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59화 (59/203)

# 59. The game is afoot - 게임은 이미 시작됐다 (2)

59.

***

마포구에 위치한 8층 규모의 건물.

각이 둥근 큐브 모양의 건물은 국제 디자인상을 받을 정도로 특유의 아름다움을 뽐냈다.

그러나 이 건물이 유명한 이유는 건물의 미적 가치보다는 이곳이 바로 수많은 배우와 연예인들을 보유한 JW엔터테인먼트 사옥이기 때문이었다.

찰칵찰칵.

하루에도 수백 명이 넘는 국내외 팬들이 건물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가는 명소.

그때, 수많은 팬들 사이로 한 고급 스포츠카가 주차장에 들어선다. 차 번호를 알아본 직원에 의해 차단기가 올라가고 자연스럽게 내리는 남자.

“와, 강원준이다!”

단정한 옷에도 간지가 흐르는, 선글라스를 꼈음에도 단번에 팬들이 알아보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른다.

강원준.

30대 초반에 톱스타 반열에 오른 배우.

잘생긴 외모뿐만 아니라 매년 각종 시상식에서 최소 하나 이상의 상을 받는 연기력으로도 유명한 스타였다.

강원준은 특유의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지으며 건물에 들어선다.

잠시 뒤,

강원준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차연우 팀장이 다가온다.

“원준아, 마침 잘 왔다. 차기작은 어떻게 할래?”

“하아, 형 나 좀 쉬면 안 돼? 이러다가 쓰러지겠는데?”

“어. 쉬면 안 되지. 니가 쉬는 건 국가적인 낭비라고. 지금 기다리고 있는 영화 대본만 몇 개인 줄 알아? 스무 개야 스무 개.”

“대본이 스무 개면 뭐 해? 괜찮은 게 하나 없는데.”

“왜? 썬샤인에서 보내준 「검은 달」 대본은 괜찮지 않았어? 거의 주인공 몰빵 콘셉트라 나쁘지 않던데?”

차 팀장의 말 대로였다.

작품은 나쁘지 않았다. 칼질하고, 액션하면서 남자다운 모습을 뽐내는 전형적인 사극 액션물이었다.

가장 자신 있는 사극 장르라 부담감도 적고, 인기 끌기에도 좋은 콘셉트였다.

‘그런데 내키지가 않는다는 말이지...’

뻔하고 반복되는 연기가 벌써부터 눈앞에 그려진다.

돈과 인기를 위해선 하는 게 맞았지만 자꾸만 걸리는 무언가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몰라, 그냥 안 끌려.”

“왜? 이만한 퀄리티 작품도 드문데? 게다가 출연료도 지난번 보다 30%나 올려준대.”

“...”

거절하기 힘든 돈의 유혹.

그러나 그 마저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고민하던 강원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나 그냥 좀 쉴래.”

“...뭐?”

“쉰다고, 그렇게 알아. 당분간 연락하지 말고.”

“야, 야! 강원준! 그럼 마지막으로 이것만 보고 가! 방금 타이거 스튜디오에서 보낸 기획안이라고! 야, 강원준!”

복도에 울리는 차 팀장의 다급한 목소리.

그러나 그도 톱스타 강원준의 걸음을 막을 순 없었다.

***

북한산을 다녀온 뒤,

나는 본격적으로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대본을 써 내려갈수록 꿈을 펼치지 못한 이옥의 삶이 내 가슴을 저릿저릿하게 만든다.

‘그 시절 나 역시 그랬으니까.’

이옥에게 정조라는 거대한 벽이 있었다면 나에겐 런던 시의회와 시장이 있었다.

그에게 소품체가 무시 받는 문체반정이 있었다면, 나에겐 내 작품을 사탄의 글이라고 외치는 청교도들의 박해가 있었다.

지금이야 성공한 대문호로 추앙받지만 그 시절 나의 삶은 지금의 평가와는 많이 달랐다.

그래서 더 공감할 수 있었던 천재 문인의 삶.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낡은 서책에 남은 짧은 글귀 하나가 허투루 지나쳐지지가 않는다.

[바람은 잔잔하고 이슬은 정결(淨潔)하니 8월은 아름다운 계절이고, 물은 흘러 움직이고 산은 고요하니 북한산은 아름다운 지경이며, 개제순미(豈弟洵美)한 몇몇 친구는 모두 아름다운 선비이다. 이런 아름다운 선비들로서 이런 아름다운 경계에 노니는 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자조적인 듯하면서 포기하지 않는 그의 독백이 자꾸만 내 머릿속에 맴돈다.

그렇게 한 달 뒤, 늦은 오후.

내 손에는 네 개의 대본이 들려 있었다.

‘후. 좋아.’

열정을 다한 결과물이 내 마음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푸른 기운이 여기저기 움트는 초봄의 정취.

어느새 봄이었다.

‘시간은 참 빨리도 흐르는구나.’

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그리고 시작을 뜻하는 계절.

이번 계절엔 또 어떤 멋진 일이 펼쳐질까.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누나가 내 방으로 들어온다.

“서준아, 정 피디님한테 이옥 생가랑 그 밖의 자료들 함께 보내줬어. 군역을 치를 당시의 위치랑 내용도 함께 첨부했고.”

누나는 자료조사를 비롯해 작품과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을 처리했다. 덕분에 나는 오로지 작품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잘했어. 오늘은 어디 가셨대?”

“전라남도. 어제는 강원도였는데, 충정도 찍고 거기까지 가셨대. 대박 아니냐?”

정 피디는 한창 촬영지 섭외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본인 작품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보통이 아니었다.

“정 피디님, 성실한 건 알았지만 이번에 진짜 열심히 답사하시더라.”

누나는 혀를 내두르며 정 피디의 열정을 칭찬했다.

“그러는 누나는?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면서 자료 조사해주고 있잖아.”

“나야 앉아서 하는 일이잖아. 재미도 있고.”

재능을 깨우친 누나는 일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징조였다.

“아무튼 누나도 쉬엄쉬엄해. 그러다 쓰러지면 믿고 맡길 사람도 없으니까.”

“아이고, 고용주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사리면서 하겠습니다.”

누나의 너스레에 웃음꽃이 핀다.

오랜만에 보는 일할 때 웃는 누나의 모습.

시작이 좋다는 증거였다.

***

며칠 뒤.

완성된 4부 대본을 두고 회의가 열렸다.

대본을 읽어가던 사람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본부장이었다.

“하아. 이거 구체적으로 보니 더 마음에 드네요. 뭐해, 감독도 소감 한마디 해봐.”

본부장이 슬쩍 정 피디를 부추긴다.

대선배들 앞에서 후배가 주눅 들까 봐 챙겨주는 모양새가 나쁘지 않았다.

“말할 게 있나요. 너무 좋아요. 전 이대로 작가님이 써주시는 대로 찍기만 하면 될 거 같은데요?”

“하, 넌 진짜 한결같이 권 작가님 편이구나?”

듣고 있던 진영민 CP가 웃음을 터트린다.

이전과 달리 정 피디를 대하는 목소리가 부드럽다.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기 때문에 나를 지지하는 정 피디에 대한 대우도 달라진 것.

눈치 빠른 정 피디는 그걸 알아채고 이미 나한테 미소를 보낸다.

회의와 대본까지, 모든 것이 순탄했다.

그런데도 회의실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 실패에 대한 우려 때문이겠지.’

애초에 사극은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었다. 제작비도 만만찮고, 무엇보다 PPL을 받을 수가 없으니까 실패에 대한 부담감이 큰 편이었다. 그래서 애초에 미니시리즈로 진행할 수도 없었다.

‘고작 16개로는 세트장과 의상 비용, 메이크업 분장, 그리고 엑스트라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

최소 24부작은 해야 수익을 낼 수 있었다.

그것도 말 타는 장면이 나오거나 전쟁 씬이 필요한 정통 사극의 경우 제작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캐스팅이었다.

“일단 대본 나왔으니까 캐스팅 작업 진행하자고. 정 피디는 바로 대본 돌려. 지난번에 얘기했던 대로 주연급은 강원준한테 제일 먼저 보내고.”

“그거 나중에 순서 꼬이면 말 나오니까 꼭 강원준한테 제일 먼저 보내라, 알았지?”

진영민 CP는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다. 그만큼 첫 대본을 돌리는 순서는 중요했다.

나중에야 여기저기 발에 치이며 돌아다니겠지만 첫 대본 만큼은 배우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그러나 제작팀 누구도 강원준의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작품 「검은 달」 때문이었다.

제작비 150억이 투입된 사극 액션물.

그것도 원톱이나 다름없는 콘셉트를 배우가 거절하기엔 쉽지 않으니까.

그러나 나는 자신 있었다.

‘과연 내 대본을 보고도 검은 달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근거 없는 자만이 아닌 팩트에 기반을 둔 확신.

이제 내가 할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일주일 뒤.

강원준은 모처럼의 휴식을 마음껏 즐겼다.

바쁜 스케줄 탓에 상한 피부도 관리받고, 평소 취미였던 레이싱도 즐기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뭔가 해소되지 않는 기분에 자꾸만 몸이 푹푹 처진다.

‘뭘 해도 재미가 없네.’

이게 배우 십 년 차에 겪는 매너리즘인 건가. 결국 그의 발걸음이 찾은 곳은 JW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이었다.

“어? 당분간 쉰다며? 사무실은 왜 왔어?”

차연우 팀장이 묻는다.

“그냥, 심심해서.”

“그럴 바엔 차라리 작품을 하자니까? 썬샤인 쪽에서는 아직도 대답 기다리고 있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지. 당분간 쉴 거라고?”

“야, 조금 전까지는 심심하다며?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 거냐?”

“...”

강원준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무료한데 일은 하고 싶지 않고, 뭔가 새로운 걸 찾고 싶은데 몸은 무거운 상태.

전형적인 무기력 증상이었다.

‘하아, 대체 뭐가 문제일까...’

강원준은 TV를 켜서 얼마 전 자신이 출연했던 드라마를 모니터링했다.

가만히 눈치 보던 차 팀장이 슬쩍 다가와 기분을 맞춰준다.

“이야, 역시 우리 강원준 배우님, 성격은 별론데 연기 하나는 잘해.”

친형제나 다름없는 차 팀장의 칭찬.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강원준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좀 아쉽지 않았어?”

“아쉽다니 뭐가?”

“좀 전 씬 말이야. 상황으로는 좀 더 터트리는 게 맞았던 거 같은데, 도철이라는 캐릭터한텐 또 안 맞는 거 같아서 엄청 고민했거든.”

“그래? 난 모르겠는데? 그때 감독님도 오케이 하셨으니까 괜찮은 거 아닐까?”

역시나 이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후...”

자연스럽게 강원준의 한숨이 깊어진다. 보면 볼수록 아쉬움이 남는 연기에 결국 TV마저 꺼버린다.

‘정말 「검은 달」이라도 해야 할까...’

무기력함을 해소하지 못해 자꾸만 이리저리 생각이 구른다.

그렇게 소파에 기댄 채 힘없이 고개를 돌리던 중 선반 위에 놓인 낯선 대본이 보인다.

‘어?’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찾았을 때는 분명 못 봤던 대본.

이것도 직업병일까?

본능적으로 손이 간다.

그러나 첫 장을 펼치자마자 흥미가 확 떨어진다.

“이것도 사극이네?”

불편하고 무거운 의상에, 미니시리즈보다 세 배 이상 걸리는 분장 시간, 게다가 호흡도 길어서 최소 24부작 이상이 기본이라 체력적으로 소모가 큰 장르.

‘그뿐만 아니라 연기 톤도 신경 써야 해. 실패하면 이미지 회복도 쉽지 않다고.’

흥행 보증 수표나 다를 바 없는 강원준이지만 이번만큼은 사극을 피하고 싶었다.

강원준은 그대로 대본을 내려놨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차 팀장이 입을 연다.

“왜? 그거 관심 있어?”

“관심은 무슨. 사극은 당분간 쉬고 싶다니까?”

“하긴, 사극이 귀찮긴 하지. 근데 그거 신하율이 출연하기로 했다.”

“하율이가?”

“어, 얼마 전에 그쪽 본부장이랑 미팅도 했다던데?”

“대체 왜? 멀쩡하게 미니시리즈 잘하다가 왜 사극으로 새는 건데?”

같은 소속사 배우이자 아끼는 후배라 신경이 쓰였다.

“뭐 작가랑 친분이 있다고 듣긴 한 거 같은데, 나도 잘은 모르겠네?”

한창 미니시리즈로 잘 나가는 신인이 왜 사극을 택했나 했더니 결국 친분 때문이었다.

안타까웠다.

인맥에 휘둘려 억지로 출연하다가 이미지 망치는 걸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나 역시 그랬었고...’

친한 감독의 부탁에 마지못해 출연한 SF영화.

인조인간 역을 맡았는데 형편없는 작품 수준 때문에 거하게 말아먹고 말았다. 그 뒤로 줄곧 강원준을 따라붙은 별명이 ‘사이비 보그’였다.

‘사이보그’ 말고, 관객을 속였다고 해서 ‘사이비 보그’.

‘내가 그 꼬리표를 떼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배우에게 한 번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곤 했다.

아끼는 후배만큼은 같은 길을 걸어서는 안 됐다. 특히나 여배우의 경우 이미지 손상은 치명적이었다.

강원준은 거칠게 대본을 펼쳤다.

“왜? 한 번 읽어보게?”

“어, 대체 어떤 대본인지 내가 한 번 확인해 보게.”

강원준이 자리 잡자 차 팀장이 센스 있게 마실 거리를 챙겨준다. 강원준은 이내 매서운 눈빛으로 첫 씬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라, 이건...’

분명 장르는 사극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느낌의 사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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