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29화 (29/203)

# 29. amazement - 놀라움 (5)

29.

***

“지난번 작품은 괜찮았어. 연출이 아주 깔끔한 편이었거든.”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다시 보니까 아쉬운 게 너무 많더라고요.”

오랜만에 만난 송영도 교수와 서미연 감독의 대화는 깊어졌다. 그러다 문득 송 교수가 시간을 확인한다.

“근데, 서 감독 어딜 급히 가는 길 아니었어?”

순간 서미연의 입이 떡 벌어진다.

“참, 미팅 잡아놓고 내 정신 좀 봐. 보세요. 선생님하고 대화만 하면 이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른다니까요.”

“설마 이것도 내 탓인 건가?”

“원래 벌은 죄가 없어요. 꽃이 문제지.”

능청스러운 답변까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튼 시간 되면 식사나 한번 하자고.”

“네, 교수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환영이죠. 참, 선생님 차기작 쓰시면 저한테 제일 먼저 보여주셔야 해요? 아셨죠?”

서미연은 밝은 미소로 인사를 건네고는 먼저 왕립예술학교로 들어간다. 급한 와중에도 나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저 송 교수의 지인에 대한 예의였지만 그게 어디인가 싶었다.

‘기본 예의도 없는 사람들이 천지인 세상이니까.’

자연스럽게 한소진의 얼굴이 오버랩 됐지만 가볍게 털어냈다.

“저 친구, 알아두면 좋을 거야. 허당처럼 보여도 능력하나는 이 바닥 최고니까.”

송 교수가 내 손에 들린 명함을 보며 말한다.

물론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말 몇 마디 나눠봤을 뿐이지만 처세술이 장난 아니었다.

게다가 어려운 연극계에서 42주 연속 매진은 아무나 세울 수 있는 기록은 아니었다.

작품을 보는 눈뿐만 아니라 스태프와 배우들을 통솔하는 역량까지 출중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유능한 사람이야.’

그래서 오히려 승부심이 일었다.

자존심 강한 업계 전문가가 내 작품을 얻기 위해 애원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마무리가 중요하지.’

나는 희곡의 뒷부분을 떠올린다.

아직은 흐릿한 이야기.

보다 선명해질 때까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

왕립예술학교를 나온 뒤 송 교수는 나를 데리고 런던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문 옆에는 미슐랭에서 받은 별 세 개가 자랑스럽게 붙어 있었다.

‘엄청 비싸겠군.’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의 차림새도 하나같이 갖춰 입은 상태였다.

“자, 마음껏 먹어. 런던에 들를 때마다 빠지지 않는 곳이거든.”

송 교수는 흐뭇한 표정으로 메인 요리와 함께 와인을 시켰다.

나는 잔을 살짝 돌려주면서 와인이 소용돌이칠 때 풍기는 아로마 냄새를 음미했다.

입안에서 가볍게 굴려주고 잠시 혀 중앙 부분에 와인을 머금는다. 진한 향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와인을 삼킨다.

향과 맛.

모두 최상급.

게다가 내게는 너무 익숙한 맛이었다.

“셰리 와인이군요.”

“서준이 너, 와인에도 관심이 있는 거야?”

송 교수가 놀란 듯 묻는다.

“셰리 와인만 조금 아는 편입니다.”

“그렇군. 나 역시 그래. 특히 엘리자베스 1세와 셰익스피어가 반했던 와인이기에 더욱 좋아하지.”

셰리 와인.

브랜디를 첨가해 도수를 높인 스페인은 와인으로 세계 2대 주정 강화 와인 중 하나였나.

송 교수의 말대로 내가 특히 좋아하던 와인이었다.

‘벤 존슨, 그 친구와 함께 매일 베어 헤드 태번에서 셰리 와인을 마셨었지.’

와인 애호가였던 나는 작품 「헨리 4세」에서 셰리 와인을 극찬하는 대사를 넣기도 했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셰리 와인이지만 그때는 그리 쉽게 접할 수 있는 와인이 아니었으니까.

와인이 몇 잔 돌고,

입안에 도는 향이 진해질 때쯤.

송 교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서준아, 혹시 희곡은 그전에 써 본 적 있었니?”

“수업 시간 때 몇 번 습작해본 적은 있습니다.”

쓸데없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둘러댄 발언. 그러나 송 교수의 생각은 조금 다른 곳으로 이어졌다.

“습작이라... 습작 정도로 그런 퀄리티가 가능하다고?”

송 교수가 허탈한 듯 와인 잔을 든다.

한 잔은 다 비워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서준아, 한 가지만 묻자. 넌 대체 어느 분야에 관심이 있는 거야? 소설이야? 아니면 시야, 그것도 아니면 희곡?”

어제 받았던 질문과 비슷했다.

“서미연 감독에게도 말했지만 다양한 장르에 대해 더 배우고 싶습니다. 해보고 싶은 게 많거든요.”

내 대답에 송 교수의 눈빛이 가늘어진다.

“혹시, 웹드라마나 드라마 이쪽도 관심 있는 거고?”

마지막 질문을 통해 송 교수의 의도가 읽힌다. 이후 나의 진로에 대한 관심이었다.

“솔직히 말할게. 넌 재능 있어. 아니, 내가 평생 가르쳐 온 그 누구보다 탁월해. 그래서... 그게 더 걱정이 되네.”

기어코 와인을 비어낸 송 교수가 말을 잇는다.

“난 네 재능이 대중적인 콘텐츠로 소비되는 게 아쉬워. 행여 내 작품 속에 담기는 그 깊이가 반색 될까 두렵기도 하고...”

송 교수는 나의 재능이 순수 문학 쪽에서 꽃피우길 바랐다.

그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손재주가 좋은 사람은 대성하기 어렵다는 말. 나 역시 동의해. 네가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갖는 건 이해해. 그러나 모든 장르를 다 잘할 수 있는 건 셰익스피어 외엔 없어. 그건 불가능하다고.”

제자를 생각한 진심 어린 조언.

그러나 송 교수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내 전생이 바로 셰익스피어라는 점이지.’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송 교수는 진지한 조언을 이어갔다.

“어떤 분야든, 선택만 해. 그럼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 테니까.”

굵은 뿔테 너머로 진지한 눈빛이 전해진다. 기대에 찬 눈동자엔 강력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물론 난 송 교수의 뜻대로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좋은 날, 무의미한 논쟁으로 이 기분을 망칠 생각도 없었다.

“말씀해주신 조언 잘 생각해보겠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대답을 유보했다.

내 대답에 흡족했는지 송 교수의 얼굴에도 잠시 미소가 드리운다.

지이잉.

그때, 송 교수의 휴대폰이 울린다.

“어, 서 감독. 무슨 일이야? 어, 내일?”

잠시 고민하던 송 교수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학회도 끝난 터라 내일은 시간 괜찮아. 그래, 거기서 보자고.”

아마도 서미연 감독과 약속이 잡힌 모양이었다.

“서준아, 나는 내일 서 감독 좀 만나야 할 것 같은데? 넌 어떻게 할래?”

어차피 숙소에 있다고 딱히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곳을 조금이나마 더 눈에 담고 싶었다.

“그럼 잠시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다녀와도 될까요?”

“물론 좋지.”

송 교수가 와인 잔을 들며 흔쾌히 허락한다.

“자, 기분도 좋은데 건배 한번 할까?”

학회에 대한 성과도, 기대 이상이었던 내 가능성도 송 교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띠링.

조용히 부딪히는 잔.

악기에서나 날법한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

덩달아 도수 높은 와인 덕에 기분 좋게 취기가 차오른다.

***

다음 날.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외출 준비를 하고 숙소를 나섰다.

내 행선지는 뎁퍼드(Deptford).

런던 남동부, 템스 강 남쪽 강둑에 있는 지역이었다.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하나였다.

‘이곳이 크리스토퍼 말로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한 장소니까.’

스물아홉 살의 천재 작가.

고작 7년의 극작 기간과 7편의 희극으로 영미 문학사에 새 지평을 연 개성 넘치는 개척가.

‘그리고 내겐 무한한 영감을 준 라이벌이자 동료 예술가였지.’

이곳은 그런 위대한 극작가의 마지막 숨결이 머물렀던 장소였다.

그래서 희곡을 마무리하기 위해 꼭 한 번 와 보고 싶은 곳이었다.

나는 씁쓸한 입맛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거리를 두고 길게 늘어진 상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16세기 중반 왕립해군 조선소인 뎁포드 조선소의 본거지.

그 시절 거대한 배들이 강으로 들어가는 진수식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리 옆에 놓인 거대한 돛 조형물만이 이곳이 그 당시 조선소로 유명했던 곳임을 알려줄 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크리스토퍼 말로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그 친구, 정말 시원시원한 성격이었어.’

자기주장을 밝히는 데에 거침이 없었고, 주저하기보다는 달려드는 걸 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성격은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지.’

그의 작품「템벌레인 대왕」에서는 템벌레인 왕이, 「몰타의 유대인」에서는 바라바스를 통해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다.

원톱이나 투톱 주인공 중심으로 진행되는 그의 이야기는 시원시원한 전개가 장점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언제나 자신의 작품 속에서 활약할 다윗과 같은 영웅을 구상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성경이 아닌 영국의 전설이나 인접한 유럽의 전설 속에서 영웅을 찾고자 했다.

‘그건 종교가 전부이던 그 시절에 엄청나게 도전적이면서 위험한 일이었지.’

혹자는 사소한 술값 다툼으로 죽었다고는 하나, 그 시절 거침없이 무신론자임을 밝히고 다녔던 탓에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주장도 많았다.

그의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주장.

그러나 나의 관심사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저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 스러진 천재 작가에 대한 안타까움이 내 가슴을 채울 뿐이었다.

‘이쯤이었을 텐데...’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로가 머물렀던 선술집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술 한 잔을 주문한 채 생각에 잠긴다.

‘말로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한쪽 눈을 찔린 채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차마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차오른다.

‘윌리엄, 나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 족쇄와 같이 답답한 종교적 질서를 부숴버리고 싶다네. 그것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사할 수 있을 테니까.’

정복욕과 도전 의식에 사로잡혀 전쟁을 거듭하는 작품 속 대왕의 모습.

어쩌면 답답한 현실을 구원할 영웅을 기대한 간절한 그의 바람일지도 몰랐다.

끝내 바빌론을 정복하지 못하고 아쉽게 삶을 마감한 대왕의 모습 역시 그를 닮았고.

그런데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심상이 있었다.

‘영웅? 그래... 바로 그거야.’

나는 희곡의 후반부를 장식할 영감이 떠올랐다.

비록 비극으로 마무리된 천재 작가의 삶.

그러나 작품 속 그의 인생까지 실패로 점철될 이유는 없었다.

타닥타닥타닥.

이야기가 선명해지자 손가락이 빨라진다.

심상이 바뀌며,

이야기의 흐름에 힘이 생긴다.

마치 크리스토퍼 말로의 작품 속 영웅들의 이야기처럼 웅장함이 더해진다.

그리고 그날 밤.

차가운 강바람 속에서 또 하나의 작품이 세상에 태어났다.

영국이 잃어버린 작고, 위대한 한 영웅의 이야기였다.

***

“하아.”

호텔 로비.

송 교수를 기다리는 서미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 거절당했어...’

야심 찬 조건을 들고 왔지만 접촉한 작가들은 하나같이 한국에서의 공연을 거절했다.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는데...’

극단 차원에서의 손해도 손해지만 당장 다음 분기 때 무대에 올릴 작품이 없었다.

결국 서미연은 해외 작가들과 친분이 깊은 송 교수에게 SOS를 친 상태였다.

‘후우.’

한숨만 나오는 상황에 지칠 때쯤, 익숙한 얼굴이 다가온다.

송영도 교수였다.

“선생님!”

서미연은 굳은 표정을 자연스럽게 걷어내며 송 교수를 맞이했다.

“흠. 페르난도 작가도 생각이 없다고 하는군. 이거 미안하게 됐어.”

일말의 희망을 걸었지만 역시나였다.

서미연의 두 어깨가 아래로 축져진다.

“하아, 아니에요. 염치없는 부탁이었는데 말씀 전해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하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서미연은 여전히 절박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가만히 지켜보던 송 교수가 상체를 숙인다.

“혹시, 정 작품이 필요하면 이거 한 번 읽어보겠나?”

송 교수는 미리 출력해온 원고 뭉치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어제 만난 그 친구가 쓴 희곡이야.”

“...”

순간 서미연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다.

왜 갑자기 학부생의 작품을 보여주는 걸까. 나 보러 한가하게 과제 품평이라도 하라는 걸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송 교수가 입을 연다.

“한번 읽어봐.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

잠시 송 교수를 바라보던 서미연이 이내 원고를 받아든다.

‘그래, 선생님이 부탁하시는데 읽어는 봐야지.’

그러나 기대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학부생이 잘 써봐야 얼마나 잘 썼겠냐는 합리적인 생각뿐이었다.

잠시도 낭비할 시간이 없는 상태.

서미연은 서둘러 원고를 넘겼다.

‘응?’

그런데...

원고가 이상하게도 쉽게 읽힌다.

수많은 대사가 단숨에 이해된다.

‘그러면서도 먹먹한 무언가가 남는 이 기분은 뭐지?’

고작 30장짜리 미완의 원고.

그러나 작품이 남기는 여운은 대단했다.

비극에 가까운 천재의 삶.

비참한 그의 삶을 담아내는 방식이 단순하면서 명료했다.

‘원톱 주인공이 끌고 가는 형식이야. 그러면서도 등장인물 개개인의 개성이 잘 드러나고... 어떻게 이렇게 조연의 존재감을 잘 살릴 수 있는 거지?’

읽는 내내 감탄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잠시 뒤,

서미연이 내뱉은 말은 뜻밖이었다.

“선생님, 혹시 이 뒷부분도 읽을 수 있을까요?”

조금 전 반응과는 전혀 다른 질문.

그러나 그 질문에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바로 서미연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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