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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23화 (23/203)

# 23. monumental - 기념비적인, 엄청난 (4)

23.

***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오후.

나는 늦지 않게 촬영장에 도착했다.

신하율은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달려 온 탓에 현장에 도착해서야 급히 메이크업을 했다.

나는 슬쩍 다가가 쪽대본을 보며 연습 중인 신하율을 바라봤다.

신하율은 새롭게 추가된 씬을 열심히 해석하고 있었다.

펜을 든 채 캐릭터에 대해 추가로 적는 내용들.

대본 속 대사와 지문보다 해석이 많을 정도였다.

‘역시, 캐릭터 해석에 대한 깊이가 있어.’

주어진 대사를 외우는 정도가 아닌, 캐릭터의 대사와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어? 혹시 권서준 작가님이세요?”

메이크업을 마친 신하율이 나를 먼저 알아봤다.

나는 가볍게 묵례를 했다.

“작가님, 정말... 제가 다시 출연하는 건가요?”

아직도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다시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그럼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바짝 군기가 든 모습.

훌륭한 신인의 자세였다.

“본인이 해석한 데로 확실히 연기해줘요. 맞을까 틀릴까 고민하지 말고, 하율 씨 머릿속에 떠오른 서연 그대로를 한 번 연기해 봐요.”

“근데... 그러면 톤이 좀 튄다고 하셔서...”

“그건 하율 씨가 주변 눈치를 보면서 주저해서 그래요. 이번엔 마음껏 즐겨 봐요. 난 하율 씨의 해석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신하율의 눈빛이 단단해진다.

꼭 다문 입술도 야무지고.

“제가 생각한 대로, 고민하지 말고 마음껏 즐겨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다소 긴장해 보였지만 이 정도는 필요한 긴장이었다. 나는 연습하는 신하율을 둔 채 추가한 씬을 확인했다.

2부 15씬 / 강변 / N

훈련소 입소 전날. 강변을 거닐며 즐거운 데이트를 하다가 서연이 하준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장면이었다. 극 중에서 두 사람의 갈등이 폭발하는 지점으로 세밀한 감정 연기가 중요했다.

잠시 뒤, 촬영이 시작되었다.

정 피디의 사인에 맞춰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는다.

고요한 촬영장.

정 피디가 큐사인이 보낸다.

“레디.”

“자, 잠시만요...”

긴장한 신하율이 입술을 꼭 문 채 나를 바라본다.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 자신 있게 가라는 뜻이었다.

내 사인을 받은 신하율이 입술을 야무지게 문다.

자신의 해석에 대한 근거를 찾은 신하율의 표정이 천천히 풀린다.

“후.”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볼을 두드리고, 눈을 깜빡이며 감정을 잡기 위해 노력한다.

“돼, 됐습니다.”

한 번 더 호흡을 고른 뒤 고개를 끄덕인다.

정 피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시 사인을 보낸다.

“레디, 액션.”

신하율은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살짝 가빠진 숨에 동공이 확장된다.

순간 0.5의 정적이 흐른다.

“...”

큐 사인이 떨어지자 생각은 의외로 단순해진다.

거대한 힘에 등 떠밀린 것처럼 상체 중심이 앞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순간, 신하율의 입에서 대사 한 마디가 툭 튀어나온다.

“이제야 알겠어.”

목에 걸린 가시를 내뱉듯 거친 대사였다. 그러나 한번 물꼬를 튼 대사는 마치 목에 기름칠한 것처럼 뒤따라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때 훈련소 앞에서, 왜 네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담담하지만 감정이 담긴 목소리.

마주하고 있던 배우가 자연스럽게 대사를 받아준다.

“무슨 말?”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말 말이야.”

화기애애한 연인들의 데이트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분위기가 바뀐다.

자연스럽게 멈추는 두 사람의 걸음.

짧은 정적이 흐르고, 몇 번이나 입술을 곱씹던 신하율이 입을 연다.

“우리, 그만 헤어지자.”

담담한 듯 내뱉었지만 그 속엔 보이지 않는 떨림이 있었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사랑하는 연인과 정말로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게... 최선인 거 같아.”

어느새 신하율은 서연이 되어있었다.

‘그래, 이거지.’

새롭게 추가된 씬은 의도적으로 서연의 캐릭터를 부각시킨 내용이었다.

화면으로 지켜보고 있는 정 피디도 서연에 대해 한층 더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 피디는 달라진 신하율의 연기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정 피디는 이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천천히 엄지를 치켜들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

“가끔 오는 네 문자를 기다렸고, 한 달에 한 번은 널 생각하며 선물을 보냈어. 몇 달에 한 번 만날 생각에 기뻐서... 잠을 설칠 때가 많았어. 그래. 그렇게, 난 널 기다렸다고...”

연기를 거듭할수록 안정적인 신하율의 모습. 누구보다 신하율 본인이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쏟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야. 다 끝인걸...”

“서연아...”

“우리, 그만하자.”

대사와 함께 호흡이 깊어진다.

어느새 두 어깨가 차분히 가라앉고, 무게 중심이 아래로 이동한다.

그리고,

뒤이어 옮기는 걸음에 힘이 실린다.

이별조차 각오한 절박한 걸음걸이.

들러붙는 미련을 떼어내기 위해 일부러 힘을 준다.

불과 서너 걸음.

그 속에 복잡한 감정이 묻어난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고스란히 렌즈에 담기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촬영장엔 시원한 외침이 있었다.

“컷! 오케이!”

평소보다 한 옥타브 올라간 정 피디의 목소리와 함께 촬영이 종료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막내 연출이 외치자 촬영장 안에 웃음꽃이 핀다.

신하율은 그제야 눈을 깜빡인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내가 지금 연기한 거 맞지?’

마치 자신 안에 무언가를 찾은 듯한 느낌. 몇 년 만에 느끼는 짜릿한 쾌감이었다.

“고생했어. 하율아.”

정 피디가 신나서 달려온다.

밝게 웃는 표정에서 오늘 자신의 연기에 대한 평가가 담겨 있었다.

“저... 괜찮았나요?”

“괜찮다는 말로 부족하지. 서연이가 이렇게 입체적인 캐릭터인지 내가 미처 몰랐네. 하아, 인정할게. 내 해석이 부족했다.”

진심 어린 칭찬에 신하율이 수줍게 웃는다. 그러나 정 피디의 칭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마터면 이렇게 연기 잘하는 친구를 놓칠 뻔했네. 권 작가님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권 작가님이요?”

“그래. 사실 우리는 캐릭터 해석 방향도 다르고 해서 반대했거든. 근데 권 작가님이 너로 꼭 가야 한다고 하시더라. 시작은 튀어도 갈수록 성장할 거라고. 추가 씬 시켜보면 왜 신하율이어야 하는지 알 거라고.”

“...”

순간 신하율은 자신이 어떻게 다시 기회를 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신하율은 다급히 고개를 돌려 권서준을 찾았다.

‘어, 어디 계신 거지?’

배우와 작가가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유독 촬영 기간이 짧은 웹드라마의 경우엔 그 정도가 심했다.

‘꼭 인사드리고 싶은데...’

이대로 촬영 끝날 때까지 못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 막 촬영장을 떠나려는 권서준의 모습이 보인다. 보자마자 신하율의 두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저, 저기요! 작가님!”

단번에 달려간 신하율이 간신히 권서준을 따라잡았다. 숨이 턱까지 올라왔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말씀 들었어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바라보는 권서준의 눈빛은 고요했다.

뒤이어 내뱉은 말은 더욱 침착했다.

“그럼 그만큼 열심히 해줘요. 이 작품, 나한테도 중요하니까.”

말투는 무심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따스함이 느껴진다.

신하율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해요.”

짧은 인사와 함께 쿨하게 돌아서는 모습.

평범한 행동에도 알 수 없는 아우라가 풍겼다.

신하율은 멀어지는 권서준을 향해 옅은 미소를 띤다.

수줍은 미소.

그 안에 담긴 건 고마움이었다.

***

‘괜찮은 친구야.’

나는 신하율에게서 내 친구 리처드의 모습을 봤다.

리처드 버비지(Richard Burbage).

나와는 세 살 터울의 어린 친구였다. 배우에서 극작가로 선회한 나와 달리 그는 연기 분야에서 제대로 꽃을 피운 천재 배우였다.

그러나 그 역시 처음부터 주목을 받았던 건 아니었다.

‘윌리엄, 나는 너무 두렵네...’

당시 글로브 극장은 총 3천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대도시 런던에서도 놀라울 정도의 규모.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의 무대.

그런 상황에서 두려움이란 어쩔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형벌이었다.

‘심장이 욱신거려 죽을 것만 같네...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야.’

리처드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늘게 떨리는 손끝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리처드에게 두 가지만 물었다.

‘대사는 외웠나?’

‘그거야 물론이지.’

‘충분히 연습은 했고?’

‘날이 새는 것도 모를 정도로 연습했다네.’

‘그럼 됐네. 가서 마음껏 즐기게.’

‘즐기라고?’

‘그래, 자네가 늘 하던 것처럼 말이야.’

‘...’

순간 리처드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왜 지금 이곳에 서게 됐는지, 그동안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 떠올렸다.

잠시 뒤,

리처드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고맙네.’

미소를 띤 그는 이내 성큼성큼 무대 가운데로 향했다.

당찬 걸음에 모든 관객의 이목이 그를 향해 집중된다.

이윽고 첫 대사를 흘러나온다.

“아름다운 당신이여...”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무대 안을 울린다. 장내를 사로잡는 중후한 분위기. 그 목소리는 관객뿐만 아니라 리처드 자신의 귀에도 들렸다.

순간, 수없이 고뇌했던 연기가 그의 몸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목소리는 안정되고, 호흡은 깊어진다.

동시에 리처드의 눈빛이 강렬하게 타오른다.

캐릭터를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눈빛이었다.

이후의 결과는 내 예상대로였다.

‘완벽한 연기, 완벽한 공연이었지.’

여왕 폐하께선 특별히 우리를 불러 칭찬할 정도였으니까.

그 뒤에 버비지는 어떻게 됐냐고?

말해 뭐할까.

‘내가 쓴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지.’

햄릿, 오셀로, 리처드 3세, 리어왕, 코리올라누스 같은 배역을 최초로 연기한 게 바로 리처드 버비지였다.

나의 페르소나와 다름없는 런던 최고의 배우. 그의 기운이 신하율에게서 느껴졌다.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으려나...’

지켜봐야 할 재목이었다.

***

논현동에 위치한 고급 오피스텔.

오랜만에 주말을 불태울 생각에 주차장으로 내려온 한소진이 차에 올랐다.

“소진아, 클럽 좀 그만 다니자. 그러다가 기자한테 걸린다고.”

참다못한 실장이 타이른다.

그러나 한소진은 귀찮아할 뿐이었다.

“걸리면, 회사에서 막아줘야지. 그러라고 계약한 건데.”

“하아...”

뻔뻔한 태도에 실장도 얕은 한숨을 내쉰다.

“참, 그건 어떻게 됐어? 애들 입단속은 잘 시킨 거지? 기사도 막았고?”

그룹 내 왕따설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당연하지. 너 빼면 어디 받아주지도 않는 애들인데 뭐 어쩌겠어.”

“내 말이. 그냥 얌전하게 있을 것이지. 왜 사람을 건드려?”

한소진은 입술을 이죽거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야, 그러다가 사진 찍히면 어쩌려고?”

“그거 막는 게 오빠 일이잖아.”

“하아, 너...”

한소진은 일부러 실장의 얼굴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콜록콜록.

기침하는 실장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표정이 굳어진다.

“가만, 그건 그렇고 왜 정 피디한테 연락이 안 와?”

“콜록콜록, 곧 오겠지.”

“오늘 촬영 있는 거 아니었어? 내가 너무 세게 말했나?”

“이제 와서 걱정하는 거야?”

“원래 이 바닥이 밟을 땐 제대로 밟아주라고 했다고.”

솔직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작은 웹드라마 제작사에서 자신 외에 다른 대안이 있을 리 없었으니까.

‘아마 내일쯤 찾아와서 싹싹 빌겠지.’

최대한 괴롭히고 괴롭히다가 마지못해 넘어가는 척할 생각이었다.

‘특히 그 싸가지 없는 작가는 제대로 밟아줘야지. 나이도 어린 게 감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 한소진은 SNS를 구경했다. 수많은 피드를 보는데 순간 낯선 이미지가 보인다.

‘응?’

두 시간 전, 소담 프로덕션에서 올린 공식 홍보 영상이었다. 어제까지는 분명 한소진으로 되어있던 「군필 여고생이 되었다.」의 홍보 영상 이미지.

그런데 주인공이 변경되어 있었다.

한소진의 얼굴은 사라지고 다른 배우의 얼굴이 박혀있었다.

그 의미는 너무나 명확했다.

‘설마, 이것들이 지금 날... 깐 거야?’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이 부르르 떨린다.

‘...가만 두지 않겠어.’

자기 소속사라면 작은 웹드라마 제작사 하나쯤을 뒤흔들 힘이 있었다.

이내 분을 참지 못한 한소진이 소리친다.

“오빠, 대표님한테 당장 연락해서 소담 프로덕션이랑 하는 거 다 그만두라고 해.”

그런데...

휴대폰을 보고 있던 실장의 표정이 창백해진다.

“야, 야... 소진아...”

“아, 뭐해? 얼른 대표님께 전화하라니까?”

실장은 얼른 휴대폰을 돌려 생방송 중인 기자회견 영상을 보여준다.

“이게 뭔데?”

높아진 한소진의 언성이 낮아진다.

기자회견 중인 사람들의 얼굴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순수소녀의 나머지 세 멤버였다.

“...뭐야? 얘들이 왜 여기 있어?”

“내, 내 말이... 얘들이 왜 여기에...”

잠시 뒤,

영상을 통해 멤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희는... 단 한 번도 소진이를 왕따 시킨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소진이에게 갑질을 당했을 뿐이죠...”

“나머지 멤버들이 피해자였다, 그런 말씀이신가요?”

“...네. 흑, 흑....”

멤버는 대답과 동시에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그동안의 루머를 뒤집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

기자회견장은 연이어 터지는 플래시로 새하얗게 보일 정도였다.

“마, 막았다며?”

“분명... 다 알았다고 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소리를 질러보지만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그 뒤로도 로드 매니저와 회사 소속 스태프들의 증언이 쏟아진다.

“저.. 미친 것들이...”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충격을 받은 한소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이잉.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의 휴대폰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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