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64화 (64/203)

# 64. belongings - 재산, 소유물 (2)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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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타이거 스튜디오 기획제작 7팀.

“우와, 저쪽도 만만치가 않네.”

본부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다.

“그러게요.”

진영민 CP의 표정도 밝지 않았다.

썬샤인 제작사의 기사 때문이었다.

[제작사 썬샤인, ‘검은 달’ 조한웅 캐스팅 확정 공식]

[조한웅, 신윤아와 퓨전 사극 ‘검은 달’에서 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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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표 제작사 썬샤인에서 선보이는 퓨전 사극 ‘검은 달’에 조한웅의 캐스팅을 확정 짓고 첫 촬영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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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작품에서 탁월한 연기 감각과 완벽한 캐릭터 소화력으로 사랑받아온 충무로 대표 배우 조한웅은 하루아침에 조정의 권력가들에게 딸을 납치당한 조선의 무인 ‘무명’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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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촬영을 앞둔 조한웅은 ‘강렬한 서사와 캐릭터에 매력을 느껴 출연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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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웅.

남자다운 외모와 섬세한 연기로 남녀노소에게 인기가 있는 배우였다.

최근엔 스릴러 장르물에 출연해 종편임에도 불구하고 시청률 15%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대다수의 반응은 같았다.

-조한웅이 멱살 캐리했다.

-장르물에 원톱 배우가 필요한 이유.

-조한웅이 국내 최고 출연료를 받는 이유를 스스로 증명했다.

사극에선 확실히 강원준의 골수팬이 많지만 넓은 팬층을 가지고 있는 조한웅의 인기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방영 일도 우리랑 같은 거지?”

“네, 요일, 날짜, 시간, 방영횟수까지 똑같아요.”

“흠...”

본부장이 턱을 쓸어내린다.

이미 TCN과 방영 일정이 정해진 이상 달라질 일은 없었다. 앞에 들어간 드라마가 방영 중지 수준으로 나가떨어지지 않는 이상 정면 승부는 피할 수 없었다.

“하아, 어떻게 또 썬샤인과 맞붙게 되냐?”

하 본부장이 한숨과 함께 슬쩍 진영민 CP의 눈치를 살핀다. 그러자 그 시선을 의식한 진영민이 재빨리 미간을 찌푸린다.

“왜 그렇게 보세요?”

“어? 아, 아니야.”

“설마 또 질 거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무슨 섭섭한 소리를, 나야 널 믿지...”

그러나 길게 늘어지는 말꼬리가 본부장의 걱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이미 상반기 두 번의 승부에서 철저하게 밀린 탓이었다.

첫 번째 로맨스 판타지 드라마 「취향 존중」 연애는 평균 시청률 3%, 두 번째 의학 드라마 「닥터 송」은 시청률 5%를 간신히 찍었다.

특히 흥행 불패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시청률이 후한 의학 드라마의 참패는 진영민 CP에게 여러모로 타격을 주었다.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윗분들의 신뢰를 잃은 게 가장 컸지.’

덕분에 믿고 보는 진영민이라는 별명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

그래서 이번 작품에선 제대로 보여줘야 했다.

하 본부장이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다 끌어온 무려 100억짜리 사극.

그 중요한 시기에 공교롭게도 다시 맞붙게 된 썬샤인 제작사.

두 번의 승부에서 스코어는 2:0이었다.

3번째 승부를 앞둔 진영민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

‘진영민 CP한테 그런 일이 있었군.’

정은미 피디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흥미를 느꼈다.

왜 그토록 악착같이 이번 작품에 목을 매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하긴, 복수야말로 인간의 가장 솔직한 욕망 중 하나니까.’

내가 쓴 희곡의 주인공들이 갖는 가장 보편적인 정서도 바로 복수였다. 관객의 감정 동화를 가장 쉽게 이끌어 낼 수 있는 문학적 장치이기도 했고.

다만 내 상대는 썬샤인이 아니었다.

‘오직 나 자신일 뿐.’

나는 그저 내가 쓰고 싶은 걸 쓰면서 전생에 못 다 이룬 꿈을 이뤄 나아갈 뿐이었다.

물론 그 길을 방해하는 건 뭐가 됐든 밟고 지나갈 생각이었지만.

지금도 나는 오직 내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세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타닥타닥.

흰 여백에 검은 활자가 채워질수록 새로운 세상은 보다 선명해진다. 생기를 얻은 인물들은 각자의 목표를 찾아 고군분투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언젠가 현존했던 이옥의 삶.

그러나 내 손 아래에서 또 다른 이옥의 삶이 창조되고 있었다.

이야기가 완성될수록 짜릿한 쾌감이 온몸을 뒤덮는다.

그래,

이런 게 행복이지.

다만 드라마는 소설과는 달리 창작을 위한 제작 과정을 누군가에게 반드시 맡겨야만 했다.

제작자, 감독, 그리고 배우.

어느 한 축이라도 무너지면 졸작이 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드라마였다.

특히 배우의 역할이 지대했다. 대사 한 줄 한 줄이 아무리 주옥같아도 배우가 생각 없이 그대로 내뱉는다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

사람에 따라, 목소리에 따라, 제대로 된 해석이 나오지 않으면 내가 쓴 대사는 생명을 잃은 활자가 되어 연기처럼 사라질 뿐이니까.

모두가 힘을 합쳐 하나의 작품을 함께 완성해 나가는 과정. 드라마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만족감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강원준과 신하율을 떠올렸다.

‘어떤 연기를 보여줄까...’

대본은 내가 썼지만, 그 대본을 바탕으로 펼쳐질 미지의 영역이 내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찾은 타이거 스튜디오 사무실에 한 명의 배우가 나를 찾아왔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내가 고개를 들자 새초롬한 표정을 한 신하율이 얼굴을 슬쩍 내민다.

“...작가님? 바쁘세요?”

“아니요.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아, 그게... 먼저 이것 좀 드시고 하실래요?”

양손에 들린 건 커피와 디저트였다.

“마침 커피 생각이 났는데, 들어오세요.”

“정말요?”

내 말에 신하율이 신이 나 안으로 들어온다.

“이게요, 요즘 연예인들 사이에선 핫한 디저트거든요. 연남동 맛집이라 새벽같이 가지 않으면 품절 돼서 맛도 못 보는 거예요.”

각종 과일이 예쁘게 올라간 타르트가 테이블 위에 놓인다. 나는 그중에 제일 색깔이 예쁜 딸기 타르트를 집어 한입 먹었다.

“오, 그래서 그런지 맛있네요. 잘 먹을게요.”

내 칭찬에 신하율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이것도, 이것도 한번 드셔보세요.”

신이 난 신하율이 계속해서 먹을 것을 권한다.

나는 문득 시간을 확인했다. 야간 촬영을 마치자마자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것도 매니저 없이 이 시간에 사무실까지 찾은 거 보니 자연스럽게 신하율의 생각이 읽힌다.

“뇌물이 훌륭하네요.”

“...네?”

“한 시간 스케줄 빼기도 힘든 사람이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건 용건이 있는 거잖아요.”

“하아, 역시 작가님은 못 속이겠네요.”

신하율은 배시시 웃으며 들고 온 대본을 내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분에선 연화가 감정을 터트리기보다는 표정을 갈무리하는 게 맞는 거 같은데, 확신이 안 서서요.”

이옥이 팔도 유람을 위해 떠나려 할 때 차마 붙잡지 못하는 연화의 모습이 담긴 장면이었다.

사랑하지만 표현할 수 없고, 걱정이 되나 붙잡을 수 없는 연화의 복잡한 심리가 담겨있는 씬이었다.

연화의 감정선이 짙어지는 씬으로 향후 캐릭터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그리고 신하율의 해석은 정확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본 이해력이 뛰어나네요. 그렇게 하시면 될 거 같아요.”

“아, 정말요?”

가벼운 칭찬에도 신하율의 볼이 붉어진다.

예쁘다는 말보다 연기력이 좋다는 칭찬에 약한 여자. 그게 바로 신하율이었다.

‘믿고 맡길 만해.’

이옥, 정조에 비해 비중이 큰 건 아니지만 애잔한 분위기를 위해 중요한 역할이었다.

“참, 그리고 용건이 한 가지 더 있어요.”

신하율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게 내밀었다. 제목이 익숙한 책, 바로 내 책이었다.

“작가님께 직접 사인 받고 싶어서요. 일시 품절돼서 이제야 겨우 구했거든요.”

애초에 순문학 수상작은 인쇄 부수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보다 빠르게 품절돼서 수요를 맞추지 못한 모양이었다.

“연예인인 하율 씨한테 사인 부탁을 받으니까 기분이 좀 묘하네요.”

신하율이 피식 웃으며 친히 책장을 펼친다.

“어색해도 이제 익숙해지셔야 해요. 아마 이번 드라마 대박 나면 여기저기서 사인 요청이 쏟아질걸요?”

작가로서 더없이 듣기 좋은 칭찬.

그러나 한편으로는 문득 궁금해진다.

“하율 씨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내 질문에 신하율은 오히려 당당하게 대답한다.

“그거야 직접 경험해 봤으니까요. 작가님 작품은 뭔가 특별한 게 있어요.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뭔가를 건드리는 힘이 있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연기에 푹 빠지게 만들어요. 어느 순간 그게 연기인지도 모를 정도로...”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녹여낸 캐릭터.

이야기를 위해 필요한 역할이 아닌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걸 알아차리다니, 역시 신하율은 단순히 연기만 잘하는 배우는 아니었다.

내가 왜 이 친구에게서 리처드 버비지의 아우라를 느꼈는지 시간이 갈수록 이해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번 작품에 대한 기대감도 올라간다.

사각사각.

나는 미소와 함께 만년필로 사인을 했다.

“여기 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작가님.”

사인을 해줬는데도 신하율은 미적거린다.

아직 할 말이 남았나 싶어 쳐다보니 그제야 마지막 용건을 꺼낸다.

“근데, 이제 말씀 편하게 해주시면 안 돼요?”

“제가 혹시 불편하게 말했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작가님하고 알고 지낸 지도 1년이 넘었는데 너무 깍듯하게 대하시니까 저도 편히 여쭤보기 어렵고... 그래서...요.”

눈도 못 마주친 채 말끝을 흐리는 게 꽤나 고심 끝에 꺼낸 말 같았다.

하긴, 적당한 선도 중요하지만 보다 세심한 피드백을 위해선 편한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나 역시 보다 직설적으로 코멘트를 줄 수도 있고.

“그래. 그렇게 하자.”

신하율의 얼굴이 순간 밝아진다.

***

점심 무렵.

송영도 교수는 와이즈 출판사를 찾았다.

며칠 전 귀국한 정영만 회장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어서 오게, 잘 지냈지?”

정 회장이 환한 미소와 함께 송 교수를 맞이한다.

“저야 무탈하게 지냈습니다. 근데, 표정을 보니 좋은 일이 있으신가 보네요.”

송 교수의 물음에 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있다마다. 그 얘긴 좀 있다 하고. 그래, 그 친구는 잘 지내고 있나?”

이름도, 성도 없었지만 누구인지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 회장이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희곡도 잘 되고 있고, 정통 사극도 얼마 전에 촬영 들어갔는데 분위기가 좋다고 하네요.”

송 교수의 대답에 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아, 안 되길 바라는 건 아닌데 다른 분야에서도 너무 잘 나가니 은근 서운한데?”

악의 없는 농담.

권서준에게 순문학의 희망을 걸고 있는 정 회장의 마음을 알기에 이해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솔직히 송 교수도 같은 마음이었고.

“참,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송 교수가 용건을 묻자 정 회장이 잠시 시간을 확인한다.

“이제 올 때가 됐으니까 도착하면 함께 얘기하지.”

“누가 더 오십니까?”

“어, 박준태 선생 알지? 그 친구를 내가 좀 불렀거든.”

박준태라면 국내 최고의 번역가였다.

순간 의문이 생긴 송 교수가 묻는다.

“무슨 일 때문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슬쩍 주변을 살피던 정 회장이 목소리를 낮춘다.

“박 선생한테 서준이 책 번역을 좀 맡기려고 하네.”

“번역이요?”

“그래, 서준이 작품을 피어슨 편집장한테 연결해주기로 했거든.”

정 회장은 자신의 성과에 한껏 고양된 표정이었다.

“이번 출장에서 어필을 좀 했는데 그쪽에서 단단히 물었어.”

정 회장의 얼굴엔 벌써부터 설렘이 가득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송 교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이군요.”

“좋은 소식이다마다. 번역만 잘 나오면 계약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그러나 이어진 송 교수의 대답은 어딘가 뉘앙스가 이상했다.

“다만, 불필요한 일이 될 수도 있겠네요.”

순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정 회장의 송 교수를 바라본다. 기뻐해야 할 송 교수의 표정은 어딘가 미심쩍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번역하는 게 불필요하다는 말인가?”

송 교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번역은 필요하죠. 다만, 만일 번역 때문에 박준태 선생을 모셨다면 불필요한 걸음을 하실 거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정 회장은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눈을 껌뻑인다. 그러자 송 교수가 천천히 입을 연다.

“녀석은, 번역가가 필요 없거든요.”

단호할 정도로 확신에 찬 목소리.

송 교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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