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amazement - 놀라움 (4)
28.
***
지이잉.
늦은 밤.
숙소에서 티타임을 즐기던 송 교수의 휴대폰이 울린다.
‘이 시간에 누구지?’
그러나 발신자를 확인하자 의구심은 더욱 커졌다.
문창과 학과장인 박성규 교수였다.
‘이분이 무슨 일일까.’
같은 과 교수지만 평소 개인적인 연락을 할 정도의 친분은 없었다. 그러나 학교에 혹시 모를 문제가 있을 수도 있었기에 받는 게 맞았다.
“네, 학과장님. 송영도입니다.”
전화를 받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소, 송 교수. 지금 통화 괜찮나?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는 듯싶었다.
“네, 근데 무슨 일이시죠?”
-그게 말일세. 혹시 지금 권서준하고 같이 있나?
대화의 흐름이 이상해진다.
난데없이 전화한 것도 이상한데 갑자기 권서준을 찾는다?
의아함은 자꾸만 커진다.
“아니요. 과제 할 겸 잠시 둘러보고 싶다고 해서 밖에 나갔는데, 혹시 서준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혹시 자신이 모르는 문제가 생겼나 싶어 신경이 예민해진다. 찰나였지만 괜히 자유 시간을 준 건가 하는 후회도 든다.
그러나 정작 들려온 박 교수의 말은 송 교수의 생각과 달랐다.
-아.. 과제 하러 나갔다고?
“네.”
-그럼 혹시 그 과제를 본인이 직접 했는지 자네가 한번 확인해줄 수 있나?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대체 무슨 일입니까?”
-...
휴대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흐른다.
아마 말을 해도 되는지 아닌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
결국 박 교수가 말을 잇는다.
-그게... 권서준 그 친구가 좀 전에 과제를 제출했는데... 이게 도통 학부생 수준이 아니라서 말이야. 이걸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라서 이렇게 연락한 걸세.
순간 송 교수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운다.
대체 어느 정도의 수준이기에 박 교수가 이렇게 나오는 걸까.
매너리즘에 젖어 고여 버린 학자이긴 하지만 과제 하나에 이렇게 경거망동할 사람은 아니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송 교수는 자연스럽게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밤 11시가 넘은 시간.
객실을 나와 권서준이 머무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도 반응이 없다.
‘아직 안 온 건가?’
아마 런던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보니 들뜬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해외 처음 나와 본 대학생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신기한 해외 구경에 다소 들뜨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돌아다니고.
‘결국 어린 애인 건가.’
여태 침착한 모습을 보여 살짝 풀어줬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니는 건 주의를 줘야 했다.
이미 박 교수와의 전화로 잠이 깬 송 교수는 자연스럽게 로비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로비 안으로 들어오는 권서준이 보인다.
역시나 살짝 들뜬 표정.
송 교수는 자신의 추측이 맞다고 생각했다.
“서준아,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는 거야?”
송 교수가 다가가며 물었다.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지만 꾸짖는 뉘앙스는 확실히 했다. 그런데도 녀석의 표정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과제를 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과제?”
“네. 박성규 교수님이 내주신 희곡 과제가 오늘까지였거든요.”
여기까지는 박 교수의 말 대로였다.
게다가 과제를 했다는 말에 더 이상 나무랄 수도 없었다.
영국에 와서도 과제를 해야 하는 건 문창과 학생의 당연한 책임이었으니까.
그런데 송 교수의 관심은 엉뚱한 곳으로 향한다.
‘과제를 했다는 녀석의 표정이 왜 이렇게 들뜬 거지?’
대부분은 지친 표정이어야 맞았다.
자연스럽게 녀석의 손에 들린 노트북으로 눈이 간다.
갑자기 동한 호기심.
잠시 고민하던 송 교수는 솔직하게 말하는 쪽을 택했다.
“조금 전에 박 교수님께 전화가 왔어. 네가 제출한 과제가 조금 이상하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니가 직접 한 과제인지 확인해 달라고 하셨어.”
권서준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네요. 제 생각에도 꽤 잘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직접 쓴 게 맞습니다.”
자신만만한 녀석의 표정에 호기심은 한층 짙어진다.
“그럼, 내가 한 번 봐도 될까?”
“물론이죠.”
권서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로비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그리고는 자신의 작품을 내밀었다.
표정도, 말투도.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대체 얼마나 잘 썼기에 다들 이러는 거지?’
송 교수는 슬쩍 권서준을 보다가 이내 소파에 앉아 그의 과제를 들여다봤다. 어차피 답은 이 안에 있었다.
제목 : 거장의 숨결.
박 교수의 과제는 뜻밖에도 희곡이었다.
그리고 보자마자 박 교수가 왜 의심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영문으로 희곡을 써서 제출하다니...’
웬만한 현지인도 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날, 권서준의 영어 수준을 경험한 송 교수는 자연스럽게 작품 안으로 녹아들었다.
송 교수는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잠시 뒤,
예상치 못한 충격에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건...’
도입부부터 거스를 수 없는 흡입력이 느껴진다.
화약과 연기, 비명으로 아우성치던 성소 안.
추악한 의지에 영혼의 글귀는 사라지고, 텅 빈 무덤만 남았네.
.
.
시, 극, 죽음, 그리고 어느 작가의 고귀한 육신.
그러나 그의 육신은 구름처럼 잡히지 않고 섬을 벗어나 온 세상으로 휘날리네.
우아한 그의 영혼. 한 줌의 향이 되어 온 세상을 매혹하리라.
.
.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
비운의 천재 이야기를 담은 희곡이었다.
정확히는 비극.
과거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비극에 딱 부합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건 영국 형식의 소네트라고....’
흔히 소네트라고 하면 4·4·3·3의 총 14행시의 형식을 가리킨다.
그러나 권서준의 희곡 속 대사는 4·4·4·2행(abab/cdcd/efef/gg)의 형식이었다.
영국에선 흔히 셰익스피어 형식이라고 부르는 정형시의 형태.
‘설마, 거기까지 생각한 걸까?’
크리스토퍼 말로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시대 형식의 시로 위로를 건넨다라...
‘이건 진짜...’
말문이 막힌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과 견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었다.
잔잔하게 시작한 스토리가 1막을 지남과 동시에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덩달아 송 교수의 놀람도 크기를 더해갔다.
***
저녁 무렵 망원동.
“잘 도착 했겠지?”
엄마는 걱정이 많았다.
권지연은 그런 엄마를 다독였다.
“잘 도착했다고 연락 왔잖아. 그리고 학교 교수님이랑 같이 갔는데 뭘 그렇게 걱정해?”
“그래도... 해외는 처음이니까 걱정되는 거지.”
“걔가 애야? 알아서 잘하겠지.”
“하긴...”
언제부턴가 아들의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항상 초조해하던 아들이 어느 순간부터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단순히 자신감이라고 말하기엔 더욱 든든하고 깊어진 느낌.
이유야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아들이 제 인생을 제대로 즐기는 것만으로도 부모 입장에선 마음이 놓일 뿐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했으니까.’
젊은 시절. 꿈을 포기하고 살아야 했던 남편과 자신의 한을 자식들에게만큼은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자, 이곳입니다.”
그때, 부동산 중개업자가 집을 보여준다.
방 세 개짜리.
해가 잘 들고, 악취도 없고, 화장실 물 내림도 좋은 곳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권지연이 신이 나서 엄마에게 달려온다.
“엄마, 이 집 어때?”
“좋네.”
지금까지 본 집 중 제일 마음에 들었다.
엄마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었다.
볕이 제일 잘 드는 남향.
봄바람이 시원하게 내치는 상쾌한 방 분위기.
엄마는 이곳에 앉아 글 쓰는 아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대견한 아들.
또다시 먼 타국으로 떠난 자식 걱정으로 이어진다.
‘외국 가면 집밥 생각난다던데... 먹는 건 잘 챙겨 먹으려나...’
엄마는 앉으나 서나 자식 생각뿐이었다.
***
어느새 학회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간 영국의 일정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낮엔 학회에 참석해 최근 문학계의 동향과 문제점, 중요 논의점을 파악했고, 오후엔 희곡 과제를 완성하는데 내 시간을 할애했다.
희곡 과제도 거의 완성된 상태.
이젠 마무리만 남겨둔 상태였다.
“오늘은 뭘 할 거니?”
왕립예술학교를 빠져나오는 길에 송 교수가 묻는다.
“아마, 2차 제출 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과제를 할 거 같습니다.”
“그때, 그 희곡 말이지?”
“네, 맞습니다.”
“그래...”
송 교수는 틈이 날 때마다 내 희곡 과제에 대해 확인했다. 직접적으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고스란히 그 관심이 느껴진다.
‘마치 그 시절, 내 작품을 보고 돈 주머니를 매만지던 극장주들의 눈빛을 보는 것 같아.’
언제나 그렇지만 내 작품에 누군가 뜨거운 관심을 보인다는 건 창작자로서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마 후반부를 보면 더 놀라게 될 터.
벌써부터 기분이 짜릿해진다.
물론 나 역시 단순히 과제 제출만을 위해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하는 건 아니었다.
‘대본만 미리 준비되어 있다면 언젠가 무대 위에 올려볼 수도 있을 테니까.’
두 번의 삶을 통해 확실히 깨달은 건 기회란 미리 준비한 자들만이 잡을 수 있는 신의 선물이라는 점이었다.
‘그 선물이, 언젠가 제 발로 찾아올 거야’
나는 자연스럽게 내 작품이 처음 무대에 공연되던 순간을 떠올렸다.
내가 창조한 세계가 무대 위에 펼쳐질 때 느껴지는 그 짜릿함.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쾌감이었다.
나는 손끝까지 뻗친 짜릿함을 만끽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막 학교를 벗어나려 하는데 한 여자가 급히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어? 송 선생님?”
40대 중반의 외모.
셔츠에 재킷 차림, 눈빛이 차가운 편이었다.
“서 감독?”
“네, 선생님. 저예요.”
차가운 눈빛이 송 교수를 보자마자 부드럽게 풀어진다.
“아, 이번 학회에 참석하신 거예요?”
“맞아. 초청을 받았거든. 자네는?”
“저는 연극 공연 때문에 판권 좀 구매할 게 있어서 직접 왔죠. 아시다시피 고매하신 분들과는 직접 만나기가 너무 어렵잖아요.”
“그렇군. 여기서 이렇게 만나니 더 반가운걸?”
인사를 주고받던 여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를 향해 옮겨진다.
“근데 이 잘생긴 분은 누구시죠?”
여자는 그제야 나에게 관심을 둔다.
“아, 소개가 늦었네. 이쪽은 우리 학교 학생 권서준, 이쪽은 오늘 극단의 서미연 총괄 디렉터.”
송 교수가 자연스럽게 소개해준다.
그런데 어딘가 이름이 익숙했다.
‘서미연 감독이면 연극계에선 꽤 유명한 연출가인데...’
자연스럽게 그녀의 필모그래피가 떠오른다.
서울대 석사, UCLA에서 박사를 딴 뒤, 미국 영화 연구소(AFI)에서 영화 수업을 받은 초엘리트.
게다가 연극 ‘페르소나’로 무려 42주 연속 매진을 기록한 연출가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학생이면 대학원생인가요?”
“아니야. 아직 학부생. 이번에 학회 경험차 같이 왔어.”
“학부생이요?”
서미연이 놀란 듯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표정을 떠올렸는지 급히 사과한다.
“미안해요. 송 선생님이 학부생과 학회 참가하시는 처음 봐서. 서미연 감독이에요.”
미안한지 재빨리 인사를 건네지만 조금 전과 달리 관심이 식은 게 보인다.
뭐,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솔직히 학부생에게까지 관심을 가지는 업계 관계자가 몇이나 되겠어.
“권서준입니다.”
“주로 어떤 작품을 써요? 소설? 대본? 시? 그것도 아니면 혹시 희곡?”
“아직은 두루두루 열심히 배우는 중입니다.”
“어머, 초면이라고 겸손한 것 좀 봐. 이 정도 센스면 글도 잘 쓸 거 같은데요?”
서미연의 질문에 송 교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 교내 백일장에서 일등을 했어. 그래서 함께 온 거고.”
“와... 진짜요? 송 교수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확 관심 가는데요?”
서미연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넸다.
“혹시 좋은 작품 있으면 바로 연락주세요. 장르 불문하고 언제나 대환영이니까.”
누가 들으면 엄청난 호의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기대감 없는 눈빛.
인사치레에 가까운 말투.
그저 옆에 있는 송 교수를 의식한 예의일 뿐이었다.
순간 묘한 승부심이 동한다.
‘과연 내 작품을 보고도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나는 받은 명함을 가볍게 쥐었다.
각진 사각형의 느낌에 손아귀에 느껴진다.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 기회.
나는 그 기회를 스스로 잡아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