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22화 (22/203)

# 22. monumental 기념비적인, 엄청난 (3)

22.

***

심상찮은 등장.

한소진은 꼰 다리를 까딱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본은, 수정됐나요?”

아랫사람 대하는 태도에 정 피디의 표정이 굳어진다.

“아직이요. 작가님과 의논하고 말씀드린다고 했잖아요.”

표정은 굳었지만 정 피디는 애써 예의를 지켰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더욱 심각했다.

“하아, 너무 하시네요. 그렇게 부탁을 드렸는데...”

부탁이라는 의미를 알까 싶을 정도로 무례한 태도였다.

재롱도 한두 번이지, 나는 이런 대화를 길게 이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떤 수정을 원하시는 거죠?”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그제야 한소진이 나를 바라본다.

“제 분량을 늘려주셨으면 해요. 아무래도 무명 배우에게 분량이 밀리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저희 대본을 읽고 출연을 결정하신 건 맞죠?”

“그거야 당연하죠.”

“그럼 이 작품의 재미 포인트가 뭔지도 알고 계시겠네요?”

“...”

한소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애초에 남녀 주인공의 감정선이 제일 중요한 웹드라마에서 상대 배우보다 분량을 더 달라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한소진의 예의 없는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럼, 수정 못 하시겠다는 뜻인가요?”

“배우와 작품 모두를 위해서 그게 나은 선택 아닐까요?”

“...”

한소진의 눈빛이 더욱더 매서워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담담히 마주했다.

어린 애 앞에서 기죽을 만큼 내 인생이 호락호락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

결국, 이기지 못한 한소진의 시선이 먼저 돌아간다.

그리고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됐어요. 그럼 수정하지 마세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정 피디의 얼굴에 희망이 떠오른다.

“네? 그럼... 이대로 가도 되는 건가요?”

그러자 한소진의 고개가 여지없이 돌아간다.

“그게 아니라 하차하겠다고요. 그 말씀 드리려고 찾아온 거고요. 아무래도 그게 예의인 거 같아서요.”

이 정도면 단어 공부를 다시 해야 하는 게 맞았다. 예의범절도 꼭 다시 배우고.

아무튼 한소진이 갑자기 터트린 폭탄에 정 피디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아, 아니 이렇게 나오시면 어떡해요? 만나서 얘기해 보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작가님이랑 저희 쪽 의견이 많이 다른 거 같아서요. 계속 요청하는 것도 죄송하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죠.”

내용과 달리 표정과 말투에선 아쉬운 기색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눈빛은 즐기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소담 대표님도 연락받으셨을 거예요.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뵙죠.”

“아, 저, 저기요! 한소진 씨!”

철컥.

두 사람은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대화를 나눠보니 한소진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매체를 통해 알려진 이미지와 너무 달랐다.

“아니, 오늘 촬영은 대체 어떡할 건데!”

정 피디가 결국 화를 토해낸다.

나는 흥분한 정 피디를 다독였다.

“아마, 정말로 안 할 생각은 없을 겁니다.”

“...네?”

“진짜 안 할 생각이었으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겠죠.”

“그럼 설마, 대본 수정을 압박하기 위해서 저런다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 이 바닥에 있으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요?”

“마음대로 흔들고 싶은 거겠죠. 초장에 눌러두면 그만큼 편하니까.”

한소진의 요구는 명확했다.

자신을 더 돋보이게 만들라는 것.

그러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 피디가 묻는다.

“제 생각엔 일단 하차해준 게 고맙네요.”

“...네?”

“오늘 모습을 보니 최근 불거진 순수소녀의 루머가 사실 같아서요. 곧 문제가 터지지 않을까요?”

“아...”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쪽 문제. 우리는 우리 작품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나는 문제의 핵심을 되짚었다.

“혹시 다른 배우 후보군은 없나요?”

“그게... 괜찮은 배우들은 스케줄이 있고, 나머지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배우들이라...”

말끝이 흐려지는 거 보니 딱히 떠오르는 대안은 없어 보였다.

문득 나는 며칠 전 정 피디와 나눈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중간에 배우가 교체돼서요. 촬영이 조금 늦어졌어요. 소진이라고 순수소녀 막내 멤버인데 혹시 아세요?’

서연의 배역이 한 번 바뀌었다는 내용이었다.

“참, 한소진 씨로 바뀌기 전에 서연을 맡았던 배우가 있지 않았나요?”

“아, 네... 신하율이라고 있었어요.”

“근데 왜 갑자기 바뀐 거죠?”

“...”

“연기를 못했나요?”

정 피디의 고개가 천천히 45도로 기운다.

“음. 못했다고 하기보다는...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아쉬웠죠. 그 때문에 NG도 많았고요. 그러던 차에 한소진 측에서 연락이 와서 바뀌게 된 거예요. 뭐, 두 사람의 인지도야 비슷한 수준이지만 아시다시피 한소진 씨 소속사가 워낙 대형기획사라...”

내 예상대로 위쪽의 압박으로 배우가 바뀐 케이스였다. 그렇다면 아직 희망이 있었다.

“혹시 신하율 씨 연기를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그거야 물론이죠.”

정 피디는 노트북을 돌려 이전에 촬영했던 장면을 보여줬다.

신하율 / 올해 22세

동양적인 미를 품은 신선한 페이스였다. 눈에 확 띄는 미모는 아니었지만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외모에 발성도 좋았다.

다만 정 피디의 말대로 중간중간 튀는 연기가 있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가끔 연기 톤이 너무 튀더라고요. 캐릭터 해석을 그렇게 한 거 같긴 한데... 좀 아쉬웠어요.”

정 피디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내 평가는 조금 달랐다.

‘이 친구, 캐릭터를 자기화시키고 있어...’

신하율은 배역에 자신을 맞추는 게 아니라 배역을 가져와 자신 안에 품는 스타일이었다. 그 덕에 오로지 신하율 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캐릭터가 엿보였다.

‘당장은 그 과정이 어색해 보일 수 있지만 조금만 시간이 주어지면 자기 옷처럼 연기할 수 있을 거야.’

가능성이 보였다.

아니, 배우로서는 엄청난 재능이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갈고 닦으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내가 직접 그 재능을 본 적이 있으니까.

‘그 친구의 어린 시절이 그랬지.’

오랜 벗의 얼굴이 떠오른다.

리처드 버비지(Richard Burbage).

당시 런던을 휘어잡은 대배우였다.

‘처음 그 친구의 연기를 봤을 때도 그랬었어.’

지금 당장 신하율과 비교할 순 없지만 처음 그 리처드를 봤을 때의 기운이 분명했다.

순간 묘한 안도감이 돌며 마음이 편해진다. 게다가 이미지 면에서도 신하율이 한소진보다 더 서연 역에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음. 일단 급한 대로 다른 배우들 스케줄 좀 알아볼게요.”

정 피디가 서둘러 일어나려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을 거 같아요. 그냥 이 친구로 가시죠.”

“...네?”

“이런 친구는 촬영이 이어질수록 성장할 겁니다. 특히 서연처럼 내면에 상처를 담고 있는 배역에 최적화된 배우나 마찬가지죠.”

정 피디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오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미 촬영장에서 경험해본 정 피디의 반응은 당연했다. 조금 더 확신을 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이죠. 정 못 미더우시면 제가 씬 하나 추가해드릴 테니까 한 번 시켜보세요. 그러면 왜 이 친구가 서연 역을 맡아야 하는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

“후.”

정은미 피디는 긴 한숨을 내쉬며 짐을 챙겼다.

갑작스러운 한소진의 하차 선언에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게다가 신하율로 가자는 권서준의 얘기는 썩 와닿는 제안은 아니었다.

‘대체 그 짧은 순간에 뭘 본 걸까?’

신하율을 고집하는 권서준의 말속엔 확신이 느껴졌다.

어차피 다른 대안도 없는 상황, 이럴 땐 밀어붙이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대표님 오시기 전에 얼른 나가자.’

괜히 머뭇거리다가 한 소리 들을 수 있었다. 서둘러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젠장.

대표였다.

“야, 정 피디. 이게 무슨 소리야? 한소진이 왜 하차를 해?”

야면 야고, 정 피디면 정 피디지, 야 정 피디는 뭘까.

왠지 두 배는 더 기분 나쁜 호칭이었다.

그러나 애써 입꼬리에 힘을 준 채 목소리 톤을 조정한다.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못하겠다고 선포하고 갔어요. 말릴 틈도 없었고요.”

순간 대표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무조건 대본 고쳐주겠다 하고 붙잡았어야지. 설마, 권 작가가 수정 못 하겠다고 한 거야?”

어이없는 오해에 화가 욱하고 올라온다.

‘그럴 틈도 없었다고요!’

그러나 월급쟁이 직장인은 참아야 할 게 많았다. 정 피디는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킨다.

그러자 대표는 제멋대로 권서준을 폄훼하기 시작했다.

“오냐오냐해주니까 아주 기고만장해서는. 이제 지가 네임드 작가라도 된 줄 아는 건가?”

참고 또 참았지만 이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발끈한 정 피디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애초에 그만둘 생각으로 찾아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권 작가님은 아무 말도 안 했다니까요?”

듣고 있던 대표가 순간 눈을 가늘 게 뜬다.

“뭐야, 정 피디... 가만 보면 은근히 권 작가 편이다? 너 혹시 권 작가한테 뭐 받았냐?”

“네?”

“아니면 원래 알던 사이야?”

“전혀요.”

“그것도 아닌데 왜 자꾸 그 친구 입장에서 변호하는 거야? 지난번 원고료 때도 그렇고, 대체 왜 이렇게 중심을 못 잡아? 정 피디 월급 주는 건 나라고. 어?”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도무지 상식이 통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대표님, 솔직히 저는 이번 작품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뿐이에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요.”

아무리 설명해도 한 번 가늘어진 대표의 눈매는 돌아올 줄을 몰랐다.

“됐고, 똥은 두 사람이 쌌으니까 작품 망하면 두 사람이 책임져. 알았어?”

대표는 잔뜩 화풀이만 하고 이내 멀어진다.

정 피디의 입에선 한숨이 흘러나온다.

“진짜 질린다...”

웹드라마를, 작품을 돈벌이로만 생각하는 대표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방식이었다.

“맞다, 하율이 연락처 알려달라고 했지?”

정 피디가 서둘러 권서준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후.”

정 피디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밀린 촬영 스케줄에, 한소진까지 하차한 상태.

반드시 작품이 잘 돼야만 했다.

불안했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 기대가 되기도 했다.

‘아니야. 권 작가님 선택이잖아. 혹시 또 몰라.’

지난번 원고료를 조율하다 느낀 기이한 기분.

노회한 정치가에서나 느낄 법한 침착함이었다.

‘이렇게 된 거 믿고 가는 수밖에...’

정 피디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솔직히 어느 배우가 됐든 하루빨리 이 작품을 찍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왜? 기다리기 싫어?”

소울 엔터테인먼트 연습실.

어두운 연습실에서 거친 대사가 들린다.

“싫으면 말해. 괜히 멋진 척하지 말고.”

무심한 척 내뱉는 대사.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건 진한 슬픔이었다.

“하아...”

연기하던 신하율이 대본을 내려놓고 주저앉는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냐...”

이미 배역이 교체된 상황에서 무의미한 연기 연습이었다.

그런데도 좀처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서연은 분명 이런 캐릭터 같은데...’

대본에 담긴 텍스트 너머로 서연이라는 존재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혹시, 내가 틀린 걸까?’

순간 옛 트라우마가 떠오른다.

4년 넘게 다닌 입시 학원에서의 기억들.

연기 수업을 빌미로 끝없이 정서적 학대를 받던 시절이었다.

탁탁탁.

작은 지휘봉이 신경질적으로 벽을 두드린다. 그러다가 탁, 큰 소리를 내며 멈춘다.

연기하던 아이들의 표정이 일순간 경직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원장을 향해 시선이 돌아간다.

‘넌 진짜 어떡하니? 얠... 어떻게 해야 하지?’

항상 미간을 찌푸린 채 골칫거리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 항상 화가 나 있는 상태의 원장에게 그 어떤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신하율, 연기가 장난이야? 너 계속 그따위로 연기할 거야? 그 해석이 맞는 거냐고!’

큰 키에 화난 표정, 압도하는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어깨가 움츠러든다.

‘니가 하는 건 연기가 아니야. 마네킹도 데려다 가르치면 너보단 낫겠다. 어휴.’

원장은 언제나 신하율의 캐릭터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같은 평가를 받고 말았다.

‘정말 내가 틀린 걸까...?’

애써 잡고 있던 자존감이 바닥을 친다.

자신을 비하하던 원장의 말이 사실인 것만 같았다.

막다른 골목에 갇힌 기분이었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

“안녕하세요. 신하율입니다.”

슬픔을 밀어내고 다시금 미소를 얼굴에 띤다. 속은 울고 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는다.

어느 오디션 관계자일지 모르니까.

그런데,

휴대폰 너머로 뜻밖의 소식이 전해진다.

“...네?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 촬영장으로요?”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만큼 믿기 힘든 연락이었다.

다시 한번 확인이 필요했다.

“호, 혹시 전화주신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네, 네...”

그 순간,

익숙한 세 글자가 들린다.

수십 번도 더 본 대본 맨 앞에 적혀있는 이름이었다.

“궈, 권서준 작가님이요?”

바로「군필 고무신이 되었다」의 작가였다. 그리고 이어진 한 마디는 더욱 놀라웠다.

-오실 때, 이 씬 좀 연습해주세요.

잠시 뒤,

짧은 에피소드 꼭지 하나가 도착한다.

‘이, 이건...’

대본을 확인한 신하율의 눈이 커진다.

바로 자신이 머릿속에 그렸던 서연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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