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satisfying - 만족감을 주는 (1)
39.
***
늦은 밤.
공연이 끝나고, 나는 홀로 한강을 찾았다.
천천히 강변을 거닐며 오늘의 일을 되뇐다.
관객도 울고,
서미연 감독도 울고,
하다못해 최민준까지 울었다.
‘울지 말라더니, 본인이 울었네.’
부끄러운 듯 서둘러 공연장을 벗어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래.
오늘 하루 세상이 울었다.
내가 기대했던 결과.
자연스럽게 옛 기억이 떠오른다.
햄릿의 초연이 있던 그 날.
리처드 버비지가 햄릿을 연기하던 모습.
‘하늘이 용서하리. 나 그대를 따르리라. 호레이쇼, 난 죽는다. 딱한 어머니여, 안녕히... ’
오필리아가 죽고, 햄릿도 죽고,
숙부와 어머니마저 모두 죽었을 때.
연극을 보던 런던 시민들은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였다.
지금이야 결말을 알고, 애초에 비극이라는 걸 알고 보지만 그때 당시엔 아무 정보도 없이 그 장면을 눈으로 본 거라 지금과 충격의 크기가 달랐다.
울음바다가 된 객석.
귀족 부인의 손수건은 눈물로 흠뻑 젖었고, 흐느끼는 소녀들의 울음소리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한참을 이어졌다.
짜릿했던 그 순간이 다시금 떠오른다.
‘역시, 이 맛에 대본을 쓴다니까.’
나는 그 시절의 감동을 음미하며 천천히 강변을 따라 걷는다.
짜릿한 첫걸음.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전생에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
상상 속 도서관에 담아놓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연까지.
숨이 붙어있는 한 나는 끝없이, 끝없이 써나갈 테니까.
‘물론 자네 몫까지 말이야.’
템즈 강변을 걸으며 동갑내기 친구와 밤새 나눴던 대화들이 떠오른다.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른 채 토론했던 그 시간들.
잊을 수 없는 친구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밤하늘을 향해 캔 맥주를 들었다.
‘부디 이 작품이, 자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기를...’
벗을 기리며 맥주를 마신다.
시원한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고.
따끔거리면서도 청량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맥주 한 모금에 이내 사그라지는 한여름 밤의 더위.
그래.
행복이란 그리 큰 게 아니었다.
***
이른 아침.
출근한 조예슬은 모닝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커피 한잔과 함께 그날의 일과를 쭉 살펴보는 시간. 어릴 때부터 봐온 할아버지의 습관이었다.
“하아.”
그런데 오늘따라 집중이 되지 않는다. 자꾸만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애꿎은 입술만 곱씹었다.
어제 만난 권서준 때문이었다.
희곡을 썼다기에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달려갔는데, 걱정했던 게 의미 없을 정도로 작품이 좋았다.
아니, 단순히 좋았다는 표현으로 다 담지 못할 만큼 애잔한 감동에 그만 눈물을 참지 못했다.
한번 흐른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고, 오히려 참을수록 더욱더 격하게 차올랐다.
결국 공연이 끝나자마자 급히 화장실을 찾았는데, 나오는 길에 그만 권서준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말았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절로 눈이 질끈 감기는 상황.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조예슬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물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웹드라마에 대한 얘기만 간신히 물었을 뿐 정작 이번 공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도 못했다.
그저 도망치듯 공연장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왜 그렇게 당황한 거야...’
다시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의 성격, 평소 모습과는 너무 다른 반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언제부턴가 권서준 앞에만 서면 페이스를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확히 그때부터였다.
‘전과한다는 소식에 달려갔던 그날이었어...’
달라진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 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당황하는 자신과 달리 권서준은 진중했으며 여유가 넘쳐 보였다.
‘게다가 어제 그 말투는 또 뭔데?’
분명 ‘고맙다’는 평범한 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그 말투에 몇 번이나 말문이 막혔는지 몰랐다.
“하아.”
조예슬은 한숨을 내쉬며 이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잡으려는 간절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오히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맞아. 어느 정도는 우리 얘기가 담겼지.’
웹드라마가 우리의 이야기냐고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에 그만 포커페이스가 무너지고 말았다.
자신 혼자만 그때의 감정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기도 했고.
‘어쩌면 오빠도 마찬가지인 건가?’
그러고 보면 그 이후로 누굴 만났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없었다.
‘후...’
조예슬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뒤늦게 자신의 감정을 깨닫고는 억세게 입술을 깨문다.
아직도 권서준의 말에 흔들리는 자신이 싫었다.
‘하여튼 맘에 안 들어...’
탁.
일부러 소리 나게 파우더 팩트를 닫았다.
그때,
마침 출근한 직원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와우, 제가 일등인 줄 알았는데 언제 출근하신 거예요?”
직원의 가벼운 아침 인사.
조예슬은 어느새 조 팀장으로 바뀐다.
“좀 전에요. 참, 어제 공연은 어땠어요?”
차분한 조예슬의 질문에 직원의 눈이 커진다.
“엄청났죠. 전 잠들기 전에도 그 장면이 떠올라서 새벽에야 간신히 잠들었다니까요?”
신이 난 직원은 자신의 감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퍼 말로의 작품을 연극 무대에 올린 최초의 작품이에요.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은 작품이고요. 다만 아쉬운 건 외국 배경이라 미니 시리즈나 영화화는 좀 어려울 것 같긴 하더라고요.”
직원의 분석은 정확했다.
연극은 다른 장르에 비해 타 장르로의 확장성이 부족했다. 애초에 그 때문에 연극 무대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판권 구매는 좀 고민해보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실무자의 냉철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조예슬의 결론은 조금 달랐다.
“전 추진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정말요? 혹시 드라마나 영화 쪽 리메이크를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설정을 따와서 리메이크하는 방법은 오히려 이 작품 본연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어요.”
“그럼...”
“좀 더 멀리 보는 거죠. 아마 해외 쪽에선 충분히 수요가 있을 거 같은데요?”
순간 직원의 눈이 커진다.
“아, 영미 쪽에선 오히려 니즈가 있을 수 있겠네요?”
“그래요. 어쩌면 뮤지컬의 고장인 브로드웨이에 우리 작품이 올라갈 수도 있으니까요.”
계획대로만 되면 엄청난 화제성을 불러일으킬 게 분명했다.
[대한민국의 작품, 브로드웨이를 점령하다].
벌써부터 헤드라인 뉴스가 떠오른다.
물론 사적인 감정이 아닌, 기획팀장으로서 내린 냉철한 판단이었다.
‘나 역시 할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면 결과를 내야 하니까.’
생각이 명료해지자 선택도 빨라진다.
“그쪽과 접촉해보세요. 최대한 빨리 판권 구매를 추진해 보죠.”
“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직원이 뒤돌아 다음 지시를 기다린다.
“앞으로 권서준 작가의 차기작도 살펴보세요. 장르 불문하고 빠짐없이 보고해 주시고요.”
이것 역시 사적인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절대로...
***
며칠 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미연 감독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작가님! 작가님!
평소와 달리 상기된 목소리였다.
-혹시 통화 가능하세요?
“네. 괜찮습니다. 근데 무슨 일이시죠?”
-그게, 저희 작품 말이에요. 곧 판권이 팔릴 거 같아요.
서 감독이 들뜰만한 소식이었다.
판권 판매야말로 극단과 작가에겐 가장 좋은 열매였으니까.
물론 예상되는 곳이 한군데 있긴 했다.
“혹시, 타이거 스튜디오인가요?”
-어머, 맞아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날, 조예슬과의 만남을 통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일성 그룹의 계열사이자 콘텐츠 공장이라 불리는 그곳이 아니라면 이렇게 빨리 판권 얘기가 오갈 리 없을 테니까.
‘예슬이 센스라면 내 작품에 대한 가능성도 판단 가능할 테고.’
아무튼 아침부터 들려온 희소식에 마음이 가벼워진다.
-참, 저는 어머니가 빗길에 넘어지셔서 하루 이틀 지방에 내려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 혹시 판권 관련해서 추가 사항이 있으면 극단에서 연락이 갈 거예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다녀오세요. 일보단 가족이 중요하죠.”
-생각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럼 또 연락드릴게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보단 가족이라는 말.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가족은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
아버지도 그랬고,
우리 외할머니도 그랬다.
소중한 사람들은 언제나 내 생각보다 더 빨리 내 곁을 떠났다.
문득 지금 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엄마와 누나.
바로 우리 가족.
그래.
가족이 최우선이었다.
전생의 실수를 반복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됐다.
생각에 잠겨 걸어가는데 때마침 저 앞에 낯익은 실루엣이 보인다.
장바구니를 든 채 언덕길을 오르는 모습.
엄마였다.
나는 서둘러 다가가 엄마의 장바구니를 대신 들었다.
“엄마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뒤늦게 나를 알아본 엄마가 묻는다.
“일찍 나왔어. 가게에 손님도 없다고 해서...”
장사가 잘 안된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심각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슬쩍 장바구니 안을 살펴본다.
김장철도 아닌데 배추가 눈에 들어온다.
내 시선을 느낀 엄마가 대답한다.
“오랜만에 배추 전이나 해 먹을까 해서.”
배추전이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일정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외할머니 기일이 다음 주지?”
“어떻게 알았어?”
엄마가 놀라 묻는다.
“배추 전은 외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음식이잖아. 이쯤 되면 엄마가 늘 하는 음식이고.”
“내가 그랬었나?”
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튼 외할머니 기일도 기억하고, 기특하네?”
“아무리 바빠도 그건 챙겨야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어이고, 우리 아들 다 컸네.”
엄마가 웃으며 내 등을 두드린다.
그러나 찰나, 엄마의 미소 뒤에 숨은 슬픔이 보인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엄마에겐 여전히 아픔이었다.
***
가족을 잃은 아픔.
그것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을 알 수 없는 고통이었다.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정갈한 머리에 고운 주름.
외할머니는 정이 참 많으신 분이었다.
‘어이구, 우리 강아지. 학교 갔다 왔어?’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엄마 몰래 숨겨놓은 사탕을 꺼내 몰래 입에 물려주셨다.
그 사탕 맛이 얼마나 달콤한지 학교만 끝나면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달려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외할머니를 모신 지 5년도 되지 않아 찾아온 치매 때문이었다.
엄마는 3년 넘게 치매 걸린 외할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그러나 엄마의 마음도 모른 채 외할머니의 증상을 나날이 심해지기만 했다.
‘엄마... 제발 내 이름 한 번만 불러주라. 그러면 나도 좀 힘이 날 것 같은데...’
늦은 밤.
문틈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엄마의 흐느낌은 어린 나에게도 큰 아픔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끝내 외할머니는 의식을 차리지 못한 채 그렇게 돌아가셨다.
엄마는 아직도 그때의 상처가 남아있었다.
‘할머니...’
악몽에 잠들지 못하는 나를 위해선 밤새 등을 토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주시고는 했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그 손길,
그 목소리,
그 따스한 눈길이 아련하기만 하다.
그 시절, 할머니와의 소중한 추억들이 수없이 교차하면서 기묘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 상처, 사랑.
수많은 감정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이내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낸다.
순간 창작 욕구가 솟구친다.
‘이거, 쓰고 싶다...’
내 얘기였다.
우리 가족의 아픔이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영감들.
벌써부터 내 머릿속은 이야기로 풍성해진다.
마치 순식간에 벽을 따라 퍼지는 담쟁이 넝쿨처럼 이야기가 뻗어 나간다.
이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놀라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 영감을 담을 그릇이 떠올렸다.
‘그래, 이번엔 소설이 좋겠어. 내 상상력을 폭발적으로 쏟아낼 수 있는 소설이...’
다음 목표가 내 눈앞에 그려진다.
지이잉.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이 시간에 누구지?’
나는 들뜬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휴대폰을 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하자 조금 의외였다.
공연 당일, 온종일 찾았지만 만나지 못한 송영도 교수였다.
물론 전해 들은 소식은 더 의외였다.
-정 회장님이 널 만나고 싶어 하시는데 혹시 이번 주에 시간 되니?
송 교수에게 들은 얘기는 뜻밖이었다.
‘정 회장이라면 와이즈 출판사의 정영만 회장일 텐데.’
정영만 회장.
순수 문학계에선 거목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거물이 일면식도 없는 나를 궁금해한다는 게 의외였다.
-그날, 네 공연을 보셨거든.
뒤이은 송 교수의 대답에 내 의문은 모두 풀렸다. 아마 VIP 시사회 때 송 교수와 함께 관람한 모양이었다.
내 입장에선 당연히 기쁜 소식이었다.
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굳이 직접 보자고 했을 리가 없으니까.
업계 거물 인사를 알아두는 건 예나 지금이나 나쁠 게 없으니까.
그렇다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네, 시간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