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never ending - 끝나지 않는 (1)
35.
***
늦은 오후.
나는 명동역 근처에 위치한 오늘 극단 사무실에서 서미연 감독을 다시 만났다.
“작가님, 정말 죄송해요. 더 빨리 확답을 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죠?”
“아닙니다. 쉬운 계약 조건은 아니었잖아요. 중간 중간에 계속 연락도 해주셨고요.”
서 감독은 그동안 계약 진행 상황에 대해서 솔직하게 연락을 해줬다.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하지만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씀하신 조건 맞춰서 갈게요.’
몇 번이나 보여준 서 감독의 의지 덕분에 나 역시 기다리는 데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그런데 계약 진행이 쉽지 않았다는 건 내가 내건 계약 조건에 반대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오늘 극단 김재용 대표겠지.’
계약 관련해서 가장 입김이 센 사람.
동시에 오늘 미팅 멤버로 갑자기 추가된 사람이었다.
“근데, 대표님은 안 오시나요?”
“아, 그게 시간을 미리 말씀드리긴 했는데... 잠시만요.”
서 감독이 난처한 얼굴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문이 열리더니 늦게 도착한 김 대표가 안으로 들어온다.
“아이고, 이거 죄송합니다. 외부 일정이 있어서 좀 늦었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김재용입니다.”
깡마른 체구에 눈빛이 매서운 남자였다.
말의 내용과 달리 표정에선 그 어떤 미안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은근히 깔아보는 느낌도 굳이 숨기지 않는 거 같고.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재밌는 사람이네.
자리에 앉은 김 대표는 별다른 말 없이 서 감독을 바라본다.
“뭐해, 서 감독? 진행하지 않고.”
자기가 늦어놓고 서 감독을 재촉한다.
결국 서 감독이 마지못해 계약 관련 미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백 마디 말보다 조건부터 확인하시는 게 낫겠죠? 일단 저희로선 최선을 다한 조건이긴 한데... 마음에 드시는지 한 번 보시겠어요?”
계약서를 내민 서 감독의 눈빛이 깊어진다.
한없이 조심스러운 모습.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누적 관객 만 명 이상일시 추가 만 명당 천만 원]
1500만 원을 덜 받는 대신 추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최근 연극 시장 동향을 보면 결코 쉬운 조건은 아니었다.
그걸 아는 서 감독이 김 대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맛을 덧붙인다.
“솔직히 만 명이라는 기준이 높긴 한데, 괜찮으실까요?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드시면 약간의 조정은 가능합니다.”
그때, 여태 말없이 듣고 있던 김 대표가 불쑥 끼어든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서 감독? 마음에 안 드시면 안 되지. 이런 조건으로 해주는 극단이 국내에 어디 있다고? 안 그렇습니까, 작가님?”
김 대표는 얼굴은 웃으면서 목소리는 지그시 깔았다.
나는 가만히 김 대표의 말투와 표정을 살폈다.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나를 바라보는 표정에선 못마땅함이 느껴진다.
말 몇 마디가 전부였지만 어떤 사람인지 자연스럽게 파악이 된다.
‘역시 내가 내건 계약 조건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거야.’
단번에 김 대표의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작가님. 솔직히 작가님도 대박 노릴 생각에 러닝 개런티 요청하신 거잖아요? 그러면 이 정도 조건은 돼야 하지 않겠어요? 안 그래요?”
표정과 말투, 자연스러운 제스처를 통해 은근히 사람을 압박하는 모양새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러나 안쓰럽게도 내 입장에선 가소롭기만 했다.
그 시절에 내가 마주했던 고위 관료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니까.
게다가 내 조건을 거부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나를 부를 이유도 없었다.
무슨 패인지 뻔히 보이는 상황.
그런데도 굳이 이를 드러내는 걸 보니 수가 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김 대표는 내가 잠시 말이 없자 마치 기죽을 줄 알았는지 더 강한 말로 밀어붙인다.
“요새 러닝 개런티로 한몫 잡고 싶은 친구들이 많은 거 같은데, 그거다 도박이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솔직히 만 명이 안 되면 계약금 외에 한 푼도 못 받는 건 알고 계신 거죠?”
일종의 기 싸움.
겁을 주려고 애쓰는 모양새가 오히려 우스웠다.
근데 이걸 어쩌나,
나는 상대가 자극하면 더 노빠꾼데.
게다가 희곡은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작업이었다.
따지고 보면 가장 자신 있는 분야.
이미 만족스러운 대본까지 나온 상태에서 상대의 도발에 콜만 할 필요는 없었다.
‘이럴 땐 오히려 배팅을 해야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조언 잘 들었습니다. 그럼 혹시 계약 조건을 다시 바꾸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내 말에 김 대표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리고는 내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거 봐요. 러닝 개런티 그거 솔직히 허울만 좋다니까요. 제작비도 못 건지는 연극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무리수를 둬요? 잘 생각하셨어요. 그럼 원래대로 3천만 원에 하시는 거죠?”
속사포처럼 밀어붙이는 김 대표.
그러나 나는 오히려 고개를 저었다.
“그 조건 말고요.”
“...”
순간, 김 대표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러면... 뭘 바꾸겠다는 겁니까?”
“계약금을 아예 안 받겠습니다.”
“...네?”
“대신 러닝 개런티를 두 배로 올리죠. 만 명 당 2천만 원. 어떠신가요?”
나는 승부수를 던졌다.
“...”
순간, 김 대표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서 감독을 번갈아 쳐다본다.
아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는 거겠지.
김 대표는 서 감독의 굳은 표정을 보고서야 착각이 아님을 확인한다.
“하, 저기요, 작가님. 만 명이 안 되면 계약금 외에 한 푼도 안 받겠다는 뜻과 같은데, 제가 이해한 게 맞습니까?”
“네, 대표님 말씀대로 그 정도도 확신도 없이 러닝 개런티를 요구한 건 아니니까요.”
“하.”
기가 찬 듯 대표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이내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
한참 동안 말없이 입안 살을 씹던 김 대표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좋습니다. 정 원하시면, 그렇게 하시죠.”
역시나 슬쩍 자존심을 건드리며 바로 반응이 온다.
이런 사람은 오히려 다루기 쉬웠다.
삼십 분 뒤.
내 앞엔 바뀐 계약서가 놓여있었다.
***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김 대표가 자리를 뜨고, 서 감독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애초에 자신 없었으면 러닝 개런티를 꺼내지도 않았겠죠.”
“하긴, 대본 퀄리티만 보면 자신감 가지실 만하죠.”
“뭐 연출이야 서 감독님께서 확실하게 잡아주실 거라고 믿고요.”
“하아, 이거 어깨가 무거워지네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서 감독을 안심시키며 계약서에 서명했다.
도장도 좋지만 사각거리는 만년필 손맛은 따라올 수가 없었다.
서명이 완료되자 그제야 서 감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배를 타게 되었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작가님.”
“좋은 연출 부탁드립니다.”
서 감독은 야무지게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 볼게요. 이 기회에 제 기록도 한 번 깨보고요.”
42주 연속 매진 기록을 갱신한 다라...
나에게도 희소식이었다.
물론 그전에 한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대신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뭐든 말씀하세요.”
“추가 대본 수정이 필요할 거 같아요.”
“네? 대본, 수정이요?”
서 감독이 조금 놀란 듯 되묻는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이미 빈틈없는 대본을 수정하겠다니.
그러나 내 입장에선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목표가 달라졌으니 내용이 달라져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니까.’
***
나는 계약을 마무리 짓고 집으로 향했다.
지금 상태로도 내 작품은 완벽했다.
감독, 연기자, 작가 입장에서 모두 만족할 만한 작품성을 지닌 대본.
그러나 대중들이 원하는 건 작품성보다는 재미와 감동이었다.
그래, 흔히 말하는 대중성.
내 작품이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예술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술성에 주목한 작품은 그 당시에도 많았다. 그런데도 내 작품이 살아남은 이유는 바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철저하게 상업성에 입각한 대본들을 집필했기 때문이었다.
‘그땐 하루에 최소 1500~2000명의 유료 관객을 끌어들여야 했지.’
여러 극단과의 숨 막히는 관객 유치 경쟁이 매일 같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그걸 가능케 만든 게 바로 ‘대중성’이었다.
흥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대중성을 확보해야 했다. 동시에 일시적 화젯거리가 아니라 관객들의 깊은 내면적 욕망과 두려움을 함께 다뤄 현실성뿐만 아니라 예술성도 놓치지 말아야 했다.
그야말로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는 극강의 난이도.
그러나 나는 자신 있었다.
‘그 시절, 런던의 관객 수를 두 배 넘게 끌어 올린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
요즘으로 비교하자면 나는 영화마다 1,000만 관객을 동원했던 흥행의 마술사였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천재 극작가.
지금 내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때의 감각이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한 채 책상에 앉았다.
엄마와 누나가 직접 발품을 팔아 준비해준 귀한 작업실.
천천히 숨을 고른다.
자연스럽게 옛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그때의 감각을 되새기며 작품 속으로 빠져든다.
타닥, 타닥 타다다다닥.
아름답고, 비참한 천재 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의 이야기로 가득 찬 그 시절의 런던.
진중하고 무겁던 그 거리 위에, 어느새 새 빛깔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
일주일이 뒤.
“하아.”
배우들의 연습을 지켜보던 김 대표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서 감독을 통해 전해 들은 갑작스럽게 소식 때문이었다.
‘권 작가가 대본을 전면 수정 한다고 했어요.’
배우들이 한창 감정 잡고 있는데 갑자기 수정이라니, 배역에 몰입해야 하는 배우 입장에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대체 전체 리딩도 끝낸 대본을 왜 또 수정하는 건데?”
“작가님 보시기에 미흡한 점이 있으신가 봐요. 일단 수정 대본 받아보고 다시 회의하시죠.”
“하, 진짜.”
사실 공연 전에 대본을 수정하는 건 꽤나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배우 마음에 안 들어서, 때론 감독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수정되는 게 다반사니까.
다만 이번 대본의 경우엔 전혀 수정할 이유가 없었다.
‘이 대본은, 이 자체로 정말 완벽하다고.’
흠을 잡는 게 무안할 정도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이었다.
‘하아, 그런데 왜 수정을 한다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온전한 작품을 건드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설마, 러닝 개런티 때문에 욕심내는 건가?’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타이밍도 마침 계약 조건으로 각을 세웠던 그 날 이후였다.
‘그렇다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어...’
권서준 작가의 욕심은 알겠지만 수정이 능사는 아니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수정이 많으면 전체 스토리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너무 잦은 수정은 오히려 가장 중요한 줄기를 놓칠 때가 있거든.’
숱하게 봐온 작가들의 실수.
이번이 첫 데뷔작인 초짜 작가였기에 더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대표님, 여기 수정 대본 왔네요.”
그때,
서 감독이 수정된 대본을 가지고 다가온다.
“후우.”
받자마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마지못해 한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는데... 갑자기 김 대표의 눈빛이 깊어진다.
‘...어라?’
고개가 절로 대본에 가까워진다.
무겁고, 심오한 대사들이 조금 더 가벼워진 느낌.
게다가 그 당시의 대중적 현실과 일상적인 생활 감각이 현대적인 느낌으로 재해석 돼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한층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야기에 저절로 감정이 이입된다.
충격을 받은 김 대표는 자신도 모르게 대본을 쥔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이런 표현, 이런 에피소드는...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거지?’
이전 버전이 작품성에 힘을 잔뜩 실었다면 이 작품은 그 위에 대중성을 덧입힌 버전이었다.
그러나 예술성을 담보하지 못한 대중성은 문학작품을 통속적 수준에 머무르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예술성을 담보한 대중성이라고?
말이 쉽지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권서준 작가는 해냈다.
‘말도 안 돼...’
권서준이 빚어낸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의 완벽한 교집합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만 나오게 할 뿐이었다.
한층 가벼워졌지만 오히려 감정이 이입되는 요소는 훨씬 더 다채로워졌다.
지적 만족과 함께 재미 요소까지 즐길 수 있는 황금 밸런스.
자연스럽게 성적에 대한 기대감이 올라간다.
‘설마, 여기까지 생각하고 러닝 개런티를 요구한 건가?’
순간 김 대표의 등줄기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이 작가... 뭐지?’
다루기 쉬운 애송이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달라진 작품을 보니 평가가 달라진다.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산을 올려다봤을 때 느끼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때,
바뀐 대본 소식을 들은 이경민과 배우들이 다가간다.
“대표님, 이게 바뀐 대본이에요?”
“참나, 리허설이 3주도 안 남았는데 갑자기 대본을 바꾸다니요? 이래서 초짜 작가는 안 된다니까.”
김 대표는 그런 배우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건 무조건해야 해.”
“...네?”
놀라 되묻는 배우들.
그러나 김 대표의 눈을 어느새 서 감독을 향하고 있었다.
“서 감독, 당장 이 버전으로 연습 시켜. 지금 당장...”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빛.
김 대표의 몸엔 어느새 작은 전율이 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