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50화 (50/203)

# 50. traditional - 전통적인 (2)

50.

***

“기획제작 7팀과 함께 하실 거예요. 담당 피디는 권 작가님이 요청하신 대로 정은미 피디로 정해졌고요.”

나는 오수정 대리를 통해 회사 내부 사정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타이거 스튜디오 기획제작 7팀과 함께 일할 예정이고 전반적인 내용도 내가 요청한 대로 세팅이 되어 있었다.

“7팀 전체를 관리하시는 분이 진영민 CP님인데 회사 내에선 능력을 인정받으시는 분이에요. 깐깐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신뢰가 가는 분이고요. 뭐, 최근엔 좀 몇 편 힘드시긴 하지만...”

진영민 CP라면 나도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다. 군대 가기 전 문예창작학과 취업 특강 때도 초빙 강사로 와서 강연을 들은 적도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살짝 고지식한 사람이었던 거 같은데...’

노력한 만큼 결과를 낸다는 마인드.

절차와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일에도 불만이 많을 수 있겠어.’

고려해야 할 사항이었다.

“참, 혹시 보조 작가는 필요하신가요?”

“제가 쓸 수 있나요?”

“물론이죠. 원하시면 요청만 하세요. 이미 결재가 된 상태라 가능하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 조사나 인터뷰, 취재와 관련해서 손을 덜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로서는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때마침 마땅한 사람이 하나 있기도 했고.’

물론 벌써부터 부를 필요는 없었다.

***

오 대리와 헤어지고,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는 그 시간 동안 대학교 도서관과 시청각자료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사극 장르에 대한 분석과 시장 조사 때문이었다.

전생의 기억 덕에 기본적으로 역사극에 대한 경험은 풍부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이 시대에 최적화된 기준을 충족해야만 성공에 이를 수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며칠 동안 분석했던 유명 사극들을 떠올렸다.

[동녘의 아침]

[명의]

[정벌]

[왕의 길]

등등.

최근 몇 년 사이에 방영했던 사극 작품들 위주로 분석했다. 덕분에 사극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이미 마친 상태.

다만 아직까지 뚜렷한 소재가 떠오르진 않았다.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배경이 없었고, 특히 관심 가는 인물이 없었다.

‘인물이 선명해야 이야기도 재미있을 텐데...’

자연스럽게 내가 썼던 사극이 떠오른다.

헨리 6세, 존 왕, 리처드 3세, 리처드 2세, 헨리 4세, 헨리 5세, 헨리 8세까지.

하나같이 내 머릿속에서 살아 숨 쉬던 인물들이었다.

‘괜찮은 인물이 어디 없을까?’

유명 위인들은 여러 작품에서 이미 다룬 상태였다. 또다시 조명한다고 해서 새로울 것도 없었고, 오히려 식상함만 가중 시킬 뿐이었다.

‘신선하면서, 또 기존의 틀을 깰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필요한데...’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이 느낌이 나를 며칠째 괴롭게 만들었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송영도 교수였다.

-서준아, 시간 괜찮으면 금요일에 잠깐 학교에 올 수 있을까?

***

타이거 스튜디오 기획제작 7팀.

이직 3개월 차 정은미 피디는 선배들의 부름에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야, 정 피디.”

“넵!”

“팔자 좋다. 입사 3개월 만에 작품도 하고?”

“이야, 인생 이렇게 쉽게 풀리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

선배들의 말투는 곱지 않았다.

인사팀을 통해 정식으로 이직을 한 거지만 낙하산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소담 프로덕션에서도 받았던 익숙한 대우.

그러나 이곳에서의 따돌림이 더 힘든 건 지금까지 선배들과의 관계가 매우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정말 잘 챙겨주셨었는데...’

이직 출신이었지만 각종 모임과 회식 자리에 빼놓지 않고 불러주고, 자신들만의 노하우도 알려주는 등 진심으로 후배처럼 대우해줬다.

그 덕에 3개월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갈 정도로 즐거웠던 기억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바뀌었지.’

정확히 진영민 CP가 본부장님을 만나고 난 뒤부터 달라진 분위기.

3개월 동안 따뜻하게 가르쳐 주던 선배들이 하루아침에 돌변하자 오히려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야, 정 피디.”

선배들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정 피디를 부른다.

“네, 네.”

“너 그 작가랑 무슨 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오래 일하고 싶으면 줄 잘 서라.”

“그래, 똑똑히 새겨들어. 괜히 그쪽에 섰다가 낙동강 오리알 되지 말고.”

소담에 이어 이곳에서도 벌어지는 힘든 시간.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

“야, 너 대답 안 해?”

선배들이 재촉하지만 정 피디는 그들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정말 죄송한데요, 전 권 작가님을 신뢰합니다.”

“뭐라고?”

“이미 두 작품을 해봤는데 정말 놀랐거든요. 선배님들께서도 대본을 한 번 보시면...”

“하, 야, 조용히 해.”

선배들은 듣기 싫은 듯 말허리를 자른다.

“정은미 많이 컸네.”

“하여튼 요즘 것들은 위아래가 없다니까?”

“됐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두 선배는 정 피디를 혼자 두고 멀어진다. 며칠 전만 해도 기다렸다가 챙겨가던 선배들이었기에 이 상황이 더욱 상처가 된다.

그러나 정 피디는 오히려 마음을 굳게 먹었다. 예전이라면 흔들렸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난 이제 예전의 정은미가 아니라고.’

모두 권서준 덕분이었다.

참는 건 능사가 아니었다.

부딪힐 땐 부딪혀 싸워야 했다.

‘권 작가님한테 약속했으니까. 이젠 다르게 살 거야.’

그리고 권서준 작가라면 이 모든 불합리한 상황도 실력으로 이겨내리라 믿었다.

아니, 그건 확신이었다.

***

며칠 뒤.

나는 타이거 스튜디오와의 미팅 전 잠시 학교에 들렀다.

송 교수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아마 정영만 회장과의 식사 이후로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그때, 네 말 듣고 생각이 많았다.”

송 교수는 커피를 마시며 그날의 대화를 다시 끄집어냈다.

“아닙니다. 주제넘은 말이었습니다.”

“아니야. 모처럼 좋은 대화였고, 정 회장님도 흡족해하셨어.”

역시나 두 사람 다 꽉 막힌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계속 소설을 썼으면 하는 바람은 솔직히 포기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야. 나로선 오랫동안 찾아 헤맨 기회니까.”

애달픈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두 사람의 뜻대로 살아 줄 생각은 없지만.

송 교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일단 서준이 넌 네 길을 가. 나중에 네 안에서 또 다른 목표가 생겼을 때 그때 다시 진지하게 얘기를 해보자.”

다행히 대화는 잘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연구동을 나왔다.

물론 쉽게 나를 포기하진 않겠지만 우선은 내 뜻을 충분히 전한 정도로 만족이었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네.’

시각을 확인하니 어느새 미팅을 위해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미뤄뒀던 고민 하나가 떠오른다.

‘사극이라...’

천천히 캠퍼스를 내려오며 생각에 잠긴다.

두 다리는 움직이고 있지만 생각은 여전히 작품에 대한 고민에 멈춰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문득 길가에 걸린 플래카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선배들의 수상 소식 사이로 익숙한 이름 하나가 보인다.

<제42회 이옥 백일장 1등 권서준>

작년 1학기 때 수상한 백일장 플래카드였다.

언제나 선배들의 이름을 보며 부러워했었는데, 이렇게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고작 일 년의 시간.

그사이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는 사실이 실감 난다.

그런데 그 순간,

뜻밖의 이름이 다시 한번 내 눈에 들어온다.

선배들의 이름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 이름도 아니었다.

바로 백일장의 간판인 이옥 선생의 이름이었다.

‘가만, 이옥 선생?’

문무자(文無子) 이옥(李鈺).

학식이 깊고,

예절이 바르며,

구습에 얽매이지 않고,

바람처럼 살다간 천재 문인.

조선 천지에 평생토록 임금에게 저격당한 유일한 선비.

상황 자체로도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문체반정 사건을 토대로 매력적인 악역까지 설정할 수 있어...’

이거였다.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인물과 배경.

나는 잠시 눈을 감은 채 그 시절 헨리 6세가 처음 공연되던 런던의 분위기가 회상한다.

권력과 암투.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증오.

치열한 욕망의 대립을 통해 런던시민의 밤잠을 설치게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래, 이게 사극이지.’

이야기는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간다.

그리고 어느새 내 머릿속엔 놀랍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

“후.”

회의실에 앉은 진영민 CP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작가 이력서를 보니 더 한숨이 나온다.

“정식 입봉 작가도 아니네?”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 출신도 아니고, 각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아카데미 출신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공모전 입상 대상자도 아니었다.

“프로덕션에서 의뢰해서 작품 쓰고, 그게 운 좋게 된 케이스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낙하산 그 이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물론 권서준의 작품을 보긴 했다.

‘뭐 나쁘진 않았어.’

좀 더 솔직하게 말해서 괜찮았다. 웹드라마에서 이 정도의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애초에 정 피디를 아끼고 키우려고 했던 것도 그 웹드라마의 퀄리티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미니시리즈는 전혀 다른 영역이라고. 게다가 이건 사극인데... 하아.’

안 그래도 지난 하반기부터 연달아 작품이 망해서 죽을 맛인데, 갑자기 낙하산 인사까지 끼자 CP 입장에선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예정된 상반기 라인업 역시 위험한 상태. 이미 두 작품의 종합편집본을 내고 내린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이대로라면 팀 사기도 떨어지고, 윗분들한테도 면이 안 선다고. 이번 사극만큼은 제대로 한 방 터트려야 하는데...’

자신의 입지도 달린 중요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시기에 낙하산이라니, 그것도 고작 웹드라마 2개 한 문창과 학부생이라니!

“본부장님도 미치지 않고서야 이게 말이 되냐고...”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길어진다.

그런데 그 순간, 후배 피디가 외친다.

“권서준 작가 도착했답니다.”

***

미니시리즈 첫 기획 회의.

그동안 생각해온 아이템을 늘어놓는 시기였다.

간단한 통성명을 끝으로 본격적으로 회의에 들어간다.

“나머지야 차차 알면 될 거 같고, 그래서 기획안은 좀 준비했습니까?”

진영민 CP가 먼저 물었다.

몸은 이미 사선으로 살짝 틀어진 상태.

못마땅한 마음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사극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네, 근데 가능은 하신가요?”

“뭐, 한번 해보죠.”

권서준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 태도에 오히려 진 CP의 표정이 굳어진다.

“작가님, 이게 학과 과제랑은 좀 다른 겁니다. 작가님 대답에 따라 백억이 넘는 돈이 휘청거린다고요.”

“알고 있습니다.”

“하, 그래서 생각해둔 건 있어요?”

“네, 오는 길에 잠시 생각해둔 건 있습니다.”

“오늘... 길에요?”

“네.”

들을수록 기가 막혔다.

미니시리즈의 경우 아이디어 구상만 반년, 아니 1년 넘게 하는 작가도 많았다.

사극이면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오늘 길에 잠시 생각해둔 게 있다고?

“아... 오시는 길에 막 영감이 미친 듯이 떠오르셨나 봐요? 그래서 그걸 하겠다고요? 하, 그걸 다시 정리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그러나 촬영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네 달도 남지 않았다. 아니, 캐스팅과 촬영지 섭외까지 하려면 3개월 남짓한 시간뿐이 없었다.

혹시나 했던 기대감이 사라지면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래, 낙하산이 괜히 낙하산이겠어?’

허탈한 미소와 함께 진영민 CP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권서준이 입을 열었다.

“한번 보여드릴까요?”

“...뭘 보여준단 말이죠?”

“기획안이요. 원하시는 게 그거 아닌가요?”

“...”

순간 진영민 CP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방금 전엔 오늘 길에 떠올린 아이디어라고 하더니 보여준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일까?

권서준은 가지고 온 수첩을 꺼냈다.

그 안엔 오는 길에 급히 작성한 듯한 메모가 적혀있었다.

“먼저 이옥 선생님에 대해 설명해 드리자면 정조 시대 때의 문인으로...”

권서준은 기록해둔 메모에 이것저것 설명을 이어갔다.

진영민 CP는 그런 권서준을 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평생 이렇게 허접한 기획 회의는 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 어디까지 가나 지켜나 보자.’

팔짱을 낀 채 마지못해 들었다.

그러나 권서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이어간다.

시대적인 배경과 캐릭터, 정치적인 상황과 개인적인 입신양명에 대한 욕구. 그 모든 걸 둘러싼 정치세력의 암투까지.

사극의 필수요소가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며 이야기의 줄기가 뻗어 나간다.

게다가 캐릭터에 대한 세밀한 설정을 토대로 이야기가 점점 살이 붙더니 풍성해진다.

‘...어라?’

진영민은 어느새 집중하고 있었다.

한 번 듣기 시작하자 귀를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1시간 뒤.

어느새 진영민 CP 앞엔 기획안 한 편이 놓여있었다.

그것도 무려 24부작 미니시리즈의 개요가 담긴 기획안이었다.

“어떠세요?”

권서준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

진영민은 대답도 잊은 채 자신 앞에 놓인 메모를 들여다봤다.

‘이거... 왜 재미있지?’

믿을 수 없는 상황.

진영민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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