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The game is afoot - 게임은 이미 시작됐다 (3)
60.
***
사실 강원준이 가장 잘하면서도 싫어하는 장르가 바로 사극이었다. 그중에서도 정통사극을 특히 기피했다.
‘찍기는 어려운데 남는 건 별로 없으니까.’
배우에게는 그야말로 위험한 도박이었다.
퓨전 사극이야 가볍게 접근할 수 있지만 정통 사극의 경우엔 작품의 무게도 무겁고, 어렵고 낡은 느낌을 풍기기 일쑤였다.
‘묵직하면서, 동시에 트렌디한 느낌을 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지.’
마치 가벼우면서 묵직하게 연기해달라는 어느 감독의 개소리와 같았다. 그만큼 정통 사극 안에서 대중적 요소를 가미하는 건 어려웠다.
‘그런데... 분명 그런데... 왜 이 대본은 다르지?’
시작부터 달랐다.
배경에 대한 설명 없이 바로 사건을 통해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된다.
자연스럽게 ‘이옥’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주목하게 되고 어느새 그의 편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시작부터 몰입도가 장난 아닌데?’
거대한 시대 흐름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인간의 삶이 서정적이면서 아름답게 묘사된다. 역사적인 사건은 묵직하게 담으면서 인물 중심의 서사를 통해 트렌디함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감정선은 한없이 애절해...’
다음 페이지, 또 다음 페이지.
순식간에 페이지가 넘어가기 시작한다.
한 번 읽기 시작한 강원준은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마치 메마른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
강원준 허겁지겁 대본 속에 담긴 텍스트들을 눈으로 마시고 있었다.
이옥(李鈺).
천재 문인이자 조선 팔도를 방랑하며 민초들의 삶을 관찰한 괴짜 선비.
‘그래, 이거야...’
자유와 꿈을 갈망하던 그의 삶이 어느새 강원준의 머릿속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너 아직도 그거 보고 있는 거야?”
매니저가 묻는다.
“어, 나 당장 만나야겠어.”
“뭐, 누굴?”
“이 대본 쓴 작가 말이야...”
강원준이 대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엔 권서준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선명히 보였다.
***
늦은 오후.
타이거 스튜디오 기획제작 7팀.
이미 대본 4개가 나온 상태라 한창 캐스팅 얘기가 진행 중이었다.
“연화 배역은 신하율로 확정됐고, 이옥 역할은 어떻게 할까요?”
정 피디의 말에 본부장과 진영민 CP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하아, 나무 엔터 쪽은 어떻게 됐어?”
“남태인 담당 실장한테 기획안을 보냈는데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대요. 뭐 추가 대본 나오면 다시 한번 보내주기로 했고요.”
“그래? 남태인 정도면 낫배드지.”
“...”
그러나 순간 두 사람 다 말을 잃는다.
낫배드라는 말 자체가 나쁘지 않다지, ‘좋다’나 ‘최고다’라는 뜻은 아니니까.
“아직도 강원준 생각하시는 거예요?”
본부장의 표정을 읽은 진영민이 넌지시 묻는다.
“...넌 아니냐?”
“뭐, 저도 마찬가지죠. 피디 생각 다 똑같잖아요.”
“하아...”
한숨만 길어진다.
굳은 표정의 본부장이 정 피디를 보며 묻는다.
“강원준 쪽에선 아직 아무 연락도 없는 거야?”
“네. 없네요. 오히려 썬샤인 쪽에서 기사 내는 거 보니까 「검은 달」로 마음 정한 거 같던데요?”
“흠.”
본부장이 입을 굳게 다문 채 한숨을 내쉰다.
답답하기는 진영민 CP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작품에서 제일 중요한 이옥의 캐스팅. 만장일치로 강원준을 생각한 상태였다.
신하율이 되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카드였다면 강원준은 반드시 잡아야 하는 카드였다.
‘이옥 역에 이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으니까.’
기획안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배우도 강원준이었다. 그렇게 한번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대본 작업을 과정 중에도 바뀌는 법이 없었다.
‘강원준만 잡으면 진짜 대박인데...’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맘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사실 실제 촬영보다 더 어렵고 변수가 많은 게 바로 배우 캐스팅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가장 큰 아쉬움이 남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설득할 방법도 없는데 닭 쫓던 개처럼 한없이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어.’
진영민 CP는 냉수 한잔을 들이키고 다시 회의에 들어간다. 자연스럽게 본부장의 눈빛도 진지해진다.
“일단 그건 좀 더 기다리기로 하고, 다른 배우들은 좀 어때? 세팅 각 좀 나왔어?”
“제 생각에 김려 역으로는 그나마 이명수나 정해일이 나을 거 같아요.”
“흠. 하긴, 둘 다 연기력 괜찮지. 특히 정해일은 사극 경험도 있지 않아?”
“네, 세종대왕 때 세자로 나왔었어요.”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 얘기로 돌아온다.
어쩔 수 없었다.
대본이 늦게 나와도, 스케줄이 캔슬 나도, 하다못해 배우 캐스팅이 잘 안 돼도, 한번 출발하면 끝까지 가야 하는 게 바로 드라마였으니까.
‘그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말이지...’
다만 자꾸만 미련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이잉.
그런데 그 순간 정은미 피디의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한 정 피디가 얼른 전화를 받는다.
“안녕하세요, 차 팀장님. 네, 네?”
차 팀장이라면 강원준의 매니저였다.
순간 본부장과 진영민 CP의 이목이 쏠린다.
“네, 네... 가능할 것 같긴 한데 확인하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네, 네. 네.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본부장이 닦달한다.
“설마, 차연우 팀장이야?”
“...네. 맞아요.”
“작품 한데?”
“그건 말 안 했어요. 다만...”
“그럼 무슨 얘기를 한 건데? 인마, 빨리 좀 말해봐.”
답답한 본부장이 재촉한다.
그러자 정 피디가 놀란 눈으로 입을 연다.
“권 작가님을 만나보고 싶대요. 그것도 내일 당장이요.”
“...뭐?”
본부장과 진영민 CP의 눈이 동시에 커진다.
전혀 예상 밖의 제안이었다.
***
마지막 학기는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수업은 이틀만 가면 됐고, 과제 역시 졸업반이라 리포트 대체가 많았다.
덕분에 학교를 다니면서 대본을 집필하는 데에도 특별히 무리가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
캠퍼스 인도 옆엔 새로운 현수막이 보였다.
[국제 웹드라마 어워즈 각본상 수상. 문창과 권서준]
문득 며칠 전 있었던 웹드라마 어워즈 시상식이 떠오른다.
온라인 시상식이라 특별히 준비할 건 없었다.
다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작품과 내 이름을 알게 됐다는 사실에 적당한 고양감이 올라온다.
‘트로피도 꽤 마음에 들고.’
영사기를 형상화한 금빛 트로피.
국제 배송으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는 유리장을 짜서 전시까지 했다.
‘이게 오늘부터 우리 집 가보다.’
엄마의 너스레에 누나도 나도 크게 웃고 말았다.
엄마의 깨톡 프로필은 아직도 그때 받은 트로피였다.
내가 손에 쥔 첫 번째 트로피.
그 묵직한 무게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언젠가는 그 옆을 가득 채우겠지.’
묵묵히 내 길을 걷다 보면 뒤따라올 당연한 결과들이었다.
지이잉.
생각에 잠긴 채 걷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정 피디였다.
미팅도 없는 날인데 갑작스러운 연락이라 순간 의아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한 가지 가정이 떠오른다.
혹시?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 담담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피디님. 무슨 일이시죠?”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 작가님. 강원준 배우가, 작가님을 만나보고 싶답니다. 출연과 관련해서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대요!
역시 예상대로였다.
내가 뿌린 씨앗이 전하는 또 다른 결실의 소식이었다.
***
강변을 달리는 고급 세단 안.
뒷좌석에 앉은 강원준은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차 팀장은 연신 룸미러로 강원준을 보며 말리고 있었다.
“원준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너 같은 톱스타가 입봉 작가 작품에 출연한다는 게 말이 돼?”
“형은 대본을 보고 나서도 그런 말이 나와?”
강원준의 말에 차 팀장이 애써 답답한 마음을 억누른다.
“그래, 솔직히 대본 엄청난 거 인정. 하지만 이제 고작 4화잖아? 우리가 용두사미 대본 한두 번 겪어보니? 왜 다들 기성 작가 찾겠어, 그게 다 뒷심 때문인 거 알면서 왜 이러냐고?”
“형, 이 작가가 신인일 리 없다니까.”
“그럴 줄 알고 내가 알아봤는데, 고작 웹드라마 두 개, 희곡 하나 쓴 게 전부라더라. 그중에서 사극은 하나도 없었다고.”
차 팀장이 아무리 말해도 강원준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럴 리가 없어. 아마 형이 못 찾은 다른 필명이 있는 거겠지.”
연기 인생 10년을 걸고, 아니 무명 시절까지 15년을 걸고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영화든, 미니시리즈든 했던 사람일 거야.”
최근 들어 가장 가슴 떨리는 대본이었다.
선생님 소리를 듣는 작가들의 대본에서도 느끼지 못한 연륜과 묵직함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꼭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고...’
그 대답에 따라 출연 여부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배우 강원준을 괴롭힌 고민.
그 해답을 어쩌면 오늘 만날 수 있었다.
***
늦은 오후.
JW엔터테인먼트 4층 회의실.
강원준의 요청으로 실무진 없이 강원준과 작가인 나와 단둘이 미팅이 진행되었다.
커다란 회의실.
화려한 인테리어까지.
새삼 이곳이 왜 국내 3대 기획사라는 걸 말해주는 듯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강원준이 들어왔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와 남자다운 외모.
연기력만큼이나 외모적으로 유명한 배우다웠다.
“이렇게 작가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네요. 대본을 보고 어떤 분이신지 정말 궁금했거든요.”
진중하면서도 여유가 느껴지는 태도.
톱스타다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대본을 보내드리긴 했지만 이렇게 작가인 제게 직접 연락을 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솔직히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입니다. 다만 꼭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참을 수가 없더군요.”
“편하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분위기가 달라진다. 진짜 용건은 지금부터라는 뜻이었다.
“이옥이 그토록 절박하게 글을 쓴 이유는 뭘까요? 포기만 하면 원하던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요.”
상체를 숙인 채 건네는 진지한 질문.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왜냐고?
배우가 등장인물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는 거만큼 좋은 반응도 없으니까. 일을 넘어서서 캐릭터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는 뜻이니까.
이미 이옥의 매력에 빠진 거지.
다행히 질문에 대한 답도 나에게 있었다.
“이옥의 글 중에 백운필(白雲筆)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거창한 제목 같지만 그저 백운사에서 붓을 들었기 때문에 지은 제목이죠.”
나는 짧게 그의 시를 읊었다.
“글을 쓰는 거창한 이유는 없네. 지루해서 할 일이 없기에 쓴 것일 뿐. 이게 이옥이 그토록 간절하게 글을 쓴 이유입니다.”
순간 강원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뭔가 거창하고 화려한 이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담백하네요?”
“네, 이옥에게 글은 그냥 써야만 하는 무엇이었으니까요.”
물론 그 안에는 더 깊은 이옥의 가치관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건 단순히 설명으로 깨달을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그냥 써야만 하는 것이라...”
강원준이 뭔가 찾으려는 듯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인다.
“어?”
순간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냥 썼다... 그 말이 오히려 글에 목숨을 걸겠다는 말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는데요?”
오호.
생각보다 답을 빨리 찾았다.
“맞습니다. 이옥에게 있어 글은 호흡 그 자체였으니까요. 그의 삶 속에 녹아있는, 떼어낼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고 할 수 있죠.”
가만히 듣고 있던 강원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후... 이옥의 삶이 왜 그토록 제게 와 닿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강원준이 천천히 말을 잇는다.
“솔직히 연기 생활 십 년 차가 되니까 매너리즘에 빠진 기분이었거든요. 그 역할이 그 역할 같고, 매번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연기력도 늘 스트레스였고요.”
연기력 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배우의 충격적인 고백이었다.
“근데, 작가님의 대본은 달랐어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 아니 난생처음 보는 캐릭터 설정에 가슴이 두근거리더라고요. 그걸 보고 깨달았죠. 내가 연기에 지친 게 아니라 오히려 연기에 갈급했다는 걸...”
진지한 눈빛은 연기가 아닌 진심이라는 걸 전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은 하셨나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강원준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이번 작가님 작품에, 꼭 출연하고 싶습니다.”
바로 내가 원하던 대답이었다.
톱스타 이전에 배우로서 갖고 있던 본연의 목표. 강원준은 그것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저도 이옥처럼 그저 연기가 하고 싶었나 봅니다.”
강원준은 센스 있게 이옥의 시를 응용해 대답했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강원준의 눈동자.
그 안에 담긴 건 오랜 시간 동안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어느 베테랑 배우의 숨길 수 없는 열정이었다.
“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작가님, 다른 필명 있으시죠? 혹시 저한테만 알려주실 수 있나요?”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신에 찬 관심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네? 정말요?”
“앞으로 만들면 몰라도 지금까진 없습니다.”
“...”
강원준의 입이 떡 벌어진다.
결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