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The game is afoot - 게임은 이미 시작됐다 (4)
61.
***
며칠 뒤.
강원준과의 계약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워낙 몸값이 비싼 톱스타인 데다가 JW 엔터테인먼트의 간판스타라 법무팀과 함께 소속사와의 계약 조항을 체크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제가 모든 걸 감당하겠습니다. 출연료도 20% 삭감할 거고요.’
결국 강원준 본인이 적극적으로 나선 끝에 캐스팅 논의가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정식 계약을 하기로 한 날.
타이거 스튜디오에 방문하는 겸 같이 식사하자는 강원준의 제안에 오전 작업을 일찍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내가 나오자마자 누나가 정리한 자료를 내민다.
“자, 이건 어젯밤에 말한 자료고, 그 전에 요청한 자료는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놨어.”
“벌써? 뭐야, LTE가 따로 없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참, 오후에 주연 배우들과 미팅 있는 거 알지? 2시니까 시간 잊지 말고. 아마 1시간 정도 걸리니까 12시 반쯤 출발하면 될 거 같아.”
누나는 서브 작가, 편집자 역할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내 스케줄까지 체크해줬다.
일단 시작하면 꼼꼼한 편이라 내 입장에선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작품에 집중하기도 좋았다.
‘역시 맡겨보길 잘했어.’
사람은 자고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 더 빛이 나는 법이었다. 이전에 비해 누나는 풍기는 기운부터 달라졌다. 자신감이 넘치고,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하며 표정도 밝아졌다.
‘얼굴도 몇 년은 더 어려 보이네.’
물론 서브 작가가 내가 계획하는 누나의 최종 목표는 아니었다.
편집 능력과 함께 작가의 케어 능력을 개발해 좀 더 큰 꿈을 그리고 있었다.
지금 같은 흐름이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 같은 미래 계획.
한발 한발 천천히 다가가는 중이었다.
“근데, 서준아.”
머릿속으로 한창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데 누나가 나를 부른다.
“왜?”
“혹시 오늘 미팅 때... 강원준 씨도 오나?”
“아마, 그렇겠지? 근데 그건 왜?”
“어? 아, 아니야.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누나가 손사래를 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딸깍.
문이 닫혔지만 누나의 말과 달리 신경이 쓰인다.
특히 조금 전 누나의 표정은 잊을 수가 없었다.
반짝이는 눈동자.
어색하게 웃는 눈.
의지와 상관없이 붉어진 볼까지.
평소 강원준의 광팬인 누나의 수줍은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으니까.
***
타이거 스튜디오 본사 17층 회의실.
깔끔하게 차려입은 강원준의 등장과 함께 미팅이 진행됐다.
이미 법무팀을 통해 몇 차례 계약서를 검토한 상황이라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이렇게 출연을 결심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진영민 CP가 먼저 덕담을 건넨다.
자연스럽게 강원준 쪽에서도 맞장구가 이어진다.
“그거야 본부장님께서 적극적으로 추천해주셨으니까 믿고 선택한 거죠. 우리 인연이 보통 인연은 아니잖아요?”
그러자 옆에 있던 본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이고, 이 여우 같은 친구야. 그것만 가지고 선택했다고? 누굴 핫바지로 아나. 솔직하게 말씀하시죠?”
본부장의 너스레에 강원준이 웃는다.
“역시 본부장님 눈은 못 속이네요. 솔직히 저도 이 바닥 10년 찬데 인맥만 가지고 작품을 고르겠어요.”
잠시 말을 멈춘 강원준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본이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안 봤다면 몰라도, 봤으면 안하고는 못 배길 대본이었으니까요.”
강원준의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이쯤 하면 나도 한마디 거들어야 했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하네요. 제가 올해는 운이 참 좋은 가 봐요. 이렇게 강원준 씨랑 같이 작품도 하게 되는 걸 보니.”
“작가님의 작품을 만난 제가 운이 좋은 거죠.”
강원준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민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작가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서로 맞잡은 손.
그 안에 담긴 건 묵직한 신뢰였다.
잠시 뒤,
강원준은 정식으로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다.
지켜보던 본부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고,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진영민 CP조차 들뜬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마무리되는 미팅 분위기.
나는 또 다른 사인을 위해 마지막 용건을 꺼냈다.
“강원준 씨, 부탁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작가님 부탁이면 뭐든지 들어드려야죠. 말씀만 하세요.”
“사인 한 장 좀 부탁드리려고요.”
“...네? 아, 제 사인이요?”
조금 의외라는 듯 나를 쳐다본다.
나는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네, 저희 누나가 강원준 씨 팬이라서요.”
내 말에 강원준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아, 정말요? 이거 영광이네요.”
호쾌한 웃음과 함께 사인을 내민다.
조금 민망한 부탁이긴 했지만 이걸 받고 좋아할 누나를 생각하니 뭐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
‘열심히 일한 직원에게 주는 일종의 보너스라고나 할까?’
깔끔한 종이에 적힌 강원준의 사인.
‘To. 권지연님께’라는 문구까지 깔끔했다.
***
강원준의 캐스팅.
그 엄청난 소식에 타이거 스튜디오 기획제작 7팀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본부장은 즉각 대표에게 전화로 계약 사실을 보고했다.
“으하하하. 네, 대표님. 우리가 강원준을 잡았습니다! 강원준이 「검은 달」을 까고 저희 작품을 선택했다니까요?”
계약서를 보며 본부장이 환하게 웃는다.
JW엔터테인먼트 사람들이 있을 땐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호쾌한 웃음소리였다.
“네, 당연히 자신 있죠. 믿고 맡겨주세요. 우리 애들 일 잘하는 거 아시잖아요? 네, 네. 알겠습니다.”
본부장이 통화를 끊자 지켜보던 진영민 CP의 얼굴에도 미소를 떠오른다.
“그렇게 좋으세요?”
“인마, 당연하지. 대본 잘 나왔지, 캐스팅까지 완벽하지. 이건 무조건 대박이라니까?”
환하게 웃던 본부장이 갑자기 나를 보더니 두 손을 덥석 잡는다.
“작가님, 정말 고생했어요. 작가님 대본 덕분에 월척을 낚았네요. 우리 팀에서 강원준을 잡다니... 내가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니까요?”
지켜보던 진영민도 고개를 끄덕인다.
“타이밍 좋게 대본이 나와서 캐스팅 작업을 일찍 마무리 지을 수 있었네요. 정말 고생하셨어요.”
“맞지, 맞아. 우리 권 작가님이 아주 큰일을 해주셨지. 역시 대본이 만병통치약이라니까? 하하하.”
이어지는 덕담들.
나도 응당 되돌려 주는 게 예의였다.
“모두 고생한 결과죠. 본부장님도 고생하셨잖아요. 차 팀장님한테 들어보니 그동안 매일같이 찾아가셨다면서요?”
내 칭찬에 본부장이 감동한 듯 탄식을 내뱉는다.
“아, 또 우리 작가님이 본부장의 노고를 알아주시니 감동이네요.”
사실 본부장도 강원준을 캐스팅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 상태였다.
JW엔터테인먼트 실무진들과 연이어 마신 술에 아직도 숙취가 남은 얼굴. 말은 또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목소리도 살짝 맛이 간 상태였다.
그런데도 얼굴에선 원하는 주연 배우를 캐스팅했다는 사실에 뿌듯함이 느껴진다.
“아무리 그래도 가장 큰 공로는 권 작가님이죠. 그 콧대 높은 강원준이 대본을 보자마자 헐레벌떡 만나자고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회의실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각자의 역할이 다 중요했지만 키포인트는 바로 내가 쓴 대본이었으니까.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2주 뒤.
배우들의 캐스팅까지 확정되고 내부적으로는 막바지 촬영 준비로 바쁜 상태였다.
홍보팀에선 작품에 대한 홍보 자료를 준비 중이었고, 제작팀에선 본격적으로 촬영팀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우들 역시 각자의 위치에서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파주에 위치한 승마장.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지만 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럇, 이랴!”
진지한 눈빛으로 박차를 가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원준이었다.
그런데 그때, 원형 레일을 신나게 달리던 그의 몸이 말에서 떨어진다.
“어? 괜찮으세요!”
“원준아! 괜찮아?”
요란한 충격음에 승마장 직원과 차연우 팀장이 놀라서 다가온다.
그러나 강원준은 손을 들어 괜찮다는 의사를 표현하고는 얼른 일어났다.
“하아, 하아, 괜찮아.”
숨이 턱까지 찼지만 강원준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좀 쉴까요?”
“그래, 좀 쉬면서 해. 이러다 너 죽겠다.”
그러나 강원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계속하죠. 아직 괜찮아요.”
이옥 배역에 캐스팅된 뒤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승마장을 찾았다. 극 중에서 말달리는 장면이 다수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야, 왜 고집을 부려. 그냥 대역 쓰거나, 살짝살짝 앉아 있는 것만 따도 된다니까?”
“싫다니까. 몇 번을 말해.”
강원준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을 타는 장면을 직접 찍고 싶었다.
아니, 이옥의 모든 삶을 대역이 아닌 자신이 하고 싶었다.
대본 연습, 연기 수업, 그리고 운동, 승마 연습까지. 하루가 24시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였다.
힘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숙소에 들어가면 기절한 듯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차오르는 짜릿함.
그것은 보람이었다.
‘내가 이렇게 연기에 진심이었던 적이 있었나?’
톱스타가 된 뒤로 늘 추락을 걱정했다.
인기와 출연료만 생각하며 그것이 자신의 가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모두 권 작가님 대본 덕분이지.’
권서준 작가에 의해 재조명된 천재 문인 이옥의 삶. 결말만 따지고 보면 이옥의 인생은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누구의 삶보다 아름다워...’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올곧게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간 한 선비의 기개가 자꾸만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그래, 나도 우직하게 내 길을 가는 거야. 더 늦기 전에 내가 꿈꿨던 연기를 한번 해보는 거라고.’
더 이상 실패 따윈 두렵지 않았다.
연기에 대한 회의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톱스타 이전에 배우니까.’
고삐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랴!”
힘 있는 외침과 함께 말이 달리기 시작한다. 엉덩이에 느껴지는 둔탁한 울림, 따각따각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 그리고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까지.
강원준은 모처럼 자유를 만끽하며 마음껏 열정을 불태웠다.
***
늦은 오후.
나는 촬영지 선정 문제로 타이거 스튜디오 회의실에서 정은미 피디와 만났다.
“여기가 뷰가 죽이더라고요. 이옥이 좌절하는 씬은 이 절벽 아래에서 찍으면 좋을 거 같아요. 어떠세요?”
사진과 동영상 자료.
씬 별로, 중요한 포인트 별로 세밀한 분류가 되어있는 촬영지 자료였다.
지도를 펼치는데 전국 유명 촬영지 중에 표시가 안 된 곳이 없었다.
“설마 직접 다 돌아다니신 거예요?”
“물론이죠. 직접 눈으로 보고, 카메라 테스트해 보고, 협조 요청 내용까지 확인했어요.”
쏙 들어간 뺨, 피곤한 안색이 얼마나 발품을 팔았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정 피디의 의견을 존중하며 내가 떠올린 이미지들에 가장 잘 부합하는 장소로 골라줬다.
“후, 이제 세팅은 거의 끝났네요.”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정 피디가 한숨을 돌린다.
“고생하셨어요.”
“고생은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참, 그 얘기 들으셨어요?”
“무슨 얘기요?”
“강원준 씨가 요즘 승마장에서 살고 있대요. 대역 안 쓰고 본인이 다 찍고 싶다고 해서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배우가 책임감을 느끼고 연기에 임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정 피디, 강원준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작품에 소속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대본은 걱정할 거 없고,
배우들의 의지도 장난 아니었다.
연출을 맡은 정 피디의 열정도 못지않았고.
‘이건 실패하려야 할 수가 없군.’
햄릿의 초고를 보고 느끼던 그때의 감정이 떠오른다. 모든 캐릭터가 살아 숨 쉬는 대본을 보며 내가 느낀 건 극도의 쾌감이었다.
‘오늘, 또 하나의 놀라운 이야기가 탄생했어. 그것도 내 손에 의해...’
작가에게 있어 가장 큰 행복.
내 손에 들린 대본을 바라보는 심정도 그때와 같았다.
명치부터 솟구치는 짜릿한 느낌.
그 어느 마약보다 중독성 강한 쾌감.
‘다시 태어나도 작가가 되길 잘했어.’
그리고 다음 날.
계절의 변화가 물씬 풍기는 봄의 끝자락.
드디어 정통사극 「이옥」의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