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36화 (36/203)

# 36. never ending - 끝나지 않는 (2)

36.

***

열흘 뒤.

어느새 에어컨이 간절해지는 계절이 찾아왔다.

서 감독은 수정 대본의 콘셉트에 맞게 극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역시 센스가 있는 사람이라 내 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렸다.

중간에 김재용 대표와의 짧은 만남도 있었다.

“이번 수정 대본, 정말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참, 생각해보니까 지난번 미팅 때 제 언행이 오해의 소지가 좀 있던 거 같더군요. 혹시나 기분 상하셨다면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립니다.”

한없이 정중한 태도.

그때와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사실 한 극단의 대표가 이렇게 작가에게 직접 사과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애초에 잔머리 쓰는 사람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뭐, 그렇다고 같이 일하는 중에 일부러 각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괜찮습니다. 그 덕에 더 큰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적당히 넘어가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었다. 물론 이번 작품 뒤에 다시 김 대표랑 같이 작업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리고 며칠 뒤.

서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시간 되시면 연습 한번 보실래요?

나는 서 감독의 초대를 받고 충무로에 위치한 오늘 극단의 연습실을 찾았다.

“대사 좀 절지 말자! 연기 하루 이틀 해?”

유리문 밖으로 서미연 감독의 목소리가 들린다. 방해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자 팔짱을 낀 채 무대를 바라보는 서 감독의 모습이 보인다.

평소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

역시 일에 집중하는 사람의 모습은 언제 봐도 멋있었다.

“이렇게 해서 다음 달에 공연 들어가겠어?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네! 죄송합니다.”

“자, 동선 한번 다시 짜보자. 대사에 힘 좀 불어넣고, 목소리도 더 키우고!”

서미연 감독의 냉철한 지시에 배우들도 기합이 바짝 들어간다.

잠시 뒤,

뒤돌아 나오던 서 감독이 뒤늦게 나를 발견한다.

“아, 언제 오셨어요? 말씀하시죠.”

“분위기가 좋아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이게 다 작가님 대본 덕분이죠. 배우들이 아주 신이 났어요.”

“다행이네요. 수정 대본이 다들 마음에 들었나 봐요?”

“들다마다요. 특히 대표님이 완전 달라지셨다니까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셔서 대본대로만 하라고 성화세요. 이건 비밀인데, 제작비나 홍보비도 역대급으로 지원해주셨어요.”

모두 달라진 대본 때문이었다.

그 안에 담긴 보편적인 대중성을 파악한 것.

“근데 가장 놀라운 건 경민 씨가 작가님 팬이 됐다니까요? 그 까칠한 사람이 말이에요.”

연극배우 이경민.

30대 후반의 나이로 성격은 좀 급하나 연극계에선 나름 유명한 사람이었다.

최근엔 안방극장에서 오퍼가 있다는 소식도 들리는 연기파 배우였다.

“솔직히 작가님 작품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가장 반대한 사람이 경민 씨였거든요. 근데 이제는 그런 말도 안 해요.”

“아, 감독님. 주연 배우 험담을 이렇게 대놓고 해도 되는 건가요?”

그때, 지나가던 이경민이 우리를 보고 웃으며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이경민입니다.”

“권서준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이번 대본, 정말 감명 깊게 읽었거든요.”

“갑자기 수정돼서 당황하셨을 텐데 좋게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작품의 퀄리티가 올라가는 일인데 배우로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죠. 수정, 정말 좋았습니다.”

짧게 인사를 나눈 이경민이 서 감독을 보며 핀잔을 준다.

“그나저나 감독님, 이미 한배를 탔는데 좋은 얘기만 좀 해주세요. 이러다가 작가님 오해 생기겠어요.”

“오해 맞아요? 처음엔 무조건 최민준 작가 작품으로 가야 한다고 했잖아요.”

능청스러운 서 감독의 농담에 이경민이 피식 웃는다.

“그때는 권 작가님 대본을 보기 전이었잖아요. 권 작가님, 이 얘기는 못 들은 거로 해주시죠?”

“물론이죠.”

“그럼 전 이만 크리스토퍼 말로로 변신 좀 하겠습니다.”

이경민이 짧은 인사와 함께 멀어진다.

잠시 뒤, 무대에 오른 이경민이 대사를 내뱉는다.

“허공에 맴도는 소리가 들리지 않소? 자유를 갈망하는, 이 멍청한 굴레를 끊어내라는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냔 말이오!”

부릅뜬 눈.

분노에 차 가늘 게 떨리는 입술.

그는 어느새 크리스토퍼 말로가 되어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들리는 이 소리에 나는 지금 미쳐버릴 것 같단 말입니다!”

성량도 엄청났다.

게다가 단순한 연습인데도 불구하고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대단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는 이경민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 연기력에, 그동안 왜 뜨지 못했을까?’

합리적인 궁금증이었다.

***

우리는 잠시 연습실을 빠져나와 커피 한잔을 마셨다.

“굉장하죠? 크리스토퍼 말로 역할은 아마 국내에서 경민 씨가 최고일 거예요.”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성격이 좀 불같긴 하지만 연기에 대한 진지함도 좋았다.

물론 연기력도 뛰어난 편이고.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아까 서 감독과 이경민이 나누던 대화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까 제 작품 전에 최민준 작가 작품을 고려했다고 하셨죠?”

“아, 그거요...”

서 감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나름 국내에선 유명한 희곡 작가니까요. 근데 사생활 문제로 시끄럽기도 하고, 이번 대본 콘셉트도 저희랑 맞지 않아서 결국 최종 선택에서 배제됐어요.”

최민준 작가라면 나도 알고 있었다.

문란한 사생활 때문에 언론에도 몇 차례 오른 인물. 몇몇 무명 여배우한테는 갑질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 학교 선배였기에 모를 수가 없지.’

지금도 간간히 교정 플래카드에 입을 올리는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박성규 교수의 애제자로 유명한 선배 중 하나였다.

자연스럽게 관심이 흐른다.

워낙 좁은 바닥이라 언젠가는 만날 사람이니까.

지이잉.

그런데 그때, 서 감독의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한 서 감독의 미간이 구겨진다.

“아,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극적인 서 감독의 반응에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동한다.

“최민준 작가님이세요?”

“하아, 네. 안 그래도 이분 때문에 요즘 좀 난처한 상황이에요. 작품을 거절했는데도 계속 연락을 하셔서...”

최근 최민준의 작품은 전성기에 비하면 퀄리티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대중성도, 예술성도 잡지 못한 채 애매한 포지션을 취할 때가 많았다.

아직도 과거에 취한 걸까?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한숨을 내쉰 서 감독은 이내 최대한 예의를 갖춰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

“하? 이 사람 봐라?”

고급 승용차를 타고 캠퍼스에 내린 남자가 거칠게 선글라스를 벗는다.

다시 한번 메시지를 확인하지만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최민준 작가님, 죄송하지만 작가님의 이번 작품은 저희 극단과 방향성이 맞지 않아 아쉽게 되었습니다. 다음번에 좋은 기회가 다시 찾아뵙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다 읽은 최민준이 헛웃음을 짓는다.

“감히 내 작품을 까? 예전엔 눈도 못 맞추던 사람이 작품 몇 개 성공했다고 이제 뵈는 게 없나 보네?”

이죽거리는 입술 사이로 독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들고 있던 다 마신 캔을 구겼다.

“이야, 민준아!”

그때, 박성규 교수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아,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얼른 표정을 정리하며 은사를 맞이한다. 그러나 단번에 표정을 알아본 박 교수가 넌지시 묻는다.

“그래. 나야 잘 지냈지.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뭐, 별거 아니에요. 그냥 서 감독이 좀 짜증 나게 해서요.”

“서 감독? 설마 서미연 감독?”

순간 목소리를 높이는 박 교수의 모습에 오히려 놀란 쪽은 최민준이었다.

“네, 왜 이렇게 놀라세요?”

“아, 그게...”

슬며시 다가온 박 교수가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춘다.

“혹시, 너도 대본 까인 거야?”

최민준의 얼굴이 확 구겨진다.

“아이, 선생님도. 제가 어디 가서 까이고 다닐 사람이에요? 그냥, 뭐 그쪽이랑 저랑 추구하는 바가 좀 안 맞았을 뿐이죠. 근데, 선생님은 그걸 어떻게 아세요?”

혀를 차던 박 교수가 슬쩍 목소리를 낮춘다.

“인마,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쪽은 이미 다른 작품 하느라 바쁘다고.”

“네? 다른 작품이요?”

순간 최민준의 미간이 구겨진다.

본인 작품 까놓고 대체 어떤 작품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설마, 페르난도 작가를 설득한 건가요?”

그렇다면 할 말이 없었다.

그 정도의 네임드 작가면 뭐 밀려도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런데..

박 교수에게서 들은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아니야. 국내 작가야. 그것도 신인.”

“에이, 설마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신인 작가에게 밀릴 급은 아니었다.

그런데 뒤이어 들은 소식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확실해. 그 작가가 바로 우리 학교 학생이거든.”

“하, 학생이요? 이런, 씨...”

순간 험한 말을 내뱉을 뻔한 최민준은 옆에 있는 박 교수를 떠올리며 간신히 참아냈다.

그만큼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페르난도도 아니고, 일개 학부생에게 자신의 작품이 밀렸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대체 얼마나 잘 썼기에 그런 건데요?”

“뭐... 나쁘진 않았어. 근데 그래 봐야 학부생이지 뭐. 안 그래?”

박 교수의 말에 최민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서 감독이 감을 완전히 잃었나보네요?”

“내 말이. 마침 언론사에서 그 작품 비평을 부탁한 게 있어서 시사회 때 한 번 가서 보려고.”

순간 최민준의 눈빛이 반짝인다.

“선생님, 혹시 그때 저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그거야 미리 말만 해두면 어렵지는 않지. 같이 갈래?”

“네, 부탁 좀 드릴게요. 대체 어떤 작품인지 직접 확인해 보게요.”

최민준은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감히 문창과 학생 작품 때문에 내 작품을 밀어내?’

작품이 별로라면 매섭게 물어뜯을 생각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가 없다고 해도 물어뜯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명작이라도 물어뜯을 구석 하나쯤은 다 있는 법이니까.’

아직은 시사회까지 시간이 남은 상황.

그러나 최민준의 머릿속엔 이미 독한 표현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며칠 뒤.

나는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며 한강 변을 산책했다.

숨을 깊이 마시며 주변을 둘러본다.

시원한 강변을 둘러싼 잔디들이 푸르다.

자연은 언제나 그렇듯 작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대상이었다.

성큼 다가온 무더위.

햇볕도 어느새 따사롭다.

‘벌써 여름이구나.’

계절은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머릿속에선 자연스럽게 다가올 두 가지 일정이 떠오른다.

첫 번째 일정은 방학이었다.

모든 대학생이 기다리는 순간.

과제에서 해방되고 오로지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두 번째 일정이 더 기대됐다.

‘아마, 첫 시사회가 다음 달이라고 했지?’

연극 「거장의 숨결」.

업계 VIP들을 대상으로 한 시사회 일정이었다.

-혹시 더 초청하고 싶은 인원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나는 호기심에 서 감독이 보낸 VIP 초청 명단을 확인했다.

그런데 명단 속에 재밌는 이름이 눈에 띈다.

-박성규 교수.

-최민준 작가.

내 작품에 가장 악감정을 가질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당연히 순수한 마음으로 올 리 없었다.

아마 비평한다는 명목으로 내 작품에 생채기를 내려고 하는 거겠지.

이전 생애도 숱하게 겪은 일이었다.

시장과 시의회가 병사를 이끌고 글로브 극장까지 쳐들어온 적도 있으니까.

“근데, 과연 비평할 게 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떳떳했다.

그리고 자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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