며 말한다.
그러나 내 의도와는 조금 다른 대답이었다.
“혹시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일 생길 수 있잖아요.”
“아...”
그제야 이해한 정 피디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연락드릴 일이 없는 게 가장 좋긴 하겠네요.”
정 피디가 피식 웃는다.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었다.
웃으며 대본을 챙기던 정 피디가 뭔가 떠오른 듯 잠시 멈칫거린다.
“참, 다음 주쯤에 원준 씨가 간단하게 회식하자고 하던데요? 첫 방영 날짜도 얼마 안 남았고, 중간에 사기진작 차원에서 본인이 쏜다고 하더라고요.”
좋은 제안이었다.
일이 고되다 보니 팀워크를 위해 이런 회식은 필요했다.
“근데 원준 씨가 무조건 작가님은 모시고 와야 한다네요. 그래야 자기 카드를 꺼내겠다고...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아니, 꼭 와주시면 안 될까요?”
간절한 정 피디의 표정을 보니 얼마나 닦달했는지 대번 알 수 있었다.
강원준도 샤프한 생김새와 달리 꽤나 재밌는 사람이었다.
“알겠습니다.”
“정말 괜찮으세요?”
“저도 한 팀인데 당연하죠.”
내 대답에 정 피디의 얼굴이 환해진다.
대본은 완성됐고, 배우와 제작진의 의지도 충만한 상황. 드라마 쪽은 이제 믿고 맡겨도 되는 상황이었다.
자연스럽게 다음 스텝으로 관심이 흐른다.
차기작에 대한 계획.
난 이미 이틀 전에 미끼를 던진 상태였다.
‘이제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됐지.’
나는 느긋한 강태공이 되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
와이즈 출판사 마케팅팀.
주상진 편집장은 급히 전화를 받았다.
“네, 네. 권 작가님 원고라고요? 네, 알겠습니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잔뜩 긴장하게 만든 상대는 다름 아닌 정 회장이었다. 회장이 직접 내리는 지시, 주 편집장 입장에선 긴장하는 게 당연했다.
잠시 뒤,
정 회장의 비서가 보낸 메일이 도착한다.
서둘러 프린트 버튼을 누른다.
모니터로 확인해도 되지만 손에 들고 읽어 내려가는 게 주 편집장의 오랜 습관이었다.
‘이렇게 읽는 게 좀 더 책을 읽는 맛이 난다니까.’
위잉위잉.
프린터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몇 초 되지 않아 기계가 멈춘다.
‘응?’
처음엔 고장이 났나 싶었는데 원고 자체가 짧았다.
고작해야 20장 남짓한 분량.
‘시놉시스도 아니고 이게 뭐지?’
주 편집장은 의아한 듯 원고를 집어 들었다.
탁탁.
가지런히 원고를 정리한 뒤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이, 이건...”
첫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자장가를 떠올리는 듯한 아버지의 독백.
그 안에 담겨있는 진한 애환이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해진다.
대작에서만 느낄 수 있다는 첫 문장의 힘이 이 작품 속에서 느껴진다.
그래.
고작 20장 남짓한 원고였다.
그러나 극도로 절제된 어휘와 슬픔이 어느 순간 한 아버지의 이야기로 사람을 끌어당긴다.
잠시 뒤.
원고를 읽은 주 편집장의 마음속엔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이건... 전작보다 더 터진다.’
10년 넘는 경력을 가진 편집장의 촉이었다.
아니, 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