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21화 (21/203)

# 21. monumental - 기념비적인, 엄청난 (2)

21.

***

이른 아침, 소담 프로덕션.

밤을 꼴딱 새운 정은미 피디가 수건으로 툭툭 머리를 말리며 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둔 작은 거울에 얼굴이 비친다.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 서클.

볼 이곳저곳 울긋불긋 올라온 트러블.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를 촬영한 지 일주일 만에 얻은 결과물이었다.

“하아. 십 년은 늙어 보이네.”

갑자기 현타가 밀려온다.

아직 시집도 못 간 30대 초반.

갑자기 솟구친 불안감에 로션이나 바르려고 손을 뻗는데 휴대폰이 진동한다.

지이잉.

“아, 깜짝이야.”

고작 메시지 한 통 도착했을 뿐인데 정 피디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발신자를 확인하는데...

역시나,

예상한 사람이었다.

[감독님, 어제 통화한 게 계속 마음에 걸리네요. 처음 얘기를 했을 땐 분명 제 분량이 더 많을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겉절이가 된 느낌이라서요. 이렇게 제 역할이 비중이 작으면 그저 그런 웹드라마가 되는 거 아닐까요?]

이번에 주연을 맡게 된 한소진이 보낸 메시지였다. 어제오늘만 벌써 13통째 주고받은 장문의 메시지. 아무리 좋게 설명하고, 포장했지만 결국 핵심은 하나였다.

‘분량에 대한 불만이지.’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의 핵심은 남녀 주인공의 입장 차이에서 오는 기가 막힌 상황과 공감 가는 스토리였다. 그런데 한소진은 갑자기 원톱 정도의 비중을 원했다.

‘문제는 작품 콘셉트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거야...’

한두씬 이야 수정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대로 무리하게 수정하다가는 작품 자체가 망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하차까지 언급하는 한소진 측의 강경한 태도에 정 피디는 피가 마르는 상황이었다.

이제 와서 다른 배우를 찾기엔 일정이 촉박했다. 게다가 홍보 자료까지 배포된 상태라 변경은 말 그대로 나락행 열차를 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주연 배우 변경은 어렵고, 그렇다고 한소진을 그대로 끌고 갈 자신도 없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인 상황 속에서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후우.”

정 피디는 한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답장을 보낸다.

[아닙니다. 현재 대본 진행상으로 보면 적당한 비중이라 크게 문제 될 게 없거든요. 내부적으로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고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아요.]

고심 끝에 웃는 이모티콘까지 추가로 보냈다.

나름 기분 상하지 않게 하려는 최대한의 배려.

속이 뒤틀려도 어쩔 수 없었다.

힘이 없는 피디의 위치는 웬만한 매니저보다 못한 법이니까.

‘이 정도면 이해했겠지?’

그런데 득달같이 답장이 돌아온다.

[하아. 피디님... 지난번 저랑 미팅하셨을 땐 분명히 2부까지는 서연이 주인공처럼 안 보여도 3부부터는 확실하게 인상적이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그거 믿고 첫 웹드라마 작품인데도 하겠다고 한 거고요. 우리 작품이 잘 되려면 무엇보다 여주인 서연이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피디님이 잘해주실 거라고 믿고요.]

[네, 맞아요. 저도 그래서 더 열심히 고민하는 중이고요.]

[그럼 전 피디님만 믿고 갈게용. 저는 저한테 하신 피디님 말씀만 믿고 가니까 우리 서연이 잘 살려주실 거죵?]

후....

차마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널 살리면 작품이 죽는다고... 그걸 아직도 모르겠어?’

당장 전화를 걸어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예의를 차린 척하면서 얄밉게 속을 긁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는 게 여우가 따로 없었다.

하아. 그래도 어쩌나.

다시 말하지만 힘없는 피디는 웬만한 매니저보다 대우받지 못하는 게 이 바닥 실상인걸.

“야, 정 피디. 어떻게 됐어?”

그때, 마침 출근한 대표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다가온다.

주어, 목적어 다 빠졌지만 뭘 묻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대답할 게 없다는 거지.

“왜 대답이 없어? 제발 질문하면 빨리빨리 좀 답해라. 누구 숨넘어가는 꼴 보고 싶어?”

“... 아직 정리가 안 됐습니다.”

“야!”

대표의 고함이 사무실에 울려 퍼진다.

때마침 출근하던 직원들의 시선이 쏠린다.

그러나 이내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찾는다.

한결같이 ‘또 시작이다.’라는 표정이었다.

“피디가 배우 하나 컨트롤 못 하면 어쩔 거야? 너 미니가 꿈이라며? 고작 웹드라마에서, 그것도 걸그룹 멤버 하나 관리 못 하면서 무슨 미니를 하겠다는 거야? 어?”

참고 또 참았지만 이건 좀 억울했다. 결국 정 피디도 수건을 내려놓으며 입을 연다.

“회사 차원에서 압박 오니까 저도 할 말이 없는 거잖아요. 갑자기 하차하겠다고 하면 대안도 없는 상황이고요.”

“야, 그러니까 피디가 있는 거잖아? 그거 해결하라고 내가 돈 주는 거고. 그리고 이 친구야, 그거 니 작품이야. 막말로 그 대본 니가 들고 왔잖아? 아니야?”

“지금 이게 대본 문제가 아니잖아요?”

“배우가 문제면 대본이라도 바꿔서 연기하게 만들어야 할 거 아냐!”

대표의 언성이 더욱 높아진다.

정 피디는 억지로 할 말을 참는다.

“됐고, 그 권서준인가 뭔가 하는 친구한테 연락해서 다 수정하라고 해!”

“대표님, 수정이야 할 수도 있죠. 근데, 그게 작품 전체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니까 고민하는 거고요.”

대표가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찬다.

“이거 또 예술병 걸렸네.”

“네?”

“야, 우리 예술 하는 거 아니야. 작품? 작품성? 그딴 게 돈 벌어줘? 매출 올려줘? 그냥 화면에 한소진 얼굴 적당히 박아서 조회 수 빨고, PPL 받아오고, 그럼 되는 거야. 그게 다 정 피디 월급으로 돌아가는 거고.”

할 말이 없었다.

자기 생각이 틀려서가 아니라 애초에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대표는 자신의 논리가 통했다고 생각하는지 득의양양해져서 입을 놀린다.

“작가를 구워삶든, 배우를 구워삶든 암튼 하나라도 확실히 해서 기일 내에 촬영 마쳐. 알았어?”

지이잉.

그 순간, 대표 휴대폰이 울린다.

조금 전까지 큰소리 뻥뻥 치던 대표의 어깨가 자연스럽게 움츠러든다.

“아이고, 실장님. 네, 어쩐 일로 저한테... 네, 네... 아이고 우리 정 피디가 한소진 씨 연락에 답장을 안 하고 있다고요? 그럴 리가요. 네, 네. 제가 바로 답장하라고 하겠습니다.”

목소리와 달리 대표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짓을 했다. 빨리 답장을 보내라는 뜻이었다.

‘어후, 저 등신.’

직원 앞에서나 큰소리 뻥뻥 치지, 정작 상대 앞에서는 꼬리 말고 빌빌거렸다.

‘여긴 하루라도 빨리 나가야 해.’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대표작이 필요했다. 권지연 작가의 웹드라마로 첫 스타트는 잘 끊었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적어도 한두 개 더 필요해.’

정 피디의 입장에선 당연히 이번 작품이 그 기회였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사활을 걸고 있는 거고.

결국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른 채 한소진에게 문자를 보낸다.

[작가님과 오늘 만나기로 했습니다. 좋은 쪽으로 한번 논의해 볼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차마 바꿔주겠다고 할 순 없었다.

이게 그나마 최선이었다.

그러자 또다시 답장이 도착한다.

[그럼 저도 같이 만날까요?]

***

강의가 끌 날 무렵.

정 피디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작가님, 오늘 미팅 때 한소진 씨도 같이 만나는 거 괜찮으신가요?]

주연 배우까지 함께 만나는 미팅이라...

아마 작품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 대본에 문제가 있을 요소는 없었다.

‘특히 누구보다 대본에 만족했던 게 정 피디였으니까.’

그렇다면 변수가 생긴 게 분명했다.

대본을 바꿔야만 할 정도의 문제라...

아마도 배역의 비중과 관련된 문제일 확률이 높았다.

‘가만, 지난번에 갑자기 주연이 바뀌었다고 했었지?’

나는 백일장 당일, 정 피디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갑자기 순수소녀의 막내 한소진으로 변경된 배역. 내가 굳이 신경 쓸 요소는 아니었기에 넘어갔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분명 촬영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나서 바뀌었단 말이야.’

촬영 일정도, 당연히 비용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배역이 바뀌었다는 건 한 가지 상황뿐이었다.

‘누군가 개입한 거지.’

소담 프로덕션 대표이든, 아니면 한소진 소속사 윗선이든 누군가 힘을 써서 바꾼 게 분명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자연스럽게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야, 어딜 그렇게 급히 가? 밥 안 먹어?”

장현웅이었다.

“미안. 선약이 있어서.”

“무슨 약속? 너 설마... 여자 친구 생겼냐?”

순간 커지는 장현웅의 눈.

혈기왕성한 나이 아니랄까 봐 생각하는 거하고는.

“여자가 맞긴 한데, 여자 친구는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웹드라마 피디님이랑 약속이 있거든.”

“아... 쏴리.”

그제야 오해가 해소된 장현웅이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그 작품, 제목이 뭐야?”

나는 대답 대신 프로덕션 인타스에 올라온 홍보 영상을 보여줬다.

“대박... 벌써 촬영 중인 거야?”

“일주일 됐다고 하더라고요. 주연 배우가 바뀌어서 조금 늦어지나 봐.”

“맞다. 한소진이 출연한다고 했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현웅의 얼굴에 부러움이 떠오른다.

“진짜 좋겠다. 직접 쓴 대본을 한소진이 연기하다니...”

녀석의 눈동자에 동경의 기운이 어린다.

“너, 한소진에 대해 잘 알아?”

“당연하지. 그래도 요즘 꽤 인기 있는 걸그룹인데.”

그렇다면 더 의아했다. 괜찮게 나가는 걸그룹이 왜 갑자기 연기 쪽에 도전하는 걸까? 기존 배역을 밀어내면서까지 부자연스럽게.

“근데, 요즘 좀 말이 많긴 해.”

“왜?”

“그룹 내에 불화설이 돌고 있거든.”

불화설이라면 걸그룹 이미지에 치명적인 문제였다.

갑자기 호기심이 일어난다.

“멤버들이랑 한소진이랑 사이가 안 좋대. 하긴, 워낙 한소진 원톱 그룹 아니냐는 평가가 있으니까 멤버들이 왕따 시켰다는 소문도 있고...”

장현웅은 마치 연예부 기자가 된 것처럼 상세히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입장에선 꽤나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

“작가님!”

늦은 오후.

나는 오랜만에 정은미 피디를 만났다.

호칭은 자연스럽게 작가님으로 바뀌어있었다.

“갑자기 연락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그보다, 무슨 문제인 거죠?”

나는 용건부터 물었다.

“하아. 그게... 한소진 씨 회사에서 분량 문제를 지적해서요.”

정 피디에게 들은 내용은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하준, 서연 두 남녀 주인공 투톱 체재를 서연 원톱 쪽으로 몰자는 뜻이었다.

“피디님 생각은 어떠신데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정 피디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돼요?”

“물론이죠.”

입술을 곱씹던 정 피디가 이내 고개를 든다.

“솔직히 전 작가님 대본 털끝만큼도 건드리고 싶지 않아요. 이게 단순히 씬 비중을 넘어서 남녀 배역의 균형감이 완벽하거든요.”

흔들림 없는 표정과 말투를 보니 진심이었다. 다행히 작품 보는 눈도 좋은 편이었다.

“하아. 근데 그쪽에서 하차하겠다면서 고집부리니까 답이 없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정 피디는 본인 선에서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일단 한소진 씨가 곧 도착한다고 하니까 같이 만나보고 다시 의논해보죠.”

정 피디가 쓴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확인한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약속시각이 다 되었다.

철컥.

그리고 그때,

노크도 없이 회의실 문이 열린다.

선글라스를 낀 채 들어오는 긴 생머리의 여자, 그리고 험상궂은 남자 한 명이 보였다.

한소진과 그녀의 담당 실장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분이 작가님?”

“아, 네. 맞습니다. 작가님, 한소진 씨에요.”

나는 가볍게 묵례를 했다.

한소진은 나를 유심히 보다가 슬쩍 다리를 꼰다.

그리고는 선글라스를 반쯤 내리더니 툭 하고 말 한마디를 내뱉는다.

“어? 작가님이 생각보다 어리네요?”

내려다보는 시선.

깔아보는 말투.

짧은 순간이었지만 한가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왕따를 시켰으면 시켰지 당할 사람은 아닌데?’

기사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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