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67화 (67/203)

# 67. fairyland - 요정 나라 (1)

67.

***

문득 떠오르는 전생의 기억.

나는 고향 스트랫퍼드를 떠난 뒤 좀처럼 집에 들르는 법이 없었다.

힘든 시기엔 성공을 위해서,

성공을 이루고 난 뒤엔 다음 성공에 대한 압박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1596년 그해엔 고향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뜻하지 않은 비보 때문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까지 생생하기만 했다.

낯선 이에게서 전해 들은 아들의 죽음.

그 서늘하면서 소름 끼치는 기분은 내 생애 겪어본 적이 없었다.

모든 일을 뒤로 한 채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

푸른 들판을 보면 두 팔을 벌린 채 나를 향해 다가오는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늘을 보면 까르르 웃음꽃을 피우며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미소를 영영 볼 수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었다.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나의 아들.

내가 마지막으로 안아줬을 때가 아마 재민이 정도 되었을까.

‘햄넷(Hammnet)...’

몇 번 불러보지 못한 아들의 이름이 입안에서 구른다.

상처와 아픔으로 가득한 세상.

그래,

비극이었다.

내 삶은 내가 쓴 수많은 작품처럼 희망 없는 비극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비참한 기억 속에서 오히려 아들을 향한 사랑과 가족의 소중한 가치가 선명해진다.

후회로 점철된 전생의 과오를 떠올리며 다시는 그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의지가 불타오른다.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를 위해서,

아니 소중한 사람을 잃은 모든 자들을 위해서,

반드시 존재해야 할 이야기.

어둡고 힘든 세상.

그 속에서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 비극적이면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는 애써 그 아픔을 억누른 채 펜을 꺼내 든다.

사각사각 사각.

나무 아래 앉은 나는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픔조차 글감으로 삶는 작가의 삶.

그 천형(天刑) 같은 굴레가 괴롭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펜을 쥔 손에 힘을 준다.

내 손은 그저 떠오르는 영감을 받아 적느라 쉴 틈이 없었다. 손목이 뻐근하고, 펜을 쥔 손아귀가 저릴 정도였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편지 형식을 띤 짧은 글 한 편을 완성했다.

내가 창조해낸 또 하나의 이야기.

그 장대한 시작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리라.

***

한옥 안채.

개량한복으로 갈아입던 정 회장이 의자에 앉은 채 잠시 생각에 잠긴다.

조금 전 권서준과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다 하고. 내가 늙긴 한 모양이군.’

정 회장의 입에서 탄식이 흐른다.

좀처럼 자기 얘기를 하는 법이 없는데 자신도 모르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마저 꺼내고 말았다.

‘참 신기한 녀석이야.’

권서준.

나이는 이제 20대 후반인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말이 통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내 연배의 사람을 만난 기분이랄까.’

말도 안 되는 줄 알지만 매번 만날 때마다 깊이 있는 대화에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검은 눈동자, 상대방의 아픔조차 이해한다는 듯 여유로운 눈빛과 표정.

그 앞에 서면 마치 오랜 친구에게 얘기를 꺼내듯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어버린다.

정 회장은 고개를 돌려 선반에 놓인 액자를 바라본다.

손자를 안고 있는 아들 내외의 모습.

더없이 행복한 세 사람의 미소가 정 회장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속 한 번 썩인 적 없는 아들이었다.

대학에서 만난 여자를 만나 행복한 가족을 꾸리고, 손이 귀한 집에 떡두꺼비 같은 손자까지 안겨준 아들이었다.

이보다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행복했던 시절...

그러나 신은 야속하게도 그 행복을 너무나 빨리 앗아갔다. 그것도 너무 완벽하게 망가트리고 말았다.

“하아...”

정 회장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쉰다.

아들 내외가 떠난 지 햇수로 십 년.

강산도 바뀐다는 세월이 지났지만 정 회장은 여전히 그때 그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날 것처럼 되살아나는 아픔.

마치 제우스에게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처럼, 날마다 재생되는 고통은 오늘도 그의 마음을 헤집고 있었다.

“송 교수님 도착하셨습니다.”

그때,

문밖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 회장은 묵은 아픔을 애써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

“후...”

나는 수첩에 적힌 글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고개를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사위가 어두웠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흐른 거지?’

나는 뜨끈하게 솟구쳤던 영감을 애써 삭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원에 설치되어있는 조명에 비추어 보니 어느새 수첩엔 스무 페이지가 넘는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이를테면 이건 씨앗과 같았다.

장대하게 뻗어 나갈 커다란 이야기의 시작이 바로 이 스무 페이지였다.

“한참 찾았더니 여기 있었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니 다가오고 있는 송 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나를 본 송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전 잘 지냈습니다. 선생님도 잘 지내셨죠?”

간단한 인사와 함께 우리는 정원을 거닐었다.

“의외야. 회장님께선 좀처럼 외부인을 집까지 초대하시는 경우가 드물거든. 아마 너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남다르신가 봐.”

좀처럼 개인사에 대해 말하는 법이 없는 정 회장의 평소 성정을 알기에 이번 초대가 어떤 의미인지는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식사 초대.

이전에도 몇 번 만나본 터라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연락이 온 시점에 대해선 조금 생각이 필요했다.

송영도 교수에게 듣기로 정 회장은 최근에야 영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했다.

출판 박람회가 끝나고 난 뒤에도 더 긴 시간을 머무른 것.

자연스럽게 정 회장의 의도가 읽힌다.

‘영국 쪽 출판사랑 얘기를 나눈 모양이야.’

송 교수의 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때도 팔 걷어붙이고 나선 정 회장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추측이 가능했다.

“참,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작품이 영국 쪽에서 관심을 보인다는 소식이 있어.”

송 교수의 말은 내 추측과 정확히 일치했다.

‘아마 내 작품의 번역을 요청하겠지.’

해외 진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을 위한 정 회장의 계획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다.

마치 짜놓은 퍼즐처럼 척척 일이 진행되는 상황.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저, 선생님. 혹시 이곳에 프린트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

송 교수가 합류하고 일행은 너른 툇마루에 자리를 잡았다. 정갈한 한식과 함께 반주가 곁들여진다.

“오늘 술맛이 유독 좋아. 역시 술은 누구와 함께 마시는지가 중요하다니까.”

정 회장은 모처럼 기분 좋게 약주를 즐기며 웃음꽃을 피워냈다.

술자리가 익어가고 수많은 대화들이 오갔다. 그러나 권서준의 모습은 좀처럼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정 회장은 그 무게감 있는 모습조차 흡족했다.

‘보통 놈이 아니라니까.’

미소를 짓던 정 회장이 넌지시 입을 연다.

“서준아, 혹시 비극의 어원을 알고 있니?”

그러자 잔을 받고 있던 권서준은 태연하게 답을 한다.

“비극이라는 말은 기원전 500년쯤 고대 그리스에서 탄생했습니다. 원래 디오니소스 신을 찬양하기 위해 사제가 숫염소를 바치며 부른 합창을 ‘트라고디아’라고 했는데, 이 말이 바로 영어 ‘tragedy’의 어원이 되었죠.”

지켜보던 정 회장이 놀란 듯 혀를 내둘렀다. 답하라고 물은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역시 넌 모르는 게 없구나. 맞아. 처음이야 단순한 합창이었지만 배우가 추가되면서 점차 연극처럼 바뀌게 되었지.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비극이 된 거고.”

여러모로 문학적 소양의 깊이가 느껴지는 권서준이었다. 정 회장의 기대가 나날이 커지는 것도 그 알 수 없는 깊이 때문이었다.

잠시 뒤,

술 한 잔을 따르며 정 회장이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고대 그리스인들은 매일같이 비극적인 연극을 보고 듣고 자기 전에 읽었다는 거야. 왜냐? 그들에게 비극은 단지 슬픈 연극이 아니거든. 주인공과 하나가 되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한계에 부딪혀 실수하고 무너지는 대리 체험을 통해 마침내 찾아오는 카타르시스를 만끽하는 거지.”

“아, 그게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였군요?”

송 교수의 호응에 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네. 결국 비극은 오히려 우리에게 다시 한번 살아갈 힘을 주는 장르지. 그래서 나는 비극을 좋아한다네. 특히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그야말로 최고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지.”

잠시 말을 멈춘 정 회장이 권서준을 바라본다. 거장의 눈빛엔 어느새 열기가 차오른다.

“그런데 나는 이번 네 작품 속에서 그런 기운을 느꼈다. 그래서 피어슨 출판사와 다리를 놔 줄 생각인데, 네 생각은 어떠냐?”

정 회장의 질문.

그러나 권서준은 무슨 생각인지 쉬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 회장이 살짝 상체를 숙이며 다시 입을 연다.

“이미 우리 쪽에서 짧게 소개 글 정도는 번역해서 보냈지만, 전체 작품을 번역해서 보내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묻는 거야. 송 교수한테 들었는데, 번역에 소질이 있다고?”

듣고 있던 권서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번역은 자신 있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대답은 정 회장의 예상과 많이 달랐다.

“다만, 제 책은 번역할 생각이 없습니다.”

순간 정 회장의 얼굴이 굳어진다.

지켜보고 있던 송 교수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예상 못 한 반응에 정 회장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달리 심각해져 있었다.

“이번 작품은 한국의 정서, 한글의 묘사로 최적화된 작품입니다. 이걸 억지로 영문으로 번역할 수야 있겠지만 기껏해야 7, 80%도 전달되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저는 그런 미완의 감성을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쓴 게 아니니까요.”

설명을 들은 정 회장은 부인할 수 없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의도가 명확한 작품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대로 포기하기엔 너무나 아쉬운 작품이었다.

“그래, 서준이 네 뜻은 충분히 알겠다. 작품의 퀄리티를 신경 쓰는 건 당연히 작가의 책임이니까.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라 피어슨 출판사라고. 엄청난 기회가 될 수도 있는데...”

오히려 정 회장 쪽에서 아쉬움에 매달리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정 회장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권서준의 반응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고, 적당히 유명세를 탈 순 있겠지만 그게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아닙니다. 단순히 성공만을 위해서 글을 쓰는 건 아니니까요.”

“흠.”

정 회장의 얕은 한숨과 함께 짧은 침묵이 흐른다. 기대가 컸던 만큼 두 사람의 얼굴에 드리운 실망의 크기도 커 보였다.

그동안 경험한 녀석은 한 번 결심하면 돌이키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고 책임까지 지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웠다.

애써 그려온 그림이 망가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권서준이 뜻밖의 제안을 내민다.

“대신, 새롭게 써보고 싶은 작품이 하나 있긴 합니다.”

그 말인즉슨 차기작을 쓸 생각이라는 뜻이었다.

순간 정 회장의 눈이 커진다.

“그, 그게 뭐지?”

자신의 그림이 망가지고, 그 위에 새로운 도화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권서준은 태연히 원고를 내밀었다.

고작 스무 장 남짓한 원고 뭉치.

그러나 그 안에 담겨 있는 건 정 회장이 상상도 못 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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