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45화 (45/203)

# 45. published - 출판된 (2)

45.

***

늦은 밤.

집에 돌아온 나는 제일 먼저 노트북을 펼쳤다.

‘...진심이신가요?’

내가 번역하겠다고 했을 때 되묻던 오수정 대리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물론 오 대리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번역이 장난도 아니고, 작가가 직접 번역을 하겠다니 황당한 거겠지.

못 믿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작가가 원하니까 마지못해서 허락한 거지, 번역이 이상하면 당장 번역가를 붙이려고 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영어 실력을 잘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

사실 여러 번역 중 최상의 난이도가 바로 문학 작품의 번역이었다.

‘원문의 감동을 생생하게 전하는 번역은 생각보다 쉬운 작업이 아니니까.’

우리와 문화가 다른 영미권의 경우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호칭, 단위, 전통부터 역사적, 문화적 맥락까지 고려해야 했고, 특히 한글의 깊이 있는 묘사와 표현들이 타 언어와 일대일 매칭 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처음 전생을 깨달았을 때도 가장 먼저 놀란 점도 바로 그 점이었다.

‘뭐지? 이 창조적인 표현력과 관념적 깊이는...’

한글의 위대함을 처음 느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이는 대로 읽고, 읽는 대로 쓸 수 있는 언어. 창작자의 입장에선 가장 완벽한 도구를 쥐여 준 것과 다름이 없었다.

‘덕분에 나의 영감이 한층 더 세밀하게 각성할 수 있었지.’

그런데,

그런 온갖 감각들이 집대성된 내 대본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번역가는 많을 리 없었다.

아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냐고?

수많은 원서를 보며 자연스럽게 번역을 익힌 게 바로 나의 삶이었으니까.

그때 내 나이는 고작 열한 살이었다.

라틴어, 히브리어, 그 밖의 다양한 언어들을 통해 고전을 읽고, 번역하는 게 일상이었다.

문득 그래머 스쿨을 다닐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특히 성경과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내 상상력의 원천이나 다름없었지.’

그때 내가 받았던 감동처럼, 내 글 역시 그들의 문화 속에 전달하고 싶었다.

작가가 가지는 가장 근원적인 욕망.

나는 원고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번역에서 가장 기본적인 건 바로 ‘문단 번역’이었다.

문단을 나누고, 문맥의 의미를 먼저 판단한 뒤,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그렇게 연상된 이미지를 번역할 언어로 자연스럽게 묘사하는 방법이었다.

번역자가 직접 등장인물이 된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인물들의 감정과 감각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

이 과정을 통해서만이 완성도 높은 번역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과연 내 작품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to be or not to be]

햄릿의 명대사조차 ‘사느냐 죽느냐’로 번역하는 게 한국식 번역의 한계였다.

‘그래, 내가 하는 수밖에 없어.’

내 자식을 남의 손에 맡겨서 귀 잘리고, 코 잘리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버전은 다르지만 이미 영문으로 한 번 써본 기억이 있기에 나는 빠르게 작업에 들어갔다.

한국식의 감성을 벗어나 완벽히 이방인의 감성으로 다시 한번 작품에 녹아든다.

한국 시장에 맞춰 검은 머리를 연상시켰던 크리스토퍼 말로의 이미지는 이내 원래의 제 머리색인 갈색으로 달라져 있었다.

‘인물들의 목소리 질감도 놓쳐서는 안 돼...’

등장인물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귓가에 맴돈다.

마치 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처럼 생생한 삶이 날 것 그대로 떠오른다.

‘그래. 이 느낌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작품을 잘 살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나 자신.

***

며칠 뒤.

오수정 대리 앞으로 권서준의 메일이 도착했다.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내용을 확인한다.

<영문 버전 보내드립니다.>

re : 거장의숨결(영문).hwp

그런데,

제목과 첨부 파일이 어딘가 이상했다.

“응?”

순간 오 대리는 메일 제목을 잘못 읽은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봐도 첨부된 파일은 영문 버전의 대본이 맞았다.

“티, 팀장님!”

오 대리가 다급히 일어나 차 팀장을 찾는다.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그게, 지금 권 작가님이 번역본을 보내주셨는데요?”

해외 뮤지컬 제작사와의 미팅 일정을 정리하던 차 팀장이 미간을 찌푸린다.

“무슨 소리야, 금요일까지 보내준다고 했다며?”

“네, 근데 그게... 다음 주 금요일이 아니라 이번 주 금요일이었나 봐요.”

“...”

순간 차 팀장의 손길이 멈춘다.

말이 되지 않았다.

“9일도 말이 안 되는 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단 이틀 만에 번역을 완료했다고?”

“메일 내용만 보면 그렇긴 해요...”

오 대리가 슬쩍 눈치를 보며 대답한다.

그 모습을 본 차 대리가 애써 표정을 푼다.

어차피 닦달해봐야 오 대리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으니까.

더없이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제대로 된 확인이었다.

“일단, 박준태 선생님께 원고 보내 봐.”

“지금이요?”

“그래. 당장 검수해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박 선생님께 의뢰하게.”

“아, 네. 바로 보내겠습니다.”

발 빠른 업무지시에 오 대리의 행동도 빨라진다.

“하아.”

오 대리가 제자리로 돌아가자 차 팀장은 참았던 한숨을 내쉰다.

황당하다 못해 이건 화가 날 정도였다.

‘아니, 누굴 바보로 아나... 대체 어떤 수준으로 했기에 이틀 만에 보낸 거지?’

일말의 가졌던 기대감마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차 팀장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원고를 출력하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오후.

수업이 끝나고 장현웅이 달려온다.

“어이, 권 작가님!”

평소보다 한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왜 이렇게 신이 났어?”

“내가 신이 안 나겠어? 주변을 봐.”

슬쩍 고개를 돌리자 재빨리 눈빛을 피하는 애들이 보인다. 이전까지 나를 무시하던 아이들, 그러나 이제는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꿈을 꾸는 것만 같다니까. 우리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장현웅 말 대로였다.

개강하자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학교 신문사에선 인터뷰하고 싶다고 난리고, 자꾸만 밥 먹자, 술 먹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물론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 전부 거절하고 소설에 집중했다.

‘이제 한 달도 안 남았어.’

와이즈 출판사 공모전.

대한민국 대표 문예지인 ‘동창’에 실을 작품을 선정하는 공모전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등단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 매년 개최하는 신춘문예 응모.

두 번째 각 문예지 신인상을 받거나 지면에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

세 번째 문학상을 받는 방법.

최근엔 독립 출판이 유행이라 바로 출판을 통해 작가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기존의 경로를 통해 등단한 케이스를 가장 인정해주는 게 관례였다.

이번에 정영만 회장이 내게 말한 건 바로 두 번째 방법.

출판사에서 여는 공모전을 통해 등단하는 방법이었다. 와이즈 출판사의 공모전 역시 수상과 동시에 등단 작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물론 정 회장님의 평소 성정을 봤을 때 나에 대한 특혜는 절대 없을 거야.’

누구보다 순수문학의 부흥을 꿈꾸는 사람이 스스로 똥물을 뒤집어쓸 일은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안심이 된다.

‘어느 출판사보다 공정하단 뜻이니까.’

작품성만 보고 뽑는 몇 안 되는 곳이 바로 와이즈 출판사였다.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

그 어느 때보다 집중력이 필요한 시기였다.

***

며칠 뒤.

타이거 스튜디오 글로벌콘텐츠개발팀.

차 팀장은 회의실에서 번역가 박준태 선생을 기다렸다.

‘발 빠르게 부탁드려서 간신히 스케줄을 맞출 수 있었어.’

국내 최고 번역가답게 평소 적게는 4개, 많게는 10개 이상의 작품이 밀려있을 때가 많았다는데 다행이었다.

‘이틀 만에 나온 번역 퀄리티가 좋을 리 없잖아. 이런 작업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차 팀장은 자신의 업무처리가 뿌듯했다.

그 사이,

오 대리가 박준태 선생을 모셔왔다.

“이거 오랜만이네, 차 팀장.”

“오랜만에 뵙네요. 그간 안녕하셨죠?”

“나야 바쁘게 잘 지냈지.”

박준태 선생이 은테 안경을 고쳐 쓰며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조금 전까지의 푸근함은 사라지고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그런데 자네 말이야, 이 원고를 왜 나한테 보낸 거지?”

박준태가 내려놓는 건 뜻밖에도 권서준의 대본이었다.

“이번에 해외 제작사에 제안해볼 희곡인데 영문 번역이 걱정돼서요. 처음 번역을 해보는 작가라 선생님께서 검토해 주십사 부탁드릴 겸 보냈습니다.”

박준태 선생이 눈을 가늘 게 뜬 채 차 팀장을 바라본다. 그러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흠. 그렇다면 내가 오해했군.”

차 팀장은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궁금증이 인다.

“혹시,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언짢았다... 그보단 놀랐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박준태 선생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대본으로 향한다. 선문답 같은 대화에 차 팀장이 좀 더 적극적으로 질문을 한다.

“어떠셨습니까?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정말 솔직하게 되나?”

“네.”

그 말에 박준태 선생이 씁쓸하게 웃는다.

“손댈 게 전혀 없었네.”

“...네?”

“수정할 게 없었다고. 이건 이 자체로 완벽해. 내가 손을 댔다가는 오히려 본래 의미가 퇴색되고 말 거야.”

충격적인 말에 차 팀장의 눈이 커진다.

“...정말인가요?”

“그렇대도. 대체 어느 번역가의 솜씨인지 궁금할 정도군.”

놀란 차 팀장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고작 이틀 만에 번역을 한 건데... 그 정도의 퀄리티가 가능하다고요?”

“뭐라고? 이걸 이틀 만에? 그게 가능하다는 소린가?”

차 팀장보다 더 놀란 쪽은 박준태 선생이었다.

“하아... 그렇다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군. 대체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번역할 수 있는지를...”

깐깐하기로 유명한 박준태 선생마저 권서준의 번역에 혀를 내두른다.

“...”

할 말을 잃은 차 팀장이 멍하게 오 대리를 바라본다.

“...”

오 대리 역시 차 팀장을 바라본다.

둘은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

늦은 오후.

오 대리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보내주신 버전으로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대답은 짧고 명료했다.

내가 보낸 버전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었다.

<추신>

박준태 선생님께서도 인정하신 번역이었습니다. 정말 최고십니다. :D

‘좋군.’

오 대리의 경쾌하고 군더더기 없는 일 처리가 마음에 들었다. 큰 회사와 일할 땐 갑질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타이거 스튜디오의 경우 그런 일이 드물었다.

‘이게 다 창업주인 조 회장의 경영 마인드 때문이지.’

조예슬의 할아버지이자 일성 그룹의 회장.

각종 콘텐츠와 문화 사업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제 소설에 집중해 볼까.’

연극 판권 판매와 미니시리즈에 대한 포석 작업까지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 이제 남은 건 소설뿐이었다.

초안은 이미 한 달 전에 나왔다.

그러나 끝없는 창작 욕구에 계속해서 수정과 연상 작업을 번갈아하는 중이었다.

단순히 등단할 작품을 원했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수준은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인간 내면을 통찰한 걸작.

수백 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뇌리에 남는 작품을 원하니까.

자연스럽게 원고로 시선을 돌린다.

제목 : 미정.

칠십 평생을 권력욕에 사로잡혀 가족도, 사랑도, 인간성마저 내던진 채 욕망의 화신이 되어버린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직 제목조차 짓지 못한 이야기.

소설 속 주인공은 많은 부분이 나의 전생과 닮아있었다.

괴롭고,

끔찍하며,

후회로 가득 찬 전생의 삶.

외면하고만 싶은 진실이 자꾸만 나를 향해 손짓한다.

내 상처를,

내 후회를,

내 아픔을,

곱씹어 들여다보라고 유혹한다.

악마의 유혹이 이보다 떨쳐내기 힘들까.

나는 결국 그 고통 속으로 다시 한번 걸음을 옮긴다.

아둔해서가 아니었다.

견딜만한 고통이어서도 아니었다.

이야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것이 나의 운명이기에 그저 묵묵히 다가갈 뿐이었다.

그래.

단 하나의 글을 위해 자기 자신의 상처마저 팔아먹는, 나는 작가였다.

침묵이 잠식한 작은 방안.

나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아픔을 곱씹으며, 어느새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상처를 더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