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never ending - 끝나지 않는 (3)
37.
***
3주 뒤.
“드디어 방학이다!”
장현웅이 두 손을 번쩍 들며 괴성을 내지른다.
하긴, 그 빡빡한 문창과 학기 일정이 드디어 끝났으니 이런 반응이 나올 만도 했다.
학기가 마무리되면서 자연스럽게 공개된 1학기 성적.
다른 건 몰라도 두 과목에서의 성적이 눈부셨다.
박성규 교수의 수업은 A+
송영도 교수의 수업도 A+
내 성적을 본 장현웅이 놀란다.
“대박... 두 수업 다 A+ 받은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걸?”
난도 높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두 수업에서 당당히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박 교수가 장난 좀 칠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무대포는 아니었다.
“으아, 성적이고 나발이고 일주일 동안은 미친 듯이 잠만 자야지. 아, 맞다. 이번에 신작 RPG 나왔는데 죽인다더라.”
장현웅은 휴대폰에 깐 게임을 보여준다.
눈빛을 보니 벌써부터 영롱하다.
그러다가 뒤늦게 나를 보며 묻는다.
“너도 같이할래?”
“난 힘들 듯. 시간이 없을 거 같아.”
“왜? 뭐 하는데?”
“다음 작품 준비해야지.”
“뭐? 벌써?”
“응. 해보고 싶은 게 아직도 많으니까.”
“...”
가만히 듣고 있던 장현웅이 들고 있던 휴대폰을 조심스럽게 내린다.
“흠, 흠. 그럼 나도 학원부터 바로 알아봐야겠다. 이참에 그림체 하나 제대로 잡을 겸...”
“왜? 게임한다며?”
“야, 니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냐? 솔직히 똑같은 3학년인데 넌 벌써 작가님이고, 난 아직도 망생이고...”
말끝을 흐리던 장현웅이 제 뺨을 몇 대 두드린다.
“하, 자극받는다! 이래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나 봐.”
좀 둔하긴 하지만 아예 눈치 없는 놈은 아니었다.
나는 잠시 방학 스케줄을 그려본다.
여러 가지 계획이 떠오르지만 가장 먼저 다가오는 일정은 바로 VIP 시사회 일정이었다.
‘드디어 이번 주군.’
더 이상 내가 관여할 부분은 없었다.
‘이젠 전적으로 서 감독과 극단의 몫이지.’
연출자와 배우에게 바통을 넘겨야 하는 순간.
그러나 걱정할 건 크게 없었다.
이미 모든 루트를 내가 짜준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까.
***
“하아...”
늦은 밤.
타이거 스튜디오 본사 기획팀.
태블릿으로 웹드라마를 보고 있던 조예슬이 깊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다.
슬림한 청바지에 흰 셔츠가 전부였지만 모델 뺨치는 몸매가 유리창에 비친다.
조예슬은 다시금 손에 들린 태블릿으로 시선을 옮긴다.
「넝쿨째 굴러온 전 남친들」
권서준이 쓴 웹드라마로 대학생들 사이에선 난리가 난 작품이었다.
물론 재미있었다.
캐릭터도 살아있고, 내용도 훌륭했다.
‘가벼움과 함께 작품성까지 챙겼어...’
웹드라마 장르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웰메이드 작품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을 다 빼고도 작품만큼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예슬은 조금 다른 의미 때문에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거 설마... 우리 얘기인 건가?’
권서준의 입대 전 떠나기로 했던 여행.
그런데, 권서준은 갑자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이별을 통보했다.
그리고는 곧장 입대...
그때의 충격과 상처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웹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지금까지도 그 리조트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으니까.
‘이 오빠,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이전의 권서준이라면 당연히 그럴 리 없었지만 지금의 권서준은 뭔가 달랐다.
‘머리 잘랐네. 예쁘다.’
몇 달 전, 스치듯 했던 그 한 마디도 여전히 마음에 남아 가슴을 시큰거리게 만들었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오해하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피해 다녔지만 관심을 떨쳐내는 게 쉽지 않았다.
“하아.”
또다시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이미 끝난 사이.
의미 부여를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자꾸만 마음은 그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궁금했다.
어떤 생각으로 쓴 작품인지 꼭 확인해보고 싶었다.
“저, 팀장님. 이거 확인 좀 해주시겠어요?”
부하직원의 질문에 현실로 돌아온다.
세차게 고개를 젓고는 서류를 받았다.
그래.
지금 당장은 일이 중요했다.
현재 조예슬의 직책은 타이거 스튜디오 기획팀장.
지난학기 조기 졸업 후 일성 그룹의 계열사인 이곳에 취업한 지 2달째였다.
낙하산이었지만 잘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무능한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분이 아니니까.’
사촌들만 봐도 그랬다.
혈육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난 기회를 줄 뿐이다. 증명하는 건 네 몫이지.’
덕분에 휴일도 없이 업무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뭐죠?”
조예슬이 머리를 한 갈래로 묶고는 물었다.
“내일 진행되는 연극 VIP 시사회 일정인데, 참가하는 게 좋을까 해서요.”
연극 쪽은 다른 콘텐츠에 비해 확장성이 적었다.
“연극까지 신경 쓸 겨를 없을 거 같은데... 참석이 꼭 필요할까요?”
“그게, 이번 연극을 쓴 작가가 웹드라마 작가로 최근 유명해진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작가가 누군데요?”
“혹시, 권서준 작가 아세요?”
“...”
순간 조예슬의 눈이 커진다.
“...누구라고요?”
“권서준 작가라고 얼마 전에 웹드라마를 썼는데 기가 막혔거든요. 그래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희곡을 썼다기에 관심이 가서요.”
설마...
조예슬은 조심스럽게 작가 프로필을 확인한다.
권서준.
정말 권서준이다.
이름도, 학교도, 나이도 맞았다.
“필요 없다고 판단하시면 빼도록 하겠습니다.”
직원이 서류를 가져가려고 했다.
그러자 조예슬이 다급히 서류를 붙잡는다.
“한 번 가보죠.”
“네?”
“그렇게 유능한 작가의 작품이라면 직접 봐봐야죠. 혹시나 다른 콘텐츠로 확장할 수도 있으니까.”
초대장을 바라보는 조예슬의 눈빛이 반짝인다.
***
[거장의 숨결 VIP 시사회]
전용 극장 상단에 걸린 거대한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업계 전문가들을 대거 초대한 시사회답게 규모가 상당했다.
국내 최대 출판사 와이즈의 정영만 회장.
엔플릭스 한국 지사장 박진수.
인기 영화배우 조현성 등등.
출판, 방송, 연예계를 막론하고 거물급 인사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초대 손님으로 내 최측근이나 다름없는 엄마와 누나, 그리고 장현웅을 초대했다.
송영도 교수는 서 감독이 초대해서 다른 귀빈과 함께 시간 맞춰 도착한다고 했다.
“나 떨려. VIP 시사회라니.”
옆에 선 장현웅이 호들갑을 떤다.
시사회에 처음 온 누나와 엄마도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다.
“네가 썼다는 연극이... 이렇게 큰 공연이었어?”
엄마는 새삼 놀라며 물었다.
웹드라마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실감이 나는 표정이었다.
“극단 쪽에서 좀 더 키운 것도 있어. 자, 들어가자.”
나는 세 사람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TV에서 보던 연극배우 출신의 배우들도 보이자 세 사람은 신기한 듯 연신 두리번거린다.
그때, 저 멀리서 다가오는 박성규 교수 일행이 보인다. 특히 옆에 서 있는 키 큰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최민준 작가였다.
눈이 마주치자 최민준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니가, 권서준이었구나?”
문창과 학부 행사로 안면이 있는 사이.
내 이름은 몰랐겠지만 얼굴은 서로 알고 있었다.
나에겐 까마득한 선배.
“나 최민준이라고 해. 기억하지?”
“물론이죠. 오랜만에 뵙네요.”
“후배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고 해서 특별히 찾아왔어. 근데, 크리스토퍼 말로의 이야기로 작품을 쓸 줄은 몰랐는데...”
안타까운 척 혀를 찬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비언어적 표현.
“원래 말로는 이런 성격이 아니거든. 괴팍하고, 저돌적이고, 폭력적이지. 근데 그런 사람을 주인공으로 했다니 의아해서.”
그는 마치 말로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했다.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나보다 잘 알까 싶었지만 그건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게다가 그런 말로가 하루아침에 변화됐다면 그만한 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모르겠더라. 그러니까 몰입도 안 되고...”
작품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는 걸 보니 아마 박성규 교수에게 제출한 과제를 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쩌지?
그건 이미 예전 버전인데.
“괜찮습니다. 이건 새로운 창작물이니까요.”
내 대답에 최민준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지. 실존 인물을 배경으로 한 창작물이니까 더 신경 써야지. 크리스토퍼 말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 보면 비웃음만 살 테니까.”
물론 최민준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맞는 지적도 아니었다.
걱정하는 척하며 비꼬는 게 역시 문창과 선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작품을 잘 못 이해하신 거 같네요.”
“...뭐?”
“직접 보시고 다시 한번 얘기해주세요. 제 작품에서 부족한 게 무엇인지.”
내 말에 최민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화를 삼킨다.
“좋아, 끝나고 말해주지. 대신 내 비평은 조금 매운 편이니까 울지나 말라고, 후배님.”
표독스러운 눈빛을 한 채 최민준이 자리를 뜬다.
아무리 겁을 준들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그만큼 자신 있으니까.
“어? 작가님! 작가님, 이쪽으로 오세요.”
그때, 서미연 감독이 나를 보며 손짓한다. 바쁜 와중에도 마중을 나온 것.
“왜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혼자 찾아갈 수 있는데.”
“그래도 작가님은 제가 직접 모셔야죠. 특별히 좋은 자리로 준비했어요.”
우리는 서 감독의 안내를 받아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았다. 연극 무대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면서도 배우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자리.
모두가 착석하자 조명이 꺼진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암흑 위로 침묵이 흐른다.
잠시 뒤,
잔잔하게 흐르는 웅장한 선율.
쿵쿵쿵.
거친 걸음과 함께 배우 이경민이, 아니 크리스토퍼 말로가 무대 위로 오른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
최민준은 팔짱을 낀 채 무대를 바라본다.
박성규 교수한테 받은 권서준의 작품.
보자마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잘 썼으니까...’
학부생의 작품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작품을 곱씹을수록 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꿈틀거린다.
그래.
그건 질투심이었다.
한참 어린 후배에게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러나 한번 그의 마음을 잠식한 질투심은 끝을 모른 채 타오르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을 태워버릴 만큼 뜨겁고 매섭게 불타올랐다.
결국 고심 끝에 찾아낸 작품의 단점은 단 두 가지였다.
첫째, 크리스토퍼 말로를 미화했다는 점.
둘째, 지나치게 작품성에 치우쳤다는 점이었다.
‘작품성은 분명 중요해. 공모전이나 과제를 목적으로 한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고. 하지만 성적을 내야 하는 공연 시장에선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지.’
마치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죄와 벌」을 읽은 사람은 적은 것과 같은 논리였다.
평론가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고, 작품성 자체는 인정받을 수 있지만 흥행은 조금 어려운 작품.
‘평론가 점수는 높지만 관객 수는 처참한 그런 영화들처럼 말이지.’
듣기에는 러닝 개런티로 계약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기껏해야 만 명 채우면 잘 될 대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연극은 결코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극작가가 쓴 희곡 작품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연출이나 배우의 연기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되곤 했다.
‘아주 낱낱이 비평해 주지.’
최민준은 수첩을 펼쳤다.
깨알 같은 단점도 낱낱이 비평해줄 생각이었다.
잠시 뒤,
막이 오르고 무대에 오른 배우가 연기를 펼친다.
“누구나 그렇듯 나는 잘해보려 했소. 그 어느 작가보다 멋진 글로 세상을 행복하게 하고 싶었소.”
“그리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아니. 불편하고, 답답하고, 지겹소. 나를 억누르는 이 굴레를 이제는 끊어내고 싶소. 내 손에 들린 이 칼로...”
그런데...
공연 시작 5분 만에 최민준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 이건... 내가 봤던 그 대본이 아닌데?’
무겁고, 진중하며, 작품성에 올인한 작품이 아니었다.
가벼우면서, 깊이가 있고,
새로우면서 명작의 품격이 느껴진다.
‘이, 이게 대체...’
자신만 놀란 게 아니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박성규 교수의 표정도 자신과 마찬가지였다.
“...”
한 손으로 턱을 쥔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사이,
공연은 점점 무르익어 간다.
놀란 마음을 추스를 틈도 기다려주지 않은 채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