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30화 (30/203)

# 30. swagger - 뽐내며 걷다 (1)

30.

***

“아마 뒷부분은 아직 쓰는 중일 거야. 2차 제출일이 아직 며칠 남았다고 들었거든.”

“아...”

서미연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이건 마치 결정적인 장면에서 끝난 드라마 한 편을 본 기분이었다.

서미연은 냉수를 급히 마시고는 다시 송영도 교수를 바라봤다.

“선생님, 이거... 정말로 그 친구가 썼다고요?”

“그렇다니까. 서 감독이 보기엔 어때?”

“제가 무슨 말 할지 이미 알고 계신 거 같은데요?”

송 교수는 이미 웃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흐뭇한 송 교수의 미소.

그건 마치 자기 자식 칭찬을 듣는 부모의 표정과 같았다.

“익숙하면서 새롭고, 고풍스러우면서도 가벼워요. 이걸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희곡을 분석하는 게 연출자인 서 감독의 주요 업무였다. 그런데도 권서준의 희곡은 쉽게 정의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독특해. 그런데 이 안정적이면서 익숙한 맛은 또 뭘까...’

가만히 듣고 있던 송 교수가 넌지시 힌트를 던져준다.

“마치 셰익스피어가 크리스토퍼 말로의 이야기를 쓴 거 같지 않나? 혹은 그 반대이거나.”

송 교수의 말에 서 감독의 눈이 커진다.

‘그래. 그거였어...’

셰익스피어가 예술계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천재 예술가라면, 크리스토퍼 말로는 단 10년 만에 영국 문학계를 뒤흔든 비운의 천재 작가였다.

그리고 이 작품 속엔 이름만 들어도 가슴 벅찬 두 거장의 기운이 동시에 느껴졌다.

‘주인공으로 밀고 가는 저돌적인 스토리의 힘은 크리스토퍼 말로의 필체를 닮았어. 그러나 동시에 주변 인물들의 개성을 놓치지 않는 건 셰익스피어의 필체를 닮았고...’

분석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두뇌가 빠르게 회전한다. 이제부터는 독자가 아닌 업계 관계자의 시선으로 다시 작품을 바라본다.

최근 공연계는 불황을 겪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배우들의 출연료.

늘어나는 스태프들의 인건비.

천정부지로 솟구치는 대관료까지.

웬만큼 작품이 성공해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게다가 화려한 CG와 시원시원한 전개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영화와 OTT 콘텐츠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이 먼 영국까지 직접 찾아온 거지.’

유명한 해외 거장의 작품을 통해 어려운 현실을 타개해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작가는 한국이라는 시장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관심을 보이는 작가는 엄청난 비용을 요구했다.

‘그 기준에 맞추려면 결국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야.’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희망을 보았다.

‘혹시... 이 작품이라면?’

아직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었다.

용두사미로 끝나는 작품들도 너무 많았으니까.

그런데 한번 뛰기 시작한 심장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될 거 같아...’

자신만 그런 게 아니었다.

웃는 모습을 거의 본 적 없는 송 교수도 자신과 같은 표정이었다.

‘대체 이 친구... 정체가 뭐지?’

어느새 서미연의 머릿속엔 권서준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선명하게 박히고 말았다.

***

‘10시 비행기라고 했지?’

영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주어진 자유 시간.

나는 내 마지막 방문지로 템즈 강 건너편으로 향했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이곳이 바로 영국 최초의 극장이 만들어진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이름은 ‘Theatre’.

지금으로 따지면 극장 이름이 극장인 셈.

사실 그때부터 모든 연극 공연장을 극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의 커리어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고.’

작가로서 첫 발걸음을 뗀 곳.

나는 무려 400년 만에 그곳을 다시 찾았다.

물론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내 눈엔 아직도 그 시절의 극장이 선하게 떠오른다.

하루가 멀다고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공연되던 극장.

‘크리스토퍼 말로, 벤 존슨, 그리고 내 작품까지... 그땐 정말 볼 게 많았지.’

그야말로 연극의 번영기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크리스토퍼 말로는 허망하게 요절하고,

갑자기 퍼진 페스트(pest)로 극장은 2년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급격히 얼어붙은 공연계.

그 시절,

문 닫은 극장을 보며 혹자는 그렇게 말했다.

[아, 문학의 황금시대가 이렇게 끝이 나버렸구나.]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왜냐고?

‘문학의 황금시대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내 머릿속엔 다시금 극장의 건설 과정이 떠오른다.

벽돌을 굽고, 나무못으로 원형 극장의 골조를 세우고, 나무를 길게 켜서 난간 기둥을 만든 다음 갈대를 엮어 올리고, 숱한 예술가들의 혼이 담긴 휘황찬란하게 그림들이 무대 천장을 수놓고...

어느새 근사한 건물이 지어진다.

그래.

나는 다시금 극장을 세우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의 무대를 만들고 있었다.

선명해진 나의 극장.

나는 그 위에서 조용히 읊조렸다.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야.’

나는 고개를 들어 아름답게 익어가는 런던의 밤을 바라본다.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하늘의 별이 된 한 친구에게 내 마음을 전해본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돌아올 리 없는 대답.

그러나 그 순간 따스한 바람 한 줄기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기가 막힌 타이밍.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리고 두 시간 뒤.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런던에서 인천공항까지 걸린 시간은 총 11시간.

갈 때보다는 1시간이 덜 걸렸다.

공항에 도착하자 엄마와 누나가 나를 반긴다.

“버스 타면 되는데 왜 굳이 마중 나왔어?”

“한시라도 빨리 아들 보고 싶어서 그랬지.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당연하지.”

걱정하는 엄마를 안심시키는 동안 송 교수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서준이 담당 교수 송영도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전 서준이 애미 되는 사람입니다.”

학부모가 교수를 만날 일이 얼마나 될까.

엄마는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서준이한테 좋은 기회도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저희 아이가 폐를 끼친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서준이 덕분에 저 역시 큰 도움을 받았는걸요.”

송 교수는 발표문과 관련된 얘기를 에둘러 표현했다.

당연히 그 내용을 모르는 엄마는 학생이 교수를 도왔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었다.

“아마 서준이에게도 좋은 경험이 됐을 겁니다. 그렇지?”

“물론이죠.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럼 주말 잘 보내고 학교에서 보자고.”

우리는 송 교수와 인사를 나눈 뒤 택시에 올랐다.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고 한참 가는데 방향이 조금 이상했다.

“엄마, 집에 가는 거 아냐?”

“맞아.”

“그럼 이쪽 아니잖아.”

엄마는 미소를 짓는다.

“아니, 이쪽이 맞아.”

내가 우리 집 방향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하나뿐이었다.

“설마, 벌써 집을 구한 거야?”

내 질문에 누나가 미소를 짓는다.

“다행히 적절한 곳이 있어서 어제 이사했어.”

잠시 뒤,

골목을 지나 택시가 멈춘다.

“다 왔습니다.”

나는 택시에 내려서 정면에 보이는 건물을 올려다봤다.

볕이 잘 드는 3층짜리 연립 주택.

나는 가벼운 누나의 발걸음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짜잔, 여기가 이제부터 우리 집이야.”

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선다.

항상 악취로 들끓던 이전 집과 달리 좋은 냄새가 풍긴다.

게다가 커다란 거실 창을 통해서 햇볕이 들어온다.

“와, 이젠 빨래 잘 마르겠다.”

늘 밖에다가 건조대를 세워야 했던 반지하 시절은 이제 안녕이었다.

“그래. 이젠 냄새 걱정도 없다고. 엄마랑 몇 번이나 확인했거든.”

고작 두 층 올라왔을 뿐인데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자, 네 방도 한 번 봐봐.”

방문을 연 엄마가 내 등을 부드럽게 민다.

내 눈앞에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진다.

모던한 느낌의 인테리어로 꾸며진 방.

적절한 간접 조명과 넓은 데스크톱.

그리고 숲이 보이는 커다란 창까지.

글 쓰는 사람을 위해 신경 쓴 게 티가 난다.

“너희 누나가 발품 팔아서 꾸민 거야. 어때 마음에 들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주.”

내 말에 누나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그래.

행복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거, 그게 행복이었다.

“참, 밥 먹어야지? 뭐 먹고 싶어?”

엄마가 묻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위장이 요동친다.

나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대답했다.

“김치찌개.”

3일 전부터 먹고 싶었던 엄마표 김치찌개.

전생이 셰익스피어였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

“자, 이건 선물.”

늦은 저녁.

나는 캐리어를 정리하다가 면세점에 산 선물을 내밀었다.

누나는 기초 화장품, 엄마는 작은 가방이었다.

“아니, 뭐 이런 걸 사 왔어?”

“면세점에서 사니까 싸더라고.”

“너 필요한 거나 사지 뭐 하러...”

“엄마, 걱정하지 마. 아들이 능력 좋아서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그래도...”

엄마는 영 미안한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누나가 마지못해 끼어든다.

“아이고, 엄마. 지금 서준이 엄청나게 잘나간다고. 벌써 웹드라마도 두 번째 계약했다고 말했잖아. 이 정도는 편하게 받아도 돼. 그렇지?”

나를 보며 윙크를 하는 누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억지로 엄마 어깨에 가방을 걸어주자 엄마는 마지못해 가방을 받아든다.

“와, 엄마 뭐야? 고급진데?”

누나가 적당히 추임새를 넣는다.

“...그래?”

엄마는 반신반의하며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해본다. 좋은 가방을 한 번도 못 들어본 엄마는 어색하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고마워, 아들. 잘 쓸게.”

잘 쓴다고 말했지만 아마 고이 모셔둘 게 뻔했다. 누려 본 적이 없기에 누릴 줄 모르는 사람. 그게 우리 엄마였으니까.

‘엄마, 앞으로는 꽃길만 걷게 해줄게.’

나는 속으로 다짐하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깨끗한 방안.

빗물로 얼룩진 벽지도, 갈라진 장판 사이로 보이던 시멘트도, 퀴퀴한 냄새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글쓰기에 최적화된 분위기.

나는 간접 조명 하나를 켠 채 책상에 앉았다.

희곡 초고가 나왔지만 아직 끝은 아니었다.

초고는 영(0)고라는 말이 있듯이,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할 수정 작업이 남아있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지.

보석도 가공할수록 빛이 영롱해지듯, 희곡 역시 마찬가지니까.

과제 수준을 넘는 작품이 필요했다.

그리고,

어느새 내가 창조한 멋진 세계가 나를 향해 손짓한다.

‘알았어. 빨리 갈게.’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컴퓨터 앞에 앉는다.

공기조차 차분하게 가라앉는 늦은 밤.

나는 그렇게 고요히 내 작품 속으로 젖어 든다.

***

황금 같은 주말.

나는 여독을 풀 새도 없이 희곡에 집중했다.

영문을 다시 한글로 바꾸고 소네트의 느낌도 최대한 살려서 만족스러운 퀄리티가 나올 때까지 수정을 반복했다.

결국 일요일이 거의 다 지나서야 최종적으로 마무리가 됐다.

‘후우.’

오랜만에 열정을 쏟느라 지치기도 했지만 그만큼 돌아오는 쾌감도 컸다.

시작은 단순히 과제였지만 결과물을 보고 나니 뿌듯함이 밀려온다.

나는 들뜬 마음을 억누른 채 제일 먼저 박성규 교수의 메일로 작품을 보냈다.

첨부파일 : 거장의 숨결.hwp

늦은 시간임에도 보내자마자 메일 읽음 표시가 뜬다.

‘내 작품을 기다린 건가?’

하긴, 사이가 어색한 송 교수에게 직접 전화를 해 내 과제를 확인할 정도면 기다렸다는 쪽이 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나는 추가로 한 곳에 메일을 더 보냈다.

수신자는 바로 오늘 극단의 서미연 총괄 디렉터였다.

‘서 감독이 네 희곡을 좋게 생각하고 있어. 기회가 되면 한 번 만나보도록 해.’

송 교수는 히드로 공항으로 향하는 내내 나에게 서 감독에 대해 적극 추천했다.

물론 내가 예상했던 기회였기에 나는 흔쾌히 작품을 보내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내 승부욕을 자극했던 서 감독과의 첫 만남이 떠오른다.

기대감 없는 눈빛.

예의상 말을 걸던 그때의 모습.

‘과연 서 감독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분명한 건 지난번 나를 바라보던 눈빛과는 많이 달라질 거라는 점이었다.

‘재미있군.’

벌써부터 기분이 설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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