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44화 (44/203)

# 44. published - 출판된 (1)

44.

***

연극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거장의 숨결, 10주 연속 전석 매진]

[얼어붙은 연극계에 때아닌 훈풍이 분다]

[권서준 작가의 ‘거장의 숨결’ 새 지평을 열다...]

[실존 인물 크리스토퍼 말로를 주연으로 앞세운 최초의 연극...]

지난 23일 개막한 오늘 극단의 ‘거장의 숨결’(연출 서미연, 극본 권서준)이 연일 이슈다. 문턱이 높은 연극, 2시간 반에 이르는 긴 공연 시간으로 부진을 예상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현재 10주 연속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1500년대 말, 영국 연극계를 뒤흔들었던 천재 크리스토퍼 말로에 대한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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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무대는 그 시대의 런던을 고스란히 옮겨왔다. 크리스토퍼 말로를 맡은 배우 이경민뿐만 아니라 무대에 오르는 모든 조연들의 살아있는 연기로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관객들은 혼란한 시기의 런던에서 천재 작가가 겪는 불안과 공포를 함께 겪게 된다.

언론뿐만 아니라 몇몇 공연 전문 유브튜버들이 올린 리뷰 영상 역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이 연극이 감동적인 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적나라하게 표현한다는 점이에요.”

“맞아요. 무신론자인 크리스토퍼 말로가 삶의 끝자락에 이르자 신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요구하잖아요.”

“그뿐만이 아니죠. 냉혹한 현실 속에서 위기에 처한 인물들은 끊임없이 신음과 비명을 토해내고, 또 위선과 위악으로 가득 차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요. 그래서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사실과 조우하죠.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 무거운 진실 앞에서 작품의 여운은 꽤나 길게 이어지고요.”

작품성과 상업성 모두 만족스러운 리뷰.

영화나 드라마처럼 폭발적인 이슈가 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공연 중인지도 모르는 대다수의 연극에 비하면 엄청난 반응이었다.

게다가 주력 일간지에 빼곡히 들어찬 기사 제목을 보자 나도 모르게 미소 지어진다.

‘내 새끼가 칭찬받는 건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일이니까.’

특히 연극계 원로들 사이에서까지 평가가 좋아 장기 흥행이 예상되는 상태였다.

“러닝 개런티가... 만 명당 2천만 원이라고 했었나?”

장현웅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박...”

장현웅이 입을 다물지 못한다.

놀랄 만도 하지. 계약 조건 하나로 자그마치 6천을 벌었으니까.

김재용 대표가 최초 제시했던 계약금 3천만 원은 이미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는 공연의 흐름상 관객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입소문이 돌면 연극 마니아들의 특성상 재관람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 게 분명했다.

말 그대로 돈이 제 발로 들어오는 상황.

이제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이런 걸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고 하는 거지?’

물론 기쁜 소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최근엔 뮤지컬 쪽에서도 판권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는 소식이 들린다.

덕분에 타이거 스튜디오와 판권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작가님, 판권 관련 조율을 마쳤습니다. 이번 주말에 최종 계약서에 서명할 예정입니다.]

오수정 대리의 연락.

또 한 번의 큰 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19시 20분.

대학로로 유명한 동숭로 뒤편 주차장에 고급 밴 한 대가 멈춘다.

“안 늦었죠?”

다급히 시간을 확인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신하율이었다. 최근 단막과 독립 영화 출연, 그리고 최근 찍은 로맨스 영화로 한껏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하아. 하율아, 이거 꼭 봐야겠어?”

주차를 마친 성도윤 팀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묻는다.

“당연하죠. 이건 꼭 봐야 한다니까요?”

“아니, 그 작가 작품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너 이틀 연속 촬영하느라 밤을 꼴딱 새웠어. 이럴 때 한두 시간이라도 자는 게 낫지 않아?”

“안 돼요. 꼭 봐야 해요. 제가 얼마나 오늘을 기다렸는데.”

“그거야 잘 알지. 여배우가 촬영 마치고 분장도 안 지우고 이렇게 달려온 걸 보면... 하아.”

성 팀장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안전벨트를 푼 신하율이 먼저 차에서 내린다.

“팀장님, 저 믿고 한 번 봐보시라니까요? 보면 제가 왜 이러는지 아실 테니까.”

신하율의 말에도 성 팀장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말린다고 들을 애도 아니고, 그렇다고 담당 배우를 혼자 공연장에 보낼 수도 없었다.

결국 성 팀장이 마지못해 밴에서 내린다.

혹시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니가 하도 권 작가 노래를 부르니까 보긴 하겠지만, 난 애초에 연극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라고.”

“알겠어요. 자, 불평은 이제 그만하시고 들어가시죠.”

거구의 성 팀장이 재촉하는 신하율의 등쌀에 못 이겨 공연장 안으로 들어간다.

기대감 없는 성 팀장과 달리 신하율의 눈빛은 이미 반짝반짝해진 상태.

‘어떤 작품일까...’

바쁜 촬영 스케줄 탓에 두 달 동안 참아온 연극이었다. 혹시나 스포일러 당할까 봐 최대한 기사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 상태.

후우.

신하율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힌다.

때마침 조명이 꺼지고, 무대 위로 어느새 막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확히 두 시간 삼십 분 뒤...

객석 사이에서 한 사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도 190이 넘는 거구의 남자가 아이처럼 애달피 우는 소리, 아니 그건 통곡에 가까웠다.

***

화요일 오후.

나는 타이거 스튜디오 관계자들과 미팅을 위해 오늘 극단 사무실로 향했다.

지이잉.

막 건물 앞에 도착하자 진동이 울린다.

신하율이었다.

-작가님, 연극 잘 봤어요! 진짜 대박이던데요?

잔뜩 올라간 신하율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기분 좋게 전해진다.

엄청 바쁘다고 들었는데 시간을 냈다니 기특했다.

“고맙네요. 스케줄 많을 텐데 시간도 내주고.”

-당연히 내야죠. 정말 너무 좋았어요. 크리스토퍼 말로가 분노에 치밀어서 쏟아내는 그 대사는 정말.... 하아.

말투만 들어도 진한 여운이 느껴진다.

이럴 땐 작가로서 큰 보람을 느낄 수밖에 없지.

-조연 하나하나까지 살아있는데, 정말 감탄만 나오더라고요.

이러다가 작품 대사를 다 읊을 기세였다. 미팅 시간이 다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통화를 마무리해야 했다.

“저도 신하율 씨 작품 잘 보고 있어요. 연기가 많이 늘었더라고요.”

-저, 정말요? 제 작품을 보셨어요?

“네, 감정 전달이 특히 좋아서 인상 깊었어요.”

-하아... 감사합니다. 저,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거든요.

신하율의 말 그대로 노력이 보이는 작품이었다.

대사 하나, 씬 하나조차 몰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관객에게까지 전해질 정도였으니까.

“나중에 작품 한 번 같이해요.”

-정말요? 저야 불러만 주시면 오토콜이죠.

“그래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 같네요.”

내 말과 동시에 신하율의 목소리가 다급해진다.

-헐, 설마 지금 준비 중인 작품 있으신 거예요? 미니인가요? 아니면 영화?

빨라진 말투 속에서 간절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일부로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 죄송해요. 지금 진행 중이신 거죠?

눈치 빠른 신하율이 내 의도를 알아챈다.

“네,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꼭 같이해요.”

-하아,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알겠습니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오늘도 최선을 다할게요.

좋은 자세.

인기배우가 됐음에도 여전히 열정이 보인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나는 전화를 끊고 건물 안으로 향했다.

***

타이거 스튜디오와의 최종 계약 미팅.

회의실엔 그동안 계약 내용을 조율했던 오수정 대리와 함께 또 한 명의 중년 남성이 참석했다.

“안녕하세요. 글로벌콘텐츠개발팀의 팀장 차동혁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네요.”

간단한 인사를 하자 오 대리가 자연스럽게 설명을 덧붙인다.

“저희 측에선 한국 포맷의 해외 진출 작품을 여기 계신 차 팀장님이 주로 담당하시거든요. 그동안 궁금하셨던 부분들, 편하게 물어보시면 될 겁니다.”

우리 쪽에선 김재용 대표와 서미연 감독, 그리고 내가 참석했다.

“자세한 내용은 미리 합의된 내용이라 빠르게 진행하겠습니다.”

타이거 스튜디오의 적극적인 접촉을 통해 현재 구두로 합의한 상태였다.

아직 공연 중인 작품이기에 국내 판권을 제외한 해외 판권만 파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판권 판매금액은 5억.

해외 판권 판매 시 얻어지는 금액의 15%를 추가로 받는 것으로 최종 계약서에 서명했다.

현재 나한테 보장된 판권료 인세는 무려 10%. 만족스러운 비율이었다.

“감사합니다. 최근 침체된 연극계에 좋은 선례가 될 것 같네요.”

김 대표가 환하게 웃으며 덕담을 건넨다. 사실 김 대표의 말엔 과장이 없었다.

관객 유인책으로 과도한 가격 할인 경쟁을 벌인 끝에 연극계는 불황에 허덕이는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신작의 판권이 팔렸다는 건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곳에 집중했다.

거액의 판권료를 지불하면서까지 해외 판권을 구매한 거 보면 아마도 해외 시장을 노리는 게 분명했다.

‘가장 적합한 형식은 뮤지컬이 되겠지.’

이슈 되면서 동시에 거액의 판권료가 오가는 시장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가장 필요한 건 바로 번역이었다.

“혹시 브로드웨이나 영국 쪽 시장을 노리시나요?”

내 질문에 오 대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이미 몇몇 해외 뮤지컬 제작사들과 접촉하고 있거든요.”

역시 콘텐츠 거대기업답게 추진력이 대단했다.

“그럼 번역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박준태 선생님 아시죠? 그분한테 의뢰해서 최대한 원작을 살려서 번역할 테니까요.”

박준태 선생이라면 수십 편의 영화를 번역한 유명 번역가였다. 물론 소설 번역에 있어서도 국내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실력가였다.

그러나...

내 기준에선 조금 아쉬웠다.

‘과연 내가 의도한 내용을 다 살릴 수 있을까?’

생각보다 답은 빠르게 나왔다.

[아니오]

그렇다면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었다.

“저,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필요한 게 혹시 있으신가요?”

“그 번역, 제가 해보고 싶네요.”

“...네?”

오 대리는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묻는다.

“대본 번역, 제가 하겠습니다.”

조금 더 분명해진 대답에 오 대리의 눈빛도 진지해진다.

“...진심이신가요?”

나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네.”

***

“하아, 미치겠네.”

사무실로 돌아온 차 팀장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갑작스러운 권서준 작가의 요청 때문이었다.

“네, 팀장님. 네, 네. 아... 그래요? 네, 일단 알겠습니다.”

오 대리가 전화를 끊자 차 팀장이 다급히 묻는다.

“조예슬 팀장은 뭐래?”

“그게... 오히려 놀라시는데요? 권 작가님이 원래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시라고...”

“뭐? 아니 그럼 대체 무슨 깡이야?”

“혹시 아는 번역가가 있는 거 아닐까요?”

“그것도 말이 안 되지. 아는 번역가가 박준태 선생님보다 실력이 좋겠어? 국내 최고 번역가인데? 그리고 본인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왜 기회를 마다해?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대본 번역이 다르다는 걸 모르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권서준의 선택에 차 팀장은 거칠게 넥타이를 풀었다.

“하, 진짜 작가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니까?”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일단 기다려 봐야지. 원고는 언제까지 보내준 데?”

“금요일까지요.”

“...뭐? 언제라고?”

“금요일까지 보낸다고 권 작가님이 말씀하셨는데...”

차 팀장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게 말이 돼? 2시간 30분짜리 대본을 번역하는데, 9일밖에 안 걸린다고?”

“권 작가님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무슨 수가 있지 않을까요? 원래 가볍게 말씀하시는 분은 아니니까...”

차 팀장이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턱을 쓸어내린다.

최소 한 달.

만족스러운 퀄리티를 위해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는 게 대본 번역 작업이었다.

그런데 9일이라니.

‘대체 어쩌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업계 고인 물도 이해하기 힘든 권서준의 돌발 행동.

차 팀장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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