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never ending - 끝나지 않는 (4)
38.
***
국내 최대 출판사 와이즈의 정영만 회장.
칠십이 가까운 나이였지만 왕성한 활동으로 업계에서 원로로 인정받는 작가이자 경영자였다.
평생 일궈놓은 것만으로도 여생을 즐길 수 있었지만 정 회장은 그럴 수 없었다.
‘쉬고 싶어도 믿고 맡길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하나같이 파벌 싸움이나 하고 자기 밥그릇 챙기는 데 혈안이었다.
삼십 년 전, 아니 불과 이십 년 전만 해도 순수문학은 중요 장르로써 한국 예술계의 중요한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못했다.
대중들에게 외면받은 지 오래였다.
그나마 정 회장의 기준에 드는 사람은 송영도 교수뿐이었다.
‘그래도 이 친구만큼 순수문학의 계보를 제대로 이은 사람도 없지.’
정 회장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도 어느덧 쉰 중반.
이젠 젊은 피가 필요했다.
새로운 시선으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순수문학의 흐름을 만들어낼 천재가 필요했다.
‘아니, 영웅이 필요하지.’
고여 버린 이 업계를 단번에 뒤집을만한 파격적인 영웅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이 기대됐다.
‘크리스토퍼 말로야말로 그런 천재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
공연 보다는 크리스토퍼 말로에 대한 애틋함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 작품이었다.
그래서 송영도 교수의 초대를 받고 굳이 거절하지 않은 거고.
그런데...
지켜볼수록 작품의 깊이가 심상치 않다.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사건의 발단을 알리더니 이내 앞으로 전개될 사건의 씨앗을 뿌린다.
씨앗은 이내 싹을 피우고,
천재 작가의 삶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인간으로서,
자유인으로서,
그리고 무신론자로서,
과격하면서 동시에 열정적인 그의 성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가만히 지켜보던 정 회장이 입을 연다.
“송 교수, 이 희극을 쓴 친구가 자네 제자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정 회장이 다시 고개를 돌린다.
‘고작 이십 대 친구가 이런 깊이를 가지고 있다고?’
직접 보고 있지만 믿기 힘들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그 순간, 드디어 클라이맥스로 접어든다.
“그만, 제발 그만...”
크리스토퍼 말로가 괴로운 마음에 몸을 일으킨다.
***
“하아...”
최민준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주연, 조연할 것 없이 무대를 채우는 에너지가 심상치 않다.
‘왜 이렇게 매력적인 거지?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의 연기까지 어떻게 이렇게 세밀한 걸까...’
무대 위에 오른 모든 캐릭터가 자신만의 색깔로 미쳐 날뛴다. 각자의 욕망에 맞춰 속이고 속고, 치열하게 살아간다.
살아있는 무대.
단 하나의 캐릭터도 평면적인 인물이 없었다.
자신이 본 버전과 같으면서 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전체적으로 훨씬 더 가벼워진 분위기.
극의 흐름이 쉽게 이해되지만 중심을 잡아주는 극적 장치 덕에 적절히 무게 추를 맞춘다.
‘바꿀 수 없는 세상에 좌절한 나머지 술에 취하고, 그러면서도 현실에 순응하거나 꺾이는 게 아니라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어...’
크리스토퍼 말로의 거친 성격이 스토리를 통해 이해된다. 게다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밀정이 파견됐다는 소식을 알게 되자 그 광기는 극에 다다른다.
크리스토퍼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도화선!
무대 위에 선 배우의 광기가 폭발한다.
“죽음으로 내 입을 다물게 할 생각이더냐? 오너라, 나는 굴하지 않는다. 비록 한낱 고깃덩어리가 될지라도 나는 내 뜻대로 걸을 것이니.”
걸음은 비록 술에 취해 비틀거리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독이 오른 외침이 거칠게 객석을 향해 쏟아진다.
살갗에 소름이 돋는다.
털이 비쭉 선다.
‘크리스토퍼 말로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비웃을걸?’
아까 권서준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정작 그에 대해 몰랐던 건 최민준 자신이었다.
크리스토퍼 말로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가슴을 두드린다.
신성이다, 천재다...
처음 연극계에 들어섰을 때 최민준을 향해 쏟아졌던 갈채와 칭찬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천재였으나 이단아 취급을 받은 크리스토퍼 말로의 심정이 이해된다.
왜 그가 과격했는지, 무엇이 그토록 그를 광인으로 몰아간 것인지...
그의 아픔이 곧 자신의 아픔처럼 다가온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감정...
이 느낌...
이 떨림...
최민준은 믿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일이 되어버린 연극.
그 뒤부터는 끝없는 매너리즘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순간,
뺨을 타고 무언가가 흐른다.
뒤늦게 손을 들어 뺨을 훑는다.
그것은 눈물이었다.
“...”
볼펜을 꼭 쥐고 있던 손.
공연이 시작한 지 1시간이 넘었지만, 수첩엔 단 한 글자도 적혀있지 않았다.
***
극은 점점 절정으로 치달았다.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폭주 기관차.
세상을 향해 거칠게 휘두르는 그의 펜.
술에 취한 크리스토퍼 말로가 비틀거리며 거리로 나온다.
숨어서 기다리던 밀정이 그를 향해 칼을 휘두른다. 그리고 기어코 그의 눈알에 칼을 박아버리고 만다.
그 순간,
무대 위 모든 인물이 움직임을 멈춘다.
정지된 세상 속.
천천히 움직이는 건 오로지 크리스토퍼 말로뿐이었다.
그가 천천히 객석을 향해 다가와 외친다.
그건 곧 세상을 향해 쏟아내는 고백이었다.
“정녕 내 눈에 꽂힌 것이 칼인가? 허무한 인생,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악착같이 살았단 말인가.”
죽음 앞에선 그도 한낱 연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평생을 부인했던 신의 이름을 외치다가, 이내 악마에게까지 간절한 기도를 보낸다.
삶에 대한 의지.
삶에 대한 욕망.
“제발, 신이 있다면 세상을 멈춰주시오. 아직 시간이 부족하오. 조금 더, 제발 조금만 더 내가 살 수 있게 시간을 멈춰 달란 말이오!”
이뤄질 수 없는 소망.
삶에 대한 간절함이 클수록 원망도 커져간다.
“이 사악한 존재여! 그도 안 된다면 차라리 나를 먼지처럼 사라지게 해주시오. 바람에 날리는 한낱 가루가 되어 세상이 나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해달란 말이오!”
온갖 수사법을 동원해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나 모든 희망은 사그라지고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다.
눈도 감지 못한 채 숨을 거두는 크리스토퍼 말로. 그의 육신이 차가운 무대 위로 쓰러진다.
삶에 대한 욕망이 절절했던 것만큼 그의 죽음이 더욱더 안타깝게 다가온다.
뒤이어 서신을 든 채 다급히 다가오는 어린 소년.
크리스토퍼의 작품이 여왕에게까지 인정받았다는 서신을 들고 왔지만, 그는 그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완벽한 비극.
그로 인해 천재에 대한 안타까움이 극에 다다른다.
말로의 작품 「포스터스 박사」를 오마주 한 마무리.
끝내 칼 한 자루에 스러지는 안타까운 천재의 죽음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혼신의 연기.
무대가 어두워지고, 음악이 흐른다.
객석은 더없이 고요하다.
그때,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객석에 흐른다.
“흐, 흐윽.”
진심이 담긴 배우의 연기는 그렇게 관객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 흐느낌은 이내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그 시절, 그 땅을 휩쓸었던 흑사병처럼.
잠시 뒤,
객석은 온통 눈물바다였다.
연기를 마친 배우들도 울고, 직접 연출한 서미연 감독도 눈물을 훔친다.
모두가 소맷자락을 적시고 있는 상황.
그러나 단 한 명만큼은 웃고 있었다.
***
“와아!!!”
짝짝짝짝.
함성과 휘파람 소리가 공연장 안에 울려 퍼진다.
점점 커지는 박수 소리처럼 감동과 여운의 크기도 커져만 간다.
“...”
그러나 박성규 교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놀람과 충격,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감정 때문이었다.
‘분명 지나치게 무거운 대본이었는데...’
권서준이 과제로 제출했던 대본은 까기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흠을 잡을 수 있었다.
원래 비평이란 그런 거니까.
철저하게 자기 위주로만 보면 모든 게 문제처럼 보일 수 있었다.
자신 정도 되면 충분히 그럴 능력도 있었고.
그런데...
본인이 알던 대본과 전혀 달랐다.
‘이건 어설프게 비평했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
박 교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권서준을 바라봤다.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는 권서준의 얼굴에선 조금의 들뜸도 없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네 재능이, 아니 네 그릇이 이 정도였다고?’
권서준을 바라보는 박 교수의 표정에 후회가 떠오른다.
‘조금만 빨리 알아봤다면...’
땅을 치고 후회한들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
시사회 반응은 뜨거웠다.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이 몰려온다.
“정말 잘 봤습니다.”
유명 영화배우와 직접 악수도 하고, 처음으로 출연 배우들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나는 한 사람을 찾았다. 바로 송영도 교수였다.
‘선생님은 어디 계신 거지?’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낯익은 얼굴이 다가온다.
조예슬이었다.
예상 못 한 만남.
그러나 나는 담담하게 조예슬을 바라봤다.
“...”
그러자 조예슬의 눈빛이 차가워진다.
“의외네? 모른 척할 줄 알았는데.”
의아해하는 게 당연했다.
멀리서 그림자만 보여도 피하던 게 나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피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 분이 그동안은 그렇게 피하셨다?”
조예슬이 기가 막힌 듯 입술을 깨문다.
그러다가 할 말이 있는 듯 다시 입을 연다.
“혹시 이번 웹드라마, 설마 우리 얘기야?”
“웹드라마?”
“그 썬비치 나오는 웹드라마 말이야.”
그걸 알아보다니 조금 의외였다.
어느 정도의 영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애당초 작가란 자신의 아픔과 수치마저 소재로 사용하는 족속이니까.
“맞아. 어느 정도는 우리 얘기가 담겼지.”
나는 솔직히 답했다.
그러자 조예슬의 표정이 묘해진다.
“...”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화내지도 못하는 애매한 표정.
“어떤 대답을 원했던 거야?”
“그, 그런 거 없거든? 그냥... 혹시 내 얘기면 조심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물은 거야. 덕분에 잊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랐으니까.”
순간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른다.
“내 작품을 다 봤구나?”
“...”
똑 부러지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한다.
“뭐... 일하다 보니까 자꾸 들리기에 좀 봤어. 그게 뭐 어때서?”
“고맙다고.”
“...”
순간 조예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고맙다’라는 말은 그녀가 예상한 대답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자기 생각대로 대화가 진행되지 않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내 관심은 조금 다른 곳으로 흐른다.
“그보다, 오늘 공연은 어땠어?”
평범한 질문이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매서웠다.
“왜? 내가 뭐 눈물이라도 흘렸을 까봐?”
뾰족한 말투.
그러나 조예슬의 머릿속이 읽힌다.
그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가시 같은 거였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조예슬을 바라볼 뿐이었다.
“...”
그러자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조예슬 쪽이었다.
“미안,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조예슬은 이내 도망치듯 공연장을 빠져나간다. 몸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했던 마지막 했던 말은 내 귓가에 맴돌았다.
‘왜? 내가 뭐 눈물이라도 흘렸을 까봐?’
되묻던 그녀의 말은 결코 눈물 따윈 흘릴 리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살짝 번진 눈 화장이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나는 멀어지는 조예슬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조기 졸업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벌써 일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일성 그룹의 계열사이자 국내 최대 콘텐츠 제작사인 타이거 스튜디오라니.
‘어쩌면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수도 있겠네.’
앞으로 펼쳐질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신이 만들어내는 스토리도 꽤 흥미진진한 편이니까.
***
고급 세단 안.
정 회장과 송 교수는 나란히 뒷좌석에 올랐다.
연극의 여운 때문일까.
두 사람 사이엔 한동안 대화가 없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정 회장 쪽이었다.
“송 교수, 그 친구 이름이 뭐라고 했지?”
정 회장의 질문에 송 교수가 공손히 대답한다.
“권서준입니다.”
“요즘처럼 암울한 시대에 좋은 재목이야. 혹시 소설은 좀 어떤가?”
“단편만 봤지만 재능이 있습니다. 시와 희곡을 보면 어느 정도 가능성도 보이고요.”
“그렇군. 이런 인재가 있었다니 우리에게도 아직 희망이 있나 보군.”
진심이 담긴 말에 송 교수가 고개를 끄덕여 답을 한다.
“혹시, 내가 한번 만나볼 수 있을까?”
정 회장의 물음에 송 교수가 조금 놀란 듯 쳐다본다.
“회장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떤 친구인지 궁금해서 말이야.”
“물론입니다. 서준이한테 바로 얘기해놓겠습니다.”
“고맙네. 내가 특별히 맛있는 거로 대접하지.”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긴 정 회장이 잠시 생각에 잠긴다.
작품성과 예술성.
그 안에 적절한 메시지를 담으며 대중성까지 챙긴 작품이었다.
저돌적인 메인 스토리.
그러면서 주변 인물을 통해 서사를 확장시키는 완급 조절이 예술이었다.
‘그 때문에 작품의 깊이가 한없이 깊게 느껴지는 거고.’
마치 크리스토퍼 말로와 셰익스피어가 살아있다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싶은 작품.
그토록 기다리던 영웅을 만난 기분이었다.
‘권서준이라고 했지...’
노장의 심장이 오랜만에 설렌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대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