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43화 (43/203)

# 43. satisfying - 만족감을 주는 (5)

43.

***

“연결이라기보다는 저와 작업할 감독을 제 손으로 골랐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네요.”

내 말에 정 피디가 마른세수를 한다.

천천히 놀란 마음을 다스리더니 이내 허탈하게 한번 웃는다.

“하, 어쩐지... 저한테 갑자기 타이거 쪽에서 연락이 온 게 이상하긴 했는데....”

“어디까지나 정 피디님의 능력을 보고 결정한 거예요. 이미 세 작품이나 연달아 히트 치셨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이제 나오셔야죠. 피디님 같은 창의적인 사람은 소담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

잠시 나를 바라보던 정 피디가 고개를 젓는다.

“맞아요. 안 그래도 계속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전 대본이 살아야 배우가 살고, 배우가 살아야 연출이 살고, 연출이 살아야 작품이 산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표님은 너무 돈만 밝힌다니까요? 돈 좇다가 작품 망하면 오히려 손해 보는 건데, 그 생각을 아예 안 하더라고요.”

정 피디의 지론은 나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부족한 부분은 서로 메우고 때론 도움을 주며 완벽한 삼각형을 이뤄야 대박 작품이 나올 수 있으니까.

이번 웹드라마도 그런 작품 중 하나였고.

“그래서 피디님을 선택한 거예요. 제 작품을 누구보다 소중하게 찍어주실 테니까요.”

정 피디의 얼굴에 들뜬 기대감이 비친다.

그러나 이내 다시 그늘이 드리운다.

“정말 감사해요. 근데...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작가님한테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되네요.”

기대감이 큰 만큼 두려움도 크게 느끼는 눈치였다.

내 머릿속에 적당한 위로가 떠오른다.

“그런 말이 있어요. It is not in the stars to hold our destiny but in ourselves.”

유창한 영국식 발음에 놀란 듯 정 피디가 눈을 크게 뜬다.

그 반응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내 말의 의미를 전달하는 게 더 중요했다.

“운명은 별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하는 것이다. 제가 좋아하는 대사 중 하나예요. 셰익스피어의 명대사 중 한 구절이죠.”

가만히 듣고 있던 정 피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모든 건 제 선택에 달렸다는 뜻이군요?”

“네, 내가 선택하고, 후회 없이 달려가면 그뿐이죠.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정 피디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다.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님이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조금 놓이네요.”

“정 피디님은 충분히 잘하실 거예요. 제가 이미 경험해봤잖아요.”

내 말에 미소를 짓던 정 피디가 이내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후아. 그럼 저 열심히 노력할게요. 내로라하는 감독 못지않게 진짜 열심히 찍어볼게요.”

야무지게 다문 입술에서 정 피디의 의지가 느껴진다. 언제 봐도 저 열정은 참 보기 좋았다.

‘이 정도면 걱정 없겠어.’

3개월.

내가 미니시리즈 팀에 합류하기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물론 나는 그 시간마저 허투루 보낼 생각이 없었다.

‘3개월이면 정 피디가 미니시리즈 B팀 감독으로 경험을 쌓기에 충분한 기간이니까.’

이미 이 부분에 대해선 오 대리와도 얘기가 된 상태였다. 마침 결원이 생긴 미니시리즈에 곧바로 투입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동안 충분히 경험치를 쌓아야 해.’

내 대본에 어울리는 연출력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정 피디의 자질이라면 충분했다.

자연스럽게 석 달 뒤 포석(布石)도 마련된 상태. 미니시리즈에 대한 교통정리도 마무리가 되었다.

이제 내가 집중해야 할 목표는 단 하나.

‘자, 그럼 이제부터 달려볼까?’

고민 없이 소설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오랜만의 장편소설이라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오후.

타이거 스튜디오 기획팀.

조예슬은 며칠째 같은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왜 갑자기 생뚱맞게 피디를 붙여달라는 걸까?’

권서준의 특이한 요구 때문이었다.

원고료를 올려달라거나, 작업실을 마련해달라는 식의 요청은 많이 들어봤어도 신인 작가가 피디를 고르겠다고 요청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은 경력 감독을 원하는데, 오히려 신입 피디를 붙여달라고 했단 말이지...’

사실 신입 작가가 경력 감독을 원하는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본인도 이 바닥을 잘 모르는데 감독마저 초짜면 작품이 산으로 가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니까.

이럴 경우 오히려 감독 쪽에서 거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권서준은 당당하게 자신이 원하는 감독을 요청했다.

그것도 이 바닥에선 초짜나 다름없는 웹드라마 출신의 피디를.

‘대체 무슨 생각일까?’

아무리 고민해도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자신감인지, 아니면 오만인지는 지켜봐야만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일단은 잡아야 해.’

조예슬은 다급했다.

다른 건 몰라도 연극과 웹드라마를 통해 보여준 모습은 미니시리즈에 대한 기대감도 자연스럽게 높였다.

‘이 감각과 장르에 최적화된 상업성은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야.’

그리고 지금, 조예슬은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 피디를 잡아야 권서준을 잡을 수 있는 상황.

‘왜 이렇게 늦는 거지?’

오전에 정 피디를 만나러 간 오수정 대리가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덕분에 조금 긴장한 상태로 미팅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오 대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요?”

조예슬은 벌떡 일어나 묻는다.

바짝 굳어있던 오 대리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진다.

“하겠답니다! 지금 막 계약하고 오는 길이에요.”

“하아, 다행이네요. 정말 수고했어요, 오 대리.”

“근데, 그 인사는 제가 받을 게 아닌 거 같은데요?”

“그게 무슨 소리죠?”

“갔더니 이미 정 피디는 이직하기로 마음먹고 나왔더라고요. 저를 만나기 전에 권서준 작가님을 만났대요.”

“서준 오...”

하마터면 오빠 호칭을 부를 뻔했다.

간신히 뒷말을 삼킨 조예슬이 얼른 말을 바꿔 말을 잇는다.

“권서준 작가님을요?”

“네, 권서준 작가님이 직접 설득하신 모양이에요. 저희가 그렇게 만나도 고민하시던 분이 완전히 달라져서 나왔더라고요.”

조예슬은 믿을 수가 없었다.

1차 미팅 때, 자신도 직접 만나봐서 정 피디의 태도는 알고 있었다.

좀처럼 주저하는 모습에 설득한 틈이 보이지 않았었는데...

“정말로 권 작가님이 정 피디를 설득했다는 거죠?”

“네, 저한테 열심히 할 테니까 잘 부탁하겠다는 말까지 하시던데요?”

“하...”

조예슬은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내뱉고 말았다.

이번에도 권서준이었다.

웹드라마의 흥행도, 연극의 흥행도, 그리고 차기작 미니시리즈에 대한 준비마저 권서준은 스스로 해결하고 있었다.

‘그것도 인맥도 없이,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해낸 거야...’

이 바닥의 흐름을 잘 아는 조예슬이기에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완전 딴사람이 됐어...’

지켜볼수록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 변화는 자연스럽게 권서준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이게 고작 시작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직도 다 보여주지 않은 느낌이랄까?’

한 장르에서 성공하면 그 안에서 더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가 많은데, 권서준은 그저 자신의 길을 갈 뿐이었다.

들뜬 기색도 없이 차분한 행보.

단계를 밟아가는 그의 걸음이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큰 게 올 거야...’

대한민국의 방송계와 연극계를 바꿔놓을 거대한 움직임.

그 시작점이 권서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건 확신이었다.

***

열흘 뒤.

타이거 스튜디오로 이직한 정 피디에게서 연락이 왔다.

[작가님! 저 이번에 「행복한 집」 B팀 감독으로 들어가기로 했어요!]

「행복한 집」

전체적인 스토리는 완벽한 가정을 꿈꿨던 주부가 어느 날 집 마당에 묻혀 있는 시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자상하기만 했던 남편의 진면목을 알아가는 스릴러물이었다.

타이거 스튜디오에서 이번 하반기를 위해 각 잡고 제작한 장르물로 스릴러물의 대모라 불리는 고순애 작가와 그녀의 단짝 차명현 감독이 힘을 합친 작품이었다.

정 피디 입장에선 작업을 같이하기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 노하우를 쌓을 좋은 기회였다.

‘그만큼 정 피디에게까지 올 수 없는 기회이기도 하지.’

그런데도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조예슬 때문이었다.

일성 그룹 회장의 손녀이자 기획팀장인 조예슬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내 입장에선 아주 흡족한 흐름이었다.

나머지 부분에서도 타이거 스튜디오의 일 처리는 깔끔했다.

계약 조건에 대한 세부 합의는 오 대리와 했지만 그걸 승인하고 실질적으로 적용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조예슬이었으니까.

기특했다.

다만, 지금은 일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우리의 묵은 감정은 나중에 풀어도 늦지 않으니까.

***

그 뒤로 시간은 참 빠르게도 흘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개강이 코앞이었다.

‘그래도 이번 방학은 많은 걸 했어.’

연극 「거장의 숨결」이 무대에 오르고, 타이거 스튜디오와의 차기 작품을 계약했다.

이제 남은 건 와이즈 출판사의 공모전에 맞춰 소설을 완성하는 일뿐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어려울 건 없었다.

내 안에서 자꾸만 커져가는 감각들에 몰입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시간이 문제지.’

언제나 완벽을 추구하는 이 성격이 문제였다. 더욱 세밀하고, 보다 날카로운 감각을 전달하기 위해 단어 하나하나, 조사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주변과의 연락도 끊은 채 매일같이 탈진과 숙면을 반복하는 일상.

그리고 드디어 개강 날이 되었다.

쏜살같이 지나간 방학에 장현웅이 보자마자 앓는 소리를 한다.

“하아, 어떻게 벌써 개강이지? 이게 말이 돼? 누군가 내 시간을 훔쳐 간 거 아닐까?”

“응, 아니야.”

“냉정한 놈. 글 쓴다는 놈이 친구 위로할 줄도 모르고...”

흘겨보던 장현웅이 용건이 있는 듯 넌지시 운을 띄운다.

“이따 수업 끝나고 뭐해?”

“왜?”

“개강도 했는데 술 한잔해야지. 형이 방학 내내 학원 다니느라 돈이 없거든? 오늘은 우리 권 작가님한테 술 좀 얻어먹자. 용돈 받으면 내가 거하게 쏠게.”

집필에 집중하느라 연락을 통 못했는데 녀석도 나름 열심히 산 모양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번 달 용돈이 간당간당한 상태였다.

솔직히 그동안은 집필만 하다 보니 크게 돈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미안하지만 시간도, 돈도 없다.”

“이야, 이것 봐 있는 놈이 더 하다니까?”

“집 계약할 때 다 끌어 써서 없어.”

“뭐? 근데 그건 연극 계약하기 전에 일이었잖아. 희곡 계약금은?”

“그건 전액 러닝개런티로 했거든.”

“뭐, 뭐?”

놀란 장현웅이 말을 더듬는다.

“왜 이렇게 놀라?”

“아니, 계약금을 한 푼도 안 받았다는데 안 놀라? 안 그래도 요즘 연극 시장 별로잖아? 솔직히 희곡 쪽은 문창과 내에서도 지원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고. 그런데 전액 러닝개런티라니 너무 위험한 도박 아니야?”

장현웅의 표정에서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진다. 그러나 굳이 설명하기엔 귀찮았다.

그러자 장현웅이 휴대폰을 꺼내며 다급히 묻는다.

“말해봐. 그 작품 제목이 뭐였지?”

“거장의 숨결.”

“맞다, 거장의 숨결. 하여튼 넌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안 되겠어, 앞으론 내가 매니저처럼 계약 조건을 체크해주던지 해야지, 어휴.”

장현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인터넷을 검색한다.

“거장의 숨결... 거장의 숨결, 어. 여기 있네. 응?”

장현웅이 눈을 가늘게 뜬 채 휴대폰 화면에 집중한다. 그리고는 고개가 천천히 한쪽으로 기운다.

“서준아, 그 작품이... 거장의 숨결 맞아?”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

“...”

장현웅은 다시 고개를 돌려 화면을 바라본다. 이제는 거의 휴대폰 안으로 들어갈 기세였다.

“왜 그래?”

내가 묻자 장현웅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본다.

“야, 야... 서준아?”

“왜?”

“너 말이야... 러닝개런티로 했다고 했지? 그거 어느 정도 비율로 한 거야?”

“만 명당 2천만 원.”

“만 명당... 2천... 만 원?”

“대체 왜 그러는데?”

“...니, 니가 직접 봐봐.”

장현웅은 설명 대신 내 눈앞에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작은 액정 화면엔 연극 제목으로 검색된 기사들이 보였다.

비슷한 제목으로 길게 이어진 기사들.

몇몇 기사들의 본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서울 3개관.

부산, 대전, 광주 각각 1개관씩.

총 6개관에서 펼쳐진 연극 「거장의 숨결」은 벌써 10주째 매진을 기록 중.

그리고 2개월 동안의 관람객 수는 무려 3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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