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useful - 쓸모 있는 (3)
56.
***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나의 고향이자 내가 처음 글을 쓰기로 결심했던 곳이었다.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오전 6시에 시작해서 오후 5시 30분까지 진행되는 그래머 스쿨의 수업. 방학도 없이 일 년 내내 진행되는 수업 속에서 학생들이 사용하는 교재는 로마 시대 극작가들의 원어 대본이었다.
‘그것 말고는 자료랄 게 없었지.’
그 당시엔 자료를 찾는다는 게 정말이지 어려웠다.
책 자체가 귀했고, 원하는 자료를 구할 방법도 극히 드물었다.
그저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래머 스쿨에 비치된 책을 통해서나, 또는 떠돌이 극단의 연극이나, 상인들이 떠들어대는 무용담을 통해 자료를 모으는 게 전부였다.
물론 내 첫 희곡의 수준이 낮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베로나의 두 신사>
작품 안에 담긴 가치와 잠재력은 훌륭했지만, 셰익스피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 작품 중 하나였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한 비운의 작품이기도 하고.
물론 그때의 실패는 나를 각성하게 만들었다. 집필을 위해 자료의 퀄리티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별자리에 대해 논할 땐 천체 전문가를 찾아갔고, 작품에 필요한 지리, 역사, 의학 등 전문 분야의 지식이 필요할 땐 어김없이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자료를 모았다.
때론 마차를 타고 하루를 가야 하는 거리도 지체 없이 달려갔으며, 새로운 서적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릴 때면 항구에서 며칠을 살다시피 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직접 발로 뛰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체력적으로나 시간상으로 작품에 몰입할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으니까.’
21세기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정보는 많아졌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양질의 자료를 찾는 게 더욱 어려워졌다.
대다수의 네임드 작가들이 보조 작가를 두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정 피디와 헤어진 뒤,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본격적인 대본 집필에 앞서서 반드시 세팅되어야 할 조건 때문이었다.
‘사람이 필요해. 24부작 정통 사극을 혼자 끌고 가는 건 미친 짓이니까.’
다행히 난 오래전부터 점 찍어둔 서브 작가가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거실에서 작업 중이던 누나가 손을 흔든다.
“어서 와. 저녁은?”
“먹었지. 누나는?”
“나야 뭐... 대충 때웠지. 하아.”
대답과 동시에 한숨을 크게 내쉰다.
“왜? 뭐가 잘 안 풀려?”
“어? 뭐 이것저것...”
웃는 얼굴과 달리 노트북 배경은 하얀색이었다.
분명 아침에 내가 나갈 때도 저 배경이었다. 결국 온종일 한 글자도 못 쓴 게 분명했다.
“후아, 솔직히 방법을 못 찾겠네? 감독한테 계속 까이기만 하니까 자신감도 떨어지고... 이게 내 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누나는 최근 연이어 두 작품이 시청률이 안 나와서 슬럼프에 빠진 상태였다.
게다가 새로 온 피디랑도 합이 맞지 않아 아직 차기작 계약도 못 한 상태였다.
“후...”
총체적 난국인 상황. 결국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는 누나가 2주 넘게 외출도 없이 글만 붙잡고 있는 중이었다.
“참, 넌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보조 작가들한테 부탁한 자료 좀 받아왔어.”
나는 일부러 들고 온 자료를 툭 내려놓았다.
“아, 이거야?”
누나가 슬쩍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내용을 보자마자 누나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뭐야? 이거, 자료 퀄리티가 왜 이래?”
분량만 많지 건질 게 없는 자료들.
누나는 역시 단번에 알아봤다.
“하아, 이거 니가 네임밸류 있는 작가 아니니까 이러는 거야. 원래 유명 작가가 아니면 보조 작가들도 열심히 안 하거든. 그저 월급을 위해 마지못해서 하는 일인 거지.”
보조 작가 경험이 있는 누나라 그 심리를 간파했다.
“하아.”
누나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나를 바라본다.
“이거, 언제까지 필요한 거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왜?”
“내가 해줄게.”
“누나가?”
“그래. 바쁘다고 동생도 통 못 챙겼는데 이런 거라도 도와줘야지.”
본인도 힘든 상황 중에 누나는 동생인 나를 먼저 챙겼다.
“부담 갖지 않아도 돼. 어차피 안 나오는 대본 붙잡고 있는 것보다 잠시 쉴 겸 딴 거 하는 게 나으니까. 뭐, 산책하는 것처럼 말이야.”
누나는 요청 자료 목록을 펼치더니 곧바로 읽어가기 시작한다.
“오, 조선 시대 인물이네?”
조금 전과 달리 누나의 눈빛에 생기가 돈다. 단번에 몰입하는 눈빛이 마치 물 만난 고기를 연상시켰다.
내 예상대로 누나는 창작보단 자료 조사와 편집에 훨씬 더 재능이 있었다.
물론 그걸 미리 알고 있었던 나는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이고.’
누나가 자신의 진짜 재능을 각성하기에 아주 좋은 날이었다.
***
늦은 밤.
“후아.”
거실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던 권지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연이어 실패한 작품들 때문이었다.
새로 온 감독과의 불화도 있었지만 가장 큰 고민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재미가 없어...’
언제부턴가 대본 쓰는 게 힘이 들고 에너지가 소모됐다.
정확히는 자료조사를 하고, 수정하고, 분석하는 단계까진 재미있지만 직접 쓰는 게 힘들었다.
‘내가 쓰면 뭔가 계속 막히는 느낌이야.’
분명 재료를 모을 때까지만 해도 미슐랭 별 다섯 개짜리 요리가 나올 거 같았는데 막상 시작해 보면 그다지 새롭지 않았다.
어떻게든 극복해보려고 노력했지만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반면 동생 서준이는 끝을 모르고 쭉쭉 성장 중이었다.
‘정말 대단해. 같은 남매인데 왜 이렇게 다른 거지? 이게 재능 차인가?’
한때는 자신이 가르쳐 줄 때가 있었는데 이젠 완전히 상황이 달라졌다.
‘나도 뭔가 이뤄야 하는데, 모르겠네...’
드라마 작가를 꿈꾸며 앞만 보고 달렸는데 순간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이 길이 맞는지 심각하게 밤마다 고민하다 보니 한숨만 깊어졌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제 포기하는 게 맞는 건가?’
한없이 바닥을 향해 가라앉는 기분.
귄지연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일부러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득 서준이가 맡기고 간 자료집이 보인다.
‘그래, 이렇게 신세 한탄 할 바엔 동생 도와주는 게 낫지.’
동생도 도와주고 기분 전환도 할 겸 자료집을 집어 든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자료 목록에서 철두철미한 권서준의 성격이 드러난다.
“이옥?”
처음 듣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기획안을 천천히 읽어내려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필요한 자료들이 떠오른다.
‘이게 필요한 건 작품 설정 때문이겠지? 이건 캐릭터와 관련된 자료고...’
웹드라마를 써본 경험 덕에 권서준이, 아니 작가가 왜 이 자료를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추가로 어떤 자료가 필요한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옥의 고향이 궁금하다면, 그의 집안이 그 당시 어떤 위치였는지도 당연히 궁금하겠지? 그럼 이옥의 조상들이 어떤 관직에 나갔는지를 살피면 좀 더 재미있는 자료를 찾을 수도 있겠는 걸?’
부탁한 자료를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겨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 심취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바람이 나기 시작한다.
‘뭐야, 이거 너무 재미있잖아?’
억눌려있던 뭔가가 꿈틀거리는 기분.
권지연의 얼굴에도 모처럼 화색이 돈다.
그래,
그건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열정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꽃피어 보는 재능이었다.
***
다음 날 오후.
나는 수업을 마친 뒤 장현웅과 함께 학교 근처 대형서점을 들렀다.
서점에 유통된다는 내 책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나는 정은미 피디, 그리고 서미연 감독, 장현웅에게 내 책을 선물했다.
정 피디와 장현웅은 직접 만나서 전달했고, 서 감독한테만 퀵으로 보냈다.
장현웅이 갑자기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더니 만년필 하나를 내민다.
“뭐야?”
“책 받고 입 싹 닦을 순 없잖아. 작가님한테 어울리는 선물로는 이게 딱이지.”
차비도 아끼느라 걸어 다니는 놈이 기특했다.
“고맙다. 잘 쓸게.”
안 그래도 쓰던 만년필 촉이 벌어져서 하나 구매해야 했는데 마침 잘됐다 싶었다.
나는 모래알처럼 고운 친구의 마음을 받아 주머니에 담았다.
잠시 뒤,
검색대를 지나 대형 서점 안을 둘러봤다.
수많은 책으로 가득 찬 이곳, 사방이 온통 책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내 이름이 적힌 책이 있었다.
[덧없는 인생이여]
[권서준 작가]
그동안 반응이 좋은 탓인가 가장 노출이 잘 되는 곳에 책이 놓여 있었다.
나는 가만히 내 책을 바라봤다.
기분이 묘했다.
오롯이 내 손을 거쳐 만든 작품이라서일까, 웹드라마로 성공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감회가 새로웠다.
옆에서 지켜보던 장현웅이 고개를 젓는다.
“진짜 대단하다. 벌써 이렇게 자기 이름으로 된 책도 나오고... 뿌린 대로 거둔다더니 정말 대단해.”
장현웅의 말대로였다.
뿌리고, 키우고, 거두는 농사의 원리.
농경 사회 이후로 줄곧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었다.
최선을 다한 열정의 발자취.
내가 직접 창조한 또 하나의 이야기.
바라보는 내 마음도 뿌듯해진다.
“자, 자, 권서준 작가님, 이럴 게 아니라 술 한잔하셔야죠? 출판 축하 파티도 제대로 못 했잖아요.”
장현웅이 너스레를 떤다.
하긴, 기분도 좋은데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한 직원이 슬쩍 다가온다.
“저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혹시 이 책 작가님이신가요?”
처음 받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작가인 나보다 먼저 나서는 놈이 있었다.
“아, 네. 이 친구가 바로 권서준 작가입니다.”
“아, 정말요? 어떤 분인지 진짜 궁금했는데, 혹시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직원은 직접 돈을 주고 산 책을 내밀었다.
“물론이죠.”
현웅이 놈이 대신 대답하더니 책을 받아 얼른 내게 내민다.
이젠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
나는 선물 받은 만년필을 꺼냈다.
사각사각.
만년필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리고, 나는 이내 사인을 마친 책을 직원에게 건네줬다.
“정말 감사합니다. 책 진짜 감동적이었어요. 앞으로도 좋은 작품 부탁드릴게요.”
반짝이는 눈빛에서 진한 감동이 전해진다.
따지고 보면 직원이 받은 감동 역시 내가 뿌린 씨앗의 결과물.
문득 그 시절 기억이 떠오른다.
공연을 마친 뒤 수많은 관객들에게 둘러싸였던 그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러나 내 회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울린 휴대폰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번호.
게다가 번호가 매우 길었다.
‘가만, 00으로 시작하면... 국제 전화일 텐데?’
영문 모를 국제 전화에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웹드라마 어워즈 한국 콘텐츠 담당자입니다. 혹시 권서준 작가님 맞으신가요?
미국식 영어가 귓가에 흘러들어온다.
“아, 네. 제가 권서준 맞는데요. 무슨 일이시죠?”
대답을 들은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작년 이맘때쯤 정성껏 뿌린 씨앗 하나.
그 씨앗이 어느새 추수할 만큼 자랐기 때문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웹드라마 어워즈 각본상 수상자로 선정 되셨다는 소식을 알려드리려고 전화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