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amazement - 놀라움 (3)
27.
***
다음 날.
우리는 호텔 로비에서 다시 만났다.
“좋은 아침이야.”
송영도 교수가 내 안색을 보며 묻는다.
하루 사이에 훨씬 더 친근해진 말투였다.
어제 일이 많이 고마웠던 모양.
아니나 다를까 어제 일을 언급한다.
“어젠, 고마웠다.”
송 교수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많은 것들이 생략되었지만 주제를 전달하는 데 부족함은 없었다.
송 교수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게 배려한 부분도 당연히 알고 있는 듯하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나른한 햇살이 쏟아진다.
“잠은 잘 잤어?”
송 교수가 묻는다.
“네, 푹 잘 잤습니다.”
“그래? 처음 오는 사람들은 시차 때문에 고생 좀 하던데, 서준이 넌 해외 체질인가 보네.”
해외 체질이라...
그렇다고 하기엔 처음 경험해보는 해외여행이었다. 놀랍게도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내가 가본 나라는 단 두 곳뿐이었다.
‘그것도 영국과 한국, 두 나라가 전부지.’
태어난 곳이 내가 경험해본 나라의 전부라니.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혹자는 그렇게 물을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나온 그 수많은 배경은 뭐지?
지중해를 배경으로 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실핏줄처럼 얽혀 있는 운하를 배경으로 한 「베니스의 상인」은?
뜨겁고 건조한 공기, 민둥산이나 다름없는 낮은 산줄기를 따라 자란 올리브 숲이 펼쳐진 아테네의 숲을 배경으로 한 「한여름 밤의 꿈」은?
시칠리아의 겨울을 담은 「겨울 이야기」는?
로마를 배경으로 웅변술과 수사학의 근원을 보여준 「줄리어스 시저」는?
수많은 작품 속에 등장한 다양한 나라들에 대한 그 세밀한 묘사는 대체 뭐냐고...
나는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통해 접한 먼 나라의 이야기.
떠돌이 극단을 통해 경험한 이국의 정취.
그리고 숱한 상인들의 허풍에서부터 그 세계를 떠올릴 수 있었다고.
덕분에 가보지 않은 곳, 경험하지 않은 세계를 서술할 수 있었다고.
‘그게 바로 인간의 상상력이 갖는 위대함이지.’
그리고 곧 그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시간이었다.
‘아마 오늘이었지?’
박성규 교수의 희곡 과제 1차 제출일.
그 마감이 바로 오늘 자정까지였다.
***
학회 2일 차.
예술에 대한 뜨거운 논의는 갈수록 열기를 더해갔다.
첫째 날이 문학계 인사 중심이었다면 둘째 날은 미술계 쪽 인사의 발표가 주를 이었다.
주제는 [그림과 문학의 상호관계성].
어려워 보이는 주제지만 핵심은 의외로 간단했다.
미술과 문학의 경계를 넘어 서로에게 끊임없는 자극이 되어야 한다는 것.
‘결국 예술은 장르를 불문하고 인간의 내면을 건드려 변화를 일으킨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그게 감정이든, 사상이든, 기억이든.
위대한 예술 작품 안에서 인간은 반드시 내면의 파문을 경험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미술을 통해 영감을 얻은 적이 많았다.
Love looks not with the eyes but with the mind.
And therefore winged Cupid is painted blind.
사랑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거야.
그래서 날개 달린 큐피드를 장님으로 그려놨지.
몽환적인 「한여름 밤의 꿈」속의 명대사.
이 대사 역시 오래된 그림 한편을 통해 얻게 된 영감이었다.
그림은 멈춰있으나 멈춰있지 않은 예술.
그 안에 담은 이미지를 통해 끊임없이 내면의 무언가를 자극하는 힘이 있었다.
‘정말 좋은 주제야.’
다시 한번 예술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 뜻 깊은 시간이었다.
감상을 되새기는데 송 교수가 다가온다.
“오늘은 어땠어?”
“좋았습니다. 특히 미술과 함께 고민하는 부분들이 더 좋았습니다.”
한국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하는 자극들이었다.
특히 어설픈 문창과 스터디와는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었다.
둘째 날 일정을 마친 뒤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어느새 나른해지는 오후 시간.
이제는 아껴둔 과제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선생님, 잠깐 나갔다 와도 될까요?”
“오후엔 특별한 게 없으니까 괜찮지. 왜?”
“오늘까지 제출해야 할 과제가 있어서요. 런던에 온 김에 둘러보고 싶은 곳도 있고요.”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 다녀와. 너무 늦진 말고.”
전날의 기억 덕분인지 송 교수는 흔쾌히 허락해준다.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돌려 호텔 밖을 바라봤다.
오래된 가로등으로 둘러싸인 거리.
고풍스러운 건물 사이에 켜켜이 쌓여있는 숨겨진 사연들.
그리고 매력적인 사람들과 이야기로 넘쳐나는 곳.
‘저곳에 내가 찾는 게 있어.’
나는 천천히 그곳을 향해 두 다리를 옮겼다.
***
강변을 따라 벤치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
카메라를 든 채 연신 풍경을 담는 관광객들.
아름답게 입맞춤을 하는 사랑스러운 연인들까지.
사람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런던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런던의 풍경.
내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바로 글로브 극장이었다.
처음 글로브 극장이 아직 남아있단 정보를 확인했을 때 믿을 수 없었다.
‘그곳이 내 청춘의 대부분을 바친 곳이니까.’
나는 택시를 타고 런던 샤프트베리가에 내렸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을 품은 채 천천히 모퉁이를 돌았다.
드디어 저 앞에 하얀 건물이 보인다.
갈대지붕 아래 거대한 요새처럼 서 있는 원형의 건축물.
“...”
그러나 그것은 글로브 극장이 아니었다.
크기는 1/3 정도에, 위치도 원래의 장소와 달랐다.
그 순간,
나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원래 글로브 극장이 아니구나...”
원래 글로브 극장은 화재로 전소됐고, 그 후에 복원한 것이었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확히는 재건된 글로브 극장이 있는 곳보다 조금 더 시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로운 건물로 들어차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공간.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래, 이쯤이었어.’
친구이자 동업자였던 리처드 버비지 형제와 6명의 주주가 함께 지었던 건물이었다.
나는 잠시 벤치에 앉아 글로브 극장을 올려다봤다.
글로브 극장.
이제는 역사 속에서 영영 사라져버린 나의 무대.
‘이곳에서 햄릿의 초연이 있었지.’
4대 비극 중 가장 먼저 쓰인 희곡이자 큰 사랑을 받은 햄릿은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햄릿의 명대사가 흘러나온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수천 번을 입에서 읊조린 완벽한 영국식 억양.
흔히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해석되지만 그건 많이 아쉬운 해석이었다.
‘단순히 삶과 죽음이 아닌 보다 고차원적인 고민을 다룬 대사였으니까.’
모두가 알다시피 햄릿의 목표는 숙부를 향한 복수였다.
만일 작품의 주제가 삶과 죽음, 복수의 문제였다면 죽여야만 했다.
그러나 기도 중인 숙부를 죽였을 때, 그가 만일 천국에 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진정한 복수가 될 수 있을까?
햄릿의 고민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숙부를 죽였음에도 천국에서 잘살게 된다면 그것은 복수의 완벽한 실패를 의미하게 되니까. 그로 인해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은 거고.’
우유부단해 보이는 햄릿의 고민은 당시 종교적인 문제와 존재론적인 질문이 함께 내재되어 있는 문학적 장치였다.
그로 인해 조금 더 정확한 해석은,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옛 기억이 떠오른다.
그 어려운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낸 리처드의 모습이었다.
‘마치 내 머릿속에 존재했던 햄릿이 실제로 살아난 기분이었어.’
나는 아련해진 옛 감동을 되새긴다.
자연스럽게 창작에 대한 욕구가 차오른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조금 더, 조금 더 이 영감이 영글어야 해...’
최고로 맛있게 익었을 때,
그때 펜을 잡아야 했다.
나는 조금 더 이 갈증을 즐기기로 했다.
아직 둘러보고 싶은 곳이 많이 남아있으니까.
***
나는 런던 곳곳을 내 두발로 누볐다.
영국 최초의 극장을 세웠던 템즈 강 건너편부터, 소네트와 작품을 썼던 장소들을 둘러보며 추억에 잠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바로 런던 세인트폴 성당 맞은편에 위치한 조지 인(George Inn)이었다.
현재 런던을 대표하는 오래된 펍 중 한 곳으로 나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인테리어, 조명,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이 자리만큼은 그대로였다.
‘이곳에서 크리스토퍼와 매일 같이 논쟁을 벌였지.’
당시 런던 공연계를 주름잡던 천재 작가 크리스토퍼 말로.
그는 나에게 있어 무서운 라이벌이자 동시에 같은 길을 걷는 동료였다.
우리는 맥주를 사이에 두고 인간으로서의 범주에서 벗어나 욕망에 휘말려 거의 좌절해 가는 인물에 대해 논하고는 했다.
공허한 예술이 아닌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제 모습을 작품에 담고자 하는 고민이었다.
‘그땐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치열한 논쟁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했고, 끊임없이 자극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천재 작가 크리스토퍼의 마지막은 허망했다.
‘술값 다툼 때문에 죽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오랫동안 묻어왔던 기억을 떠오르자 가슴 속에 묘한 기류가 인다.
옛 동료에 대한 그리움인가?
아니,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었다.
아련하면서 아쉽고,
허탈하면서 또 슬픈 감정.
그것은 전생에 대한 먹먹한 미련이자, 치열하게 타오르다가 허망하게 사라져버린 한 영혼에 대한 존경이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빛이 번쩍인다.
미약한 빛은 이내 마른 장작을 얻은 것처럼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래, 이거야...’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작가와 그의 발자취를 뒤따르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제목, 거장의 숨결.’
고귀한 영혼이 머물던 자리에서 갑자기 영감이 솟구친다.
나는 노트북을 꺼내 미친 듯이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타다닥.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어느새 30장짜리의 희곡 초안을 완성한 상태였다.
‘하아, 이거야.’
하얀 여백을 가득 채운 활자들.
그 아름다운 자태에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관통했다.
***
오전 7시 25분.
연구실에 출근한 박성규 교수는 모니터 앞에 앉아 한숨을 내쉰다.
‘역시나 엉망이군.’
문창과 3학년의 과제라고 하기엔 실망스러운 수준 때문이었다.
물론 오늘 내일의 일이 아니었다.
매년 반복되는 현상이라, 박 교수도 매너리즘에 빠져 대충 평가할 때가 많았다.
‘이런 애들 중에 노벨문학상을 탈 만한 애가 있다고? 말도 안 돼.’
박 교수는 어느 교수의 꿈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림도 없는 만용이었다.
그런데...
그때, 한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권서준...’
송 교수가 누구보다 주목하는 학부생.
게다가 이번 백일장에서 우수한 실력을 보여준 친구였다.
‘이 친구, 이번에는 어떠려나?’
시와 희곡은 엄연히 다른 분야였다.
그런데도 묘하게 관심이 흐른다.
결국 박 교수는 의심 반, 기대 반으로 권서준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응?’
순간 박 교수가 눈을 깜빡인다.
고작 첫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느낌이 달랐다.
‘뭐지, 이 완숙한 진행은?’
묘하게 끌어당기는 필력에 박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잔뜩 숙였다.
천재 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의 이야기.
차분하게 진행되는 내레이션이 자연스럽게 작품 안으로 끌어당긴다.
점차 주변의 소음이 사라진다.
박 교수의 온 신경이 희곡으로 향한다.
그리고 잠시 뒤,
박 교수는 르네상스 문학이 한창 꽃피우던 그 시절, 런던 거리 한복판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