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24화 (24/203)

# 24. monumental - 기념비적인, 엄청난 (5)

24.

***

다음 날.

종합일간지 연예란은 온통 난리가 났다.

순수소녀 멤버들의 예상치 못한 기자회견 때문이었다.

-두 얼굴의 한소진, 피해자 코스프레였나?

-순수소녀 ‘왕따’ 논란 새 국면 맞아.

-하율, “순수소녀 한소진 왕따 사건은 사실이 아냐. 한소진의 일방적인 갑질..”

[순수소녀의 멤버 혜민은 그간 멤버 간 왕따, 이성 교제 문제, 공연장 흡연 등 많은 논란에 대해 낱낱이 자기 생각을 밝혔다. 한소진이 공연전날까지 클럽에서 밤을 새우고, 공연 직전까지 흡연했다는 사실이 스태프들의 증언으로 밝혀지면서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자연스럽게 각종 커뮤니티도 불타올랐다.

-쓰레기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피눈물을 흘렸군요.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와, 한소진 진짜 소름 돋네. 가수가 아닌 배우를 하지.

˪웹드라마 도전했다가 어제 하차함.

˪그 작품 관계자는 지금 탭댄스 추고 있을 듯.

˪why?

˪똥 피했잖아.

모든 건 한소진이 뿌린 씨앗에 대한 결과였다. 당연히 거기에 동조한 무리도 함께 지탄받고 있었다.

-여기서 제일 잘못한 건 소속사 대표라고 생각하네요. 아마 그룹 사정에 대해 다 알고 있었을 텐데도 악의적으로 다른 멤버들을 피해를 종용했으니까요. 진짜 저긴 거르는 게 답인 듯.

˪유명해요. 가수 김정태도 목이 고장 날 때까지 굴렸다잖아요. 못 버티고 다른 소속사로 가니까 언플로 죽이는 게 특기고.

˪그 정도면 진짜 범죄 아닌가요?

결국 모든 건 인과응보였다.

선도, 악도 언젠가는 그렇게 드러나는 법이었다.

‘작품도 마찬가지지.’

당시엔 묻혀도, 그 작품성과 예술성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밝혀지는 법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기쁜 소식도 있었다.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

한층 성장한 신하율의 연기력 덕에 촬영은 일주일 만에 무사히 마쳤다.

촉박할 일정 때문에 촬영과 동시에 편집을 진행한 터라 3일 뒤에 업로드가 확정되었다.

[작가님, 드디어 오늘 올라갑니다.]

정 피디는 바쁜 와중에도 직접 메시지를 보내 웹드라마 업로드 일정을 알려줬다. 최종 편집본도 미리 보여주려 했지만 나는 극구 사양했다.

‘이미 결과가 뻔한데 굳이 확인할 필요 없으니까.’

한 번 탄력을 받은 신하율의 연기는 따로 얘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자신이 서연이라는 역할에 다가간 것이 아니라 서연이라는 역할을 가져와 자신 안에 담았다.

신하율만이 할 수 있는 연기.

신하율만이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였다.

생각보다 흡족한 결과였다.

그날 밤.

나는 과제를 마친 뒤 버스에 올라 휴대폰을 들었다.

늦은 퇴근에 지친 직장인.

나처럼 과제를 하다가 돌아가는 여대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1시간 전에 업로드된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를 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각선 앞에 앉은 여대생의 휴대폰 화면 속에 익숙한 비주얼이 보인다.

슬쩍 보니, 아니나 다를까「군필 고무신이 되었다.」였다.

내가 쓴 작품을 누군가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작은 휴대폰을 통해 두 남녀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군대 가는 하준을 바라보는 서연의 입장.

함께했던 모든 걸 이제는 혼자 해야만 하는 상황.

그 막막함과 슬픔 외로움.

게다가 어려운 가정사가 내레이션으로 이어진다.

버스 안에서 영상 보던 여대생이 슬쩍 눈가를 훔친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푹 숙여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다.

현재 고무신인 걸까.

어느새 몰입한 여대생의 어깨가 작게 흔들린다.

잠시 뒤, 버스 엔진소리에 묻혀 아주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순간,

목덜미를 타고 짜릿함이 올라온다.

‘그래. 이 느낌이지...’

나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쥔다.

내가 창조한 세계가 누군가의 내면에 파문을 만들어냈을 때, 그때야말로 창작자가 가장 짜릿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깊어가는 밤.

뿌듯한 기분과 함께 가벼운 전율이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

며칠 뒤, 커뮤니티는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로 도배가 되었다.

-알고리즘 미쳤다. 내가 곰신인 거 어떻게 알고 이런 거 추천해주냐고! 근데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 힘들었다는 걸 알게 됨. 밖에서 홀로 기다리는 나도, 그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친도... 우리 사랑하자. 210일 남은 고무신이.

˪저도요. 정말 이렇게 역지사지가 될 수도 있네요. 하준이가 서연이 사연 듣고 가슴 아파하는 것도 마음 아프고, 사랑하는 남친 두고 군대 결심하는 것도 너무 아프고...

-하아. 걍 띵작임. 무조건 보셈. 두 번 보고, 세 번 보셈.

˪이거 인정.

-진짜 너무 재미있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을 정말 세심하게 잘 표현한 것 같아요.

˪맞아요. 전 롱디라 군대보단 해외에 있는 남친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땐 정말 힘들었는데 이제 1년도 안 남았네요. 서로 아껴주고 배려해주면 시간은 가는 거 같아요.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황을 대입해 작품을 해석했다. 특히 어쩔 수 없이 롱디 (long distance)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을 대입해 고민했다.

-오래 사귀었다고 잘 아는 건 아닌가 봐요. 저도 제 남친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겠어요.

두 남녀 주인공의 서사를 통해 시청자들의 공감대가 폭발했다. 덕분에 10대, 20대를 넘어 30대까지 고른 시청 분포도를 보였다.

게다가 신인배우 신하율에 대한 관심도 뜨거웠다.

-와, 남친 앞에선 강한 척하다가 뒤돌아서서 눈물짓는데 내맘찢...

˪남친 두고 걸어가는 씬은 정말 대박이었음.

-연기 너무 좋네요. 별 기대 안 했는데 팬 될 듯.

˪여주 이름이 뭐예요?

˪서연.

˪아니 배우 이름.

˪신하율.

당연히 조회 수도 그에 따라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24시간 조회 수.

6화 합쳐서 무려 1410만 회.

소담 프로덕션 역사상 처음 있는 성과였다.

“하하하, 정 피디 수고했어.”

점심시간이 지나서 소담 프로덕션 대표가 환하게 웃으며 정은미 피디를 찾았다.

PPL 업체 관계자와 술 한잔을 했는지 대낮부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네.”

정 피디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아직까지도 대표에 대한 못마땅함은 가시지를 않았다.

“점심은 맛있는 거 먹었고?”

갑자기 챙겨주는 척을 하니 온몸에서 닭살이 올라온다.

“왜 그러세요? 하실 말씀 있으시면 그냥 하세요.”

그러자 대표가 목소리를 낮춘다.

“그.... 권 작가 말이야... 다음 작품도 우리랑 하는 거지?”

결국 속내는 뻔했다.

“대표님, 이제 와서 왜 이러세요? 언제는 권 작가 예술 병 걸려서 별로라면서요?”

“아, 내가 언제 그랬어?”

정 피디는 발뺌하는 대표를 말없이 쳐다봤다. 그러자 양심에 가책을 느낀 대표가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다.

“흠, 흠. 그거야... 대표로써 수익도 생각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지. 우리가 땅 파서 장사하는 거 아니잖아? 알 만한 사람이 그거 이해 못 해주면 섭섭하지.”

“제가 더 섭섭하거든요? 책임지라고 화내실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아, 진짜 왜 이래? 정 피디. 자, 자.”

대표는 다른 직원 몰래 봉투 두 개를 꺼내 정 피디 주머니에 찔러준다.

“하나는 정 피디 거고, 하나는 권 작가 뭐라도 좀 사주라고. 둘이 친하니까 잘 알 거 아냐. 무슨 의민지 알지?”

주름진 눈으로 윙크까지 날리는데 못 봐줄 지경이었다.

정 피디는 뒤집히는 속을 애써 참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만나봐야죠. 근데 제가 오늘은 좀 피곤해서 다음 주에나 한번 약속 잡아볼게요.”

슬쩍 던진 미끼.

눈치 빠른 대표가 얼른 문다.

“피곤해? 아 그럼 쉬어야지. 얼른 들어가. 아, 어서.”

“정말요?”

“물론이지.”

“그럼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이만 퇴근해보겠습니다.”

정 피디는 못 이기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사무실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아직도 해가 중천이었다.

이 시간에 회사 밖을 나오다니 믿기 힘든 호사였다. 자연스럽게 묵은 피로도 싹 가시는 기분.

‘가만, 이 짠돌이가 얼마나 챙겨줬으려나.’

슬쩍 봉투 안을 보니 제법 두둑했다.

그만큼 권서준 작가의 차기작에 관심이 있다는 방증이었다.

단순히 액수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받고 있다는 게 미칠 듯이 기분이 좋았다.

‘하, 이게 성공의 맛인가?’

곱씹을수록 짜릿한 쾌감이 밀려온다.

쫌생이 대표에게 얻어낸 모처럼의 휴식 시간.

정 피디는 당연하다는 듯 휴대폰을 들었다.

“아이고, 권서준 작가님!”

***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가 공개되고 며칠이 지났다. 나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내 작품을 봤다.

아쉬움 때문이었다.

물론 작품 자체는 훌륭했다.

서사도, 연기도, 연출도 합이 잘 맞았다.

‘그러나 완벽하진 못했지.’

다른 사람이 아닌 내 대본에 대한 불만족이었다. 마치 정상을 눈앞에 두고 그대로 내려온 기분이었다.

‘딱 한 번만 더 해보면 될 거 같은데...’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해 제대로 정상을 찍고 싶었다.

그때,

정 피디에게 전화가 왔다.

늦은 오후.

나는 고민을 안은 채 정 피디와 만났다.

“이건 저희 회사에서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백화점에나 팔 법한 고급 소고기 세트.

때깔이 영롱한 게 불 위에 살짝 그을려 먹으면 극락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 회사 분위기가 좋은가 보네요.”

“물론이죠. 장난 아니에요. PPL 달라고 사정사정해도 관심도 안 보였던 브랜드에서 먼저 연락이 온다니까요?”

정 피디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다 권 작가님 덕분이에요.”

“모두가 제 역할을 한 덕분이죠.”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게 조율하신 분이 권 작가님이시잖아요.”

정 피디는 흐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사람, 볼수록 센스가 있어.’

작품 보는 눈도 있고, 작품을 지키려는 의지도 마음에 들었다. 경력은 얼마 안 되지만 적당한 기회만 잡으면 크게 될 수 있는 자질이 있었다.

솔직히 이번 작품이 잘 된 것엔 정 피디의 연출력도 한몫했으니까.

“게다가 작가님은 신하율의 대한 확신도 가지고 계셨잖아요. 솔직히 전 나쁘지 않다 정도였지, 이 정도로 잘할 줄은 몰랐거든요. 벌써부터 광고주들이 줄을 서나 봐요.”

리처드 버비지와 닮은꼴 배우.

그와 관련해서 할 얘기가 참 많았지만 솔직하게 나누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운이 좋았죠.”

정 피디가 고개를 젓는다.

“운이 아니라 안목이 좋으신 거죠. 단순히 운이라고 말씀하시기에는 지나치게 확신하셨잖아요. 그 덕에 한소진도 피했고요.”

커피를 마시던 정 피디가 순간 뭔가 떠오른 듯 말을 잇는다.

“근데, 한소진 일은 정말 어떻게 아셨던 거예요?”

정 피디 입장에선 궁금할만한 내용이었다.

“뭐, 직접 만나보니까 왕따 당할 캐릭터는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조만간 터지겠구나 싶었죠. 물론 제 예상보다는 훨씬 빨랐지만.”

정 피디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그동안 숨긴 게 대단하긴 했죠.”

어느 정도의 인사치레가 끝나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잦아든다. 이제 슬슬 일어날 타이밍.

그런데 정 피디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순간, 애꿎은 커피잔을 매만지던 정 피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권 작가님... 혹시 괜찮으시면 저랑 한 작품만 더 하실래요?”

말투나 눈빛을 보니 진심이었다.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라 관심이 갔다. 커뮤니케이션도 그렇고, 연출력도 이미 확인한 상태라 나로서는 환영할만한 제안이었다.

“뭐, 조건만 맞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확답보다는 넌지시 의중을 떠본다.

순간 정 피디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최대한 힘 써보겠습니다. 안 그대로 대표님이 권 작가님 꼭 모셔오라고 신신당부했거든요. 보너스까지 챙겨주면서요.”

지난번엔 엄청나게 깨지는 거 같더니, 이번 작품을 통해 회사 내 입지가 많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다음 작품 땐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한 번 더 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좋습니다. 다만 대본 작업은 최대한 빨리 진행해야 할 겁니다. 제가 곧 어딜 좀 다녀와야 해서요.”

“스케줄은 전적으로 작가님께 맞출게요. 아직 기획한 것도 없으니까요. 근데, 어디 가시나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영국이요.”

***

나는 양손에 소고기 세트를 들고 집에 들어왔다. 마침 저녁 준비를 하던 엄마와 누나가 놀라서 쳐다본다.

“웬 소고기야?”

“제작사에서 줬어. 이번에 고맙다고.”

“뭐? 그 짠돌이 대표가, 소고기를 줬다고?”

누나가 놀라서 되묻는다.

“한편 더 계약할 생각이거든.”

“대박...”

누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길게는 아니고 6개짜리야.”

“첫 작품 대박 내고, 두 번째 작품까지 바로 계약했다고? 너 이 정도면 거의 로열로더 급 아니냐?”

그렇게 놀라기엔 아직 이른데.

앞으로는 더 놀랄 일이 많거든.

나는 미소로 속마음을 대신했다.

그러자 엄마가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 그러다가 몸 상해.”

엄마는 언제나 자식 걱정뿐이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면 늘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오로지 자신의 삶을 포기한 채 나와 누나만 보고 살았으니까.

엄마는 내가 공모전에 떨어졌을 때도 오히려 나를 위로해줬다.

‘떨어질 수도 있지. 사내자식이 뭐 그깟 일로 풀이 죽고 그래?’

차라리 ‘이 한심한 놈아, 다 때려치우고 취업이나 해!’라고 화를 내면 조금이나마 덜 미안할 텐데...

‘포기하지 말고 너 하고 싶은 일 다 해 봐. 살아보니까 그게 행복이더라.’

그렇게 말하는 엄마는 정작 혼자서 우리 남매를 키우느라 하고 싶은 일도 못 하고 살았다.

그런 엄마를 위해 이젠 효도해야지.

그게 나 권서준의 가장 큰 행복이었으니까.

“자, 얼른 먹자.”

우리는 작은 상에 둘러앉았다.

“이제 아들딸 덕에 소고기도 먹고, 내 인생 성공했네.”

자식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오른다.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괜스레 코끝이 시큰거린다.

치이익.

그 사이 고기 굽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불판 위에 놓인 소고기도 맛깔스럽게 익어간다.

입에 넣자마자 공기처럼 사라지는 부드러움. 한참을 먹었는데도 여전히 넉넉하게 남는다.

아,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성공의 열매는 참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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