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swagger - 뽐내며 걷다 (5)
34.
***
The worst is not so long as we can say. “This is the worst.”
“이게 밑바닥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안은 결코 밑바닥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의 명대사를 시작으로 「넝쿨째 굴러온 전 남친들」의 1화가 공개되었다.
시작과 함께 삼수생 수아의 절박한 합격 기원이 이어지고 드디어 입성한 대학.
들뜬 걸음으로 강당에 들어서는데 익숙한 얼굴이 눈에 보인다.
반가운 사람이냐고?
혹은 지인이냐고?
아니, 평생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전 남친이었다.
“왜... 진욱이 니가 여기 있어?”
시크한 눈매의 진욱이 미간을 찌푸린다.
“나야 이 학교 학생이니까. 너 설마 아직도 나 못 잊어서 이렇게 학교까지 따라온 거야?”
“내, 내가 미쳤어?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 수아 누나?”
하얀 피부에, 꽃미남처럼 생긴 녀석이 눈웃음을 치며 다가온다.
하필 이 녀석의 얼굴 역시 낯이 익다.
“너, 넌 또 뭐야? 세진이 넌 또 왜 여기 있어?”
“나야 누나 따라왔지. 여기 입학하는 게 누나 꿈이었잖아.”
“너, 너...”
“이제 동기네? 잘 부탁해.”
기가 막히다 못해 졸도할 것 같은 상황.
그런데 그건 서막에 불과했다.
“진욱아, 뭐해? 신입생들한테 설명 좀 해주라니까.”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안경을 쓴 키 큰 남자가 다가온다.
불행하게도 이 얼굴조차 익숙하다.
재수생 때, 수련회에서 만나 사귄 교회 오빠 찬욱이었다.
전 남친이 하나도 둘도 아니고, 셋을 한 자리에서, 그것도 한 학교에서 만나다니.
‘이게 말이 돼? 이게 말이 되냐고!’
삼수생 수아의 소리 없는 절규가 화면에 울려 퍼진다.
설렘으로 가득 찼던 대학 생활은,
등교 10분 만에 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
「넝쿨째 굴러온 전 남친들」
1화 영상 공개와 함께 댓글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대박, 보는 내가 미치고 팔짝 뛰겠네. 다음 편 빨리 달라고요! 이걸 어떻게 참아!
-요즘 본 웹드라마 중 제일 신선하다. 일단 배우들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스토리가 너무 재밌어서 이건 안 볼 수가 없네.
˪얼른 일해라! 다음 화는 언제 주냐!
-근데 이거 쓰신 작가님, 지난번에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 쓰신 분 아님?
˪ 아, 맞네요. 어쩐지 퀄리티가 다르다 했다.
˪나 이분 팬 될 거 같음. 혹시 SNS 계정 아시는 분?
˪내가 알기론 아직 없음.
-그래서 다음 화는 언제 나오는데요? 빨리요 빨리!
˪금,토,일 매주 세 편씩 업데이트됩니다.
-와... 전 남친이 셋이나? 삼수해서 겨우 합격했는데 칼 자퇴해야 하는 각이냐?
˪미쳤음? 저런 우량주들을 두고 왜 자퇴를 함?
˪내 말이.
-시작부터 이 짜릿한 전개 무엇? 저 배우들이 내 전 남친이라면 난 행복사할 듯.
˪솔직히 내가 만난 전 남친들이라면 무조건 자퇴각이지만, 여긴 좀 다르네. 다음 화가 너무 궁금해요!
˪한번 연락이나 해봐요. 정변 했을지 또 누가 앎?
˪님부터.
˪전 남친이 있어야 하죠.....
˪아.... 눙물.
공개 5시간 만에 무려 100만 회 돌파.
당연히 커뮤니티의 관심도 높아졌다.
“서, 서준아. 이거 봐봐. 벌써 백만이 넘었다고.”
누나는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조회 수를 보며 말했다.
“백만? 그거 높은 거야?”
빨래를 개던 엄마까지 관심을 보인다.
“그럼, 엄청 높은 거지! 5시간 만에 백만이면 거의 초대박이라고.”
“아이고, 어쩐지 엄마도 봤는데 뒷얘기가 확 궁금하고 그러더라고.”
엄마가 웹드라마를 봤다니 그건 좀 의외인데? 아무튼.
“아이고, 우리 아들 잘했다. 어이구 장해.”
엄마가 대견한 듯 내 손등을 두드린다.
“잘 돼서 다행이야. 안 그래도 정 피디님이 호언장담하긴 했는데 근거가 있었네. 배우들의 연기도 깔끔하고, 연출도 군더더기 없고.”
내 말을 듣고 있던 누나가 씨익 웃는다.
“그것도 맞지만 한 가지가 빠졌네.”
“뭐?”
“대본. 솔직히, 대본이 가장 좋았잖아. 본인이 제일 잘 알면서.”
누나가 핵심을 짚는다.
하긴, 그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오늘 극단 대표실.
똑똑똑.
벌써 일주일째.
서미연은 어김없이 대표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김재용 대표의 목소리가 들리고 서 감독은 굳은 결심을 한 채 문을 열고 들어간다.
서 감독을 보자마자 김 대표가 이마를 짚는다.
“하아, 서 감독 또 왜?”
“어제 말씀드린 거 확답을 듣고 싶어서요.”
“그건 이미 끝난 얘기잖아. 안 된다니까?”
“왜 안 되는지 이유를 말씀해주셔야죠.”
깊은 한숨을 내쉰 김 대표가 이내 입을 연다.
“무명작가에, 게다가 학부생이라며? 거기다 러닝 개런티? 적당히 해야지. 여기가 영화판이야? 아니, 영화판도 잘나가는 배우들이나 러닝 개런티하지 생판 무명작가가 러닝 개런티?”
김 대표의 반응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만큼 연극계에서 러닝 개런티, 특히 작가의 러닝 개런티는 예를 찾기가 힘들 정도니까.
“하지만 이러다가 정말 대본 놓칠 수도 있다니까요? 박성규 교수가 노리고 있다고요.”
“...”
김 대표가 순간 생각에 잠긴다.
솔직히 서 감독의 말대로 권서준의 대본 자체는 아주 훌륭했다.
그래서 3천만 원 주고 계약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러닝 개런티를 요구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거 괜히 계약부터 어린놈한테 끌려가는 기분이잖아.’
나름 연극계에선 이름 있는 극단인데 이런 시작이 못마땅했다.
‘하아, 그렇다고 계속 고집부리다가 남 좋은 일 시킬 수는 없는데...’
서 감독의 말대로 다른 쪽에서 접촉할 수도 있었다.
그래. 아무리 못마땅해도 죽 써서 개 주는 건 더 싫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대본을 잡는 게 중요했다.
“...좋아, 일단 그렇게 하자고. 대신 계약 조건은 확실히 해 둬. 나중에 괜히 말 나오지 않게.”
“어느 정도 생각하시는데요?”
“뭐, 관객 1만 명당 천만 원씩, 어때?”
순간 서 감독의 눈이 커진다.
“만 명이요? 대표님, 그건 너무하잖아요?”
서 감독의 반응은 당연했다.
지난 42주 연속 매진 때 수도권 3개관에서 끌어들인 총관객 수가 6만 명이었으니까.
어지간히 대박을 내지 않는 이상 연극 관객 만 명은 쉽지 않은 기록이었다.
“몰라. 나도 여기까지야. 뭐 본인이 자신 있으니까 요구한 거겠지. 하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고 해.”
김 대표 입장에선 이 정도면 후회 없는 조건이었다.
만 명을 못 찍으면 계약금을 아낀 거고, 만 명을 넘기면 천만 원 정도야 아깝지 않으니까.
게다가 가뜩이나 불황인 연극계라 몇만 명 넘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린놈이 머리 좀 썼다만, 이 바닥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고.’
김 대표의 얼굴에선 벌써부터 어린 작가에게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
이틀 뒤.
3화까지 공개된 웹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전 남친들」은 드디어 실검까지 차지했다.
-넝쿨째 굴러온 전 남친들.
-넝,쿨,전.
-넝쿨전 권서준 작가.
-썬비치
-제주도 썬비치.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와 2차 저작권, 게다가 PPL 업체까지 동시에 노출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하하하, 네, 네. 저희만 믿으시라니까요. 말씀드렸잖아요. 홍보 확실하게 해드린다고. 네, 네. 알겠습니다.”
썬비치의 연락을 받은 소담 대표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는 소문.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웹드라마의 성공 소식에 신하율에게서도 직접 연락이 왔다.
-권 작가님! 잘 지내시죠?
목소리는 한층 밝아져 있었다.
자신감 넘치는 톤이 훨씬 듣기 좋았다.
“네, 저야 잘 지내죠. 하율 씨도 잘 지내죠?”
-저야 작가님 덕분에 잘 지내죠.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한두 번도 아니고, 신하율은 연락을 할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하율 씨가 기회를 잘 잡은 거죠. 참, 소속사 들어갔다면서요?”
최근 대형 소속사에 들어간 신하율은 정신없이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 사이 단막 하나랑 독립 영화 한 편도 찍었어요. 아, 영화는 하반기에 상영될 예정인데 만일 시간 되시면 시사회 때 꼭 한번 와주세요.
마치 칭찬받고 싶은 어린애의 목소리였다. 이럴 땐 적절한 칭찬이 득이 되는 법.
“그야 물론이죠.”
-정말 감사해요. 아, 참. 그리고 사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연락드렸어요.
“부탁이요?”
-네.
신하율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힘겹게 입을 연다.
-나중에 작가님 다른 작품 들어가시면 저 꼭 한 번만 더 불러주세요. 저 진짜 연기 연습 많이 할게요.
조금은 예상 못 한 부탁이었다.
“제 작품을요? 왜요? 대형 기획사라 좋은 대본 많이 들어왔을 텐데.”
-그게... 작가님 대본엔 뭔가 다른 게 있더라고요. 이번에 단막이랑 영화 찍어보고 더 느꼈어요.
어쩜 그 친구와 이렇게 닮았을까.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연기에 대한 목마름까지 꼭 빼닮은 배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리처드를 떠오르게 만든다.
이렇게 부탁까지 하는 친구를 굳이 밀어낼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한창 주가를 올리는 신인이라면 서로 윈윈할 수도 있고.
“좋아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같이 해요.”
-정말이죠? 약속하신 거죠?
휴대폰 너머로 들뜬 기분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인기를 얻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순수함을 간직한 모습.
다행이었다.
“대신 전 연기 못하는 사람은 안 쓰는 거 알죠? 여러 역할 열심히 경험해 봐요. 특히 눈치 보지 말고 자신이 해석한 대로 자신 있게 연기하는 거 잊지 말고요.”
-네, 안 그래도 작가님이 하신 말씀 휴대폰 배경화면에 적어놓고 매일 되새기고 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또 연락드릴게요!
밝은 목소리와 함께 신하율과의 통화를 마쳤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장현웅이 혀를 내두른다.
“....설마, 신하율이냐?”
“어, 왜?”
내 대답에 장현웅이 덜컥 걸음을 멈춘다.
“야, 너 지금 어, 왜? 라는 말이 나오냐? 지금 신하율이 어떤 배우인지 알아? 청초하면서도 섹시하고, 게다가 연기까지 잘해서 충무로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인이 바로 신, 하, 율이라고!”
장현웅은 지금껏 어떻게 참았나 싶게 말을 쏟아낸다.
“근데 그 배우가, 너한테 직접 전화를 한 것도 모자라서, 출연하게 해달라고 부탁한 거라고. 그게 지금 믿어져?”
“믿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사실인걸.”
“하아. 독한 놈. 나라면 벌써 심장마비 걸려서 죽었을 거야...”
장현웅은 평소보다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근데, 왜 니가 더 신났냐?”
나는 슬쩍 농담 삼아 질문했다.
그러자 녀석은 잠시의 고민도 없이 대답한다.
“야, 당연히 신나지. 내 친구가 잘됐는데. 웹드라마 2연속 홈런에, 신하율이 직접 전화해서 출연시켜달라고 하는 작가가, 바로 내 친군데 안 신나냐?”
녀석의 미소에선 질투나 고민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순수하게 친구를 축하해주는 마음.
저거 진짜 어려운 건데.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홀로 걸어가는 학생 한 명이 보인다.
다름 아닌 송진호였다.
분명 눈이 마주쳤지만 애써 무시한 채 걸어간다. 일말의 자존심일까, 그 모습이 오히려 안쓰러웠다.
지켜보던 장현웅이 혀를 찬다.
“쯧쯧. 송진호 요즘 수업 외엔 학교에서 거의 안 보여. 스터디도 안 하는 모양이고... 아마 백일장 사건이 생각보다 충격이 컸나 봐.”
뭐, 솔직히 그다지 관심 있는 주제는 아니었다.
다만 송진호와 송영도 교수의 관계는 아직까지 흥미가 있었다.
‘부자지간의 갈등만큼 극적인 소재도 드무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송진호에 대한 생각을 밀어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지켜보던 장현웅이 너스레를 떤다.
“오, 우리 작가님은 이제 걸음걸이마저 스웩이 있으시네?”
스웩(Swag)이라.
요즘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
흔히 가벼움, 여유, 멋, 약간의 허세 등으로 설명이 되는 말인데...
‘사실 저것도 내가 만든 말이지.’
희곡 「한여름 밤의 꿈」에서 Swagger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물론 그땐 긍정적으로 쓴 표현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조금 스웩 있게 걸어도 나쁘지 않았다.
“근데, 우리 권 작가님은 어디 가는 데 이렇게 걸음이 아름다우실까?”
장현웅의 말에 나는 한마디로 답했다.
“희곡 계약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