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fair play - 정정당당한 승부 (2)
15.
***
가난한 극작가 시절.
그때 마셨던 맥주 맛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런던 세인트폴 성당 맞은편이었지.’
그곳에는 내가 시골에서 갓 올라왔을 때 머물던 펍이 있었다.
조지 인(Gegrge Inn).
술집과 호텔을 겸하는 공간인데, 나는 그 낡은 숙소에서 대본을 쓰곤 했다.
‘그 시절, 언제나 나와 함께 한 게 맥주였었어.’
가난과 무시.
홀로 타지에서 겪는 설움까지.
그 모든 걸 날려버릴 수 있는 유일한 벗이 바로 맥주였다.
나는 그렇게 습작이 완성되면 공터에 간이 무대를 만들고 작품을 공연했다.
각양각색의 투숙객들도 주변에 둘러앉아 술을 곁들이며 자유롭게 연극을 구경했다.
내가 쓴 작품을 보고 웃고, 우는 관객을 보며 마시는 맥주는 그야말로 행복의 극치였다.
[양조장 맥주 한 잔과 목숨의 보증서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명예 같은 건 버려도 괜찮다.]
그 시절 내가 즐겨하던 말이었다.
물론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지만.
나는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맥주잔을 들었다.
꿀꺽꿀꺽.
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시원한 목 넘김.
나도 모르게 미간이 모인다.
“크으.”
그래, 이 맛이지.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추억에 젖어 잠시 맥주의 맛을 음미하는데 장현웅이 입을 연다.
“야,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솔직히 말해봐. 지난번 송 선생님 과제 말이야, 정말로 두 시간 만에 쓴 거야?”
장현웅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달리 다소 심각해 보였다.
“당연하지.”
“진짜로? 미리 써둔 거 아니고?”
장현웅은 믿기지 않는 듯 연거푸 물었다.
“그렇다니까.”
“하아...”
대답을 들은 장현웅은 긴 한숨과 함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진짜 현타 세게 오네...”
“왜?”
“야, 난 그 과제 하는데 3주가 넘게 걸렸어. 근데 네 글 보니까... 부끄러워지더라.”
장현웅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솔직히 부끄러운 걸 넘어서, 기분 엿 같다. 이게 재능 차인가?”
장현웅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녀석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왜 웃냐? 남은 속이 타는데?”
“웃을 수밖에. 니가 화낼수록 내 글이 좋았다는 뜻이니까.”
“하, 참나...”
기가 막힌 듯 바라보던 장현웅이 한숨을 푹 내쉰다.
그리고는 다시 나를 바라본다.
“너 대체 뭐냐?”
“뭐가?”
“며칠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달라진 거냐고? 그 여유는 또 뭐고?”
어쩔 수 없이 풍기는 자신감.
전생의 성정(性情)이 은연중에 드러난 탓이었다.
그렇다고 그 내용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좀 깨달은 게 있어서.”
대충 둘러댄 말이었지만 녀석은 그마저도 부러운 눈빛이었다.
“하아. 대체 나는 언제 깨달으려나...”
나는 좌절한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위로라기보다는 내 말에 집중시키기 위한 제스처였다.
“좌절할 시간도 아깝다.”
“나쁜 놈. 위로는 못 해줄 망정...”
“위로해서 글이 나아지면 백번도 더 해주지. 근데 아니잖아?”
“...”
그제야 녀석이 마지못해 고개를 든다.
“하긴, 네 말이 맞아. 좌절한다고 누가 알아주나? 그 시간에 한 글자라도 쓰는 게 도움 되지.”
눈빛을 보니 제법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참으로 단순한 성격.
속이 다 드러난다.
‘역시, 잘만 키우면 꽤 든든하겠어.’
특히 이 녀석의 원래 전공은 웹툰 관련 학과로 유명한 만화애니메이션 학과였다. 그것도 수시 33.75: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한 인재였다.
‘요즘은 그쪽이 좀 재미있어 보이더라고.’
2차 저작물로 주목받는 블루오션.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한번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바로 녀석이었다.
‘장현웅의 그림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감각이 있어. 그저 잘 그렸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물론 본인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약점인 스토리 부분만 커버하려다 보니 장점을 놓치고 있었다. 나는 그 부분을 자연스럽게 알려주려 했다.
‘누나와 함께 내 미래를 위한 중요한 포석이 될 존재니까.’
단순히 계산해 봐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맥주를 들이켰다.
“크으.”
이번에도 어김없이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기분 좋을 때 마시는 맥주는 언제나 일품이었다.
***
새벽녘.
문비 동아리엔 6명의 문창과 학생이 모여 한창 스터디 중이었다.
“밤의 길이를 이미지화시켜서 길 위에서 깨닫는 삶의 가치를 표현하려고 했어.”
서로의 의견을 내며 열띤 토론을 하는 분위기.
그러나 유독 송진호의 표정이 어두웠다.
‘지루해...’
송진호는 명치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애써 참아냈다. 더없이 무료한 스터디 때문이었다.
“밤엔 조금 더 생각에 집중할 수 있잖아. 그 시간대를... 강조하면 나름 괜찮을 거 같아서...”
동기는 자기 생각을 늘어놓으면서 연신 송진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 시선을 느낀 송진호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괜찮은 거 같아.”
첨언할 게 없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너무 뻔해서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가늠조차 어려웠다.
“정말? 고마워.”
그런데도 녀석은 그저 칭찬 한 번에 바보처럼 미소를 짓는다.
쯧쯧쯧.
자기 작품이 어떤 수준인지도 모르고.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모두 고생했다. 오늘은 이쯤 할까?”
“시간도 늦었으니까, 그럴까?”
하나둘씩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난다.
“역시, 신춘문예 당선자가 같이 스터디를 하니 자신감이 생기네.”
“내 말이. 이런 스터디는 어디에도 없을 걸?”
동아리방을 나서는 길.
송진호의 속마음은 모른 채 녀석들은 신이 나서 떠들었다. 반면에 송진호는 그들과 전혀 다른 결정을 하고 있었다.
‘이런 스터디라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겠어.’
게다가 녀석들은 의미 없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송영도 교수와의 학회 참가 자격이 걸려서인지 문창과 전체 분위기가 달라졌다. 기존엔 당연히 송진호의 몫이라 생각했기에 포기하고 있던 사람들도 어느새 희망을 갖고 저마다 스터디를 하고 있었다.
‘정말 웃겨. 니들이 아무리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거 같아?’
글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게 아니었다. 죽을 만큼 고민하고, 노력해야 간신히 감을 잡는 게 글이었다.
‘여태 글이랍시고 휘갈긴 것들이 이제 와서?’
자신의 눈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딱 한 번 틀렸다.
그게 바로 권서준이었다.
‘분명 별 볼 일 없는 실력이었어...’
노력은 가상했지만 결과를 내지 못하는 가련한 중생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성큼 다가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나는, 니가 내 위라는 걸 절대 인정할 수 없어.’
송진호는 이를 악문 채 대문호의 글을 읽었다. 길, 꿈과 관련된 위대한 작가들의 생각을 엿보기 위함이었다.
‘다 내 것으로 만들 거야. 그래서 누구보다 놀라운 글을 쓸 거야.’
어느새 캠퍼스 위로 해가 뜨고 있었다.
벌써 이틀째 새는 밤이었다.
***
이틀 뒤.
우리는 스터디 룸에서 다시 모였다.
장담한대로 장현웅은 9:1의 경쟁률을 뚫고 스터디룸 예약을 따냈다.
“그림은?”
“당연히 그려왔지. 근데...”
장현웅은 잠시 머뭇거렸다.
“진짜 그림 그려오는 게 맞는 거지?”
“왜? 못 믿겠으면 다른 스터디 구하던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아, 아니야. 무슨 섭섭한 소리를.... 자, 여기.”
혹여 내 마음이 바뀔까 서둘러 그림을 꺼내는 녀석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솔직히 전과생인 네 입장에서 이해 안 가는 게 당연해. 흔히 글을 쓴다고 하면 먼저 활자를 떠올리기 쉬우니까. 글을 쓰는 행위에 집중해서 무언가를 뽑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그건 착각이야. 글을 오래 쓴 사람들도 자주 하는 실수고.”
장현웅이 눈을 깜빡이며 묻는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먼저 이미지를 떠올려야지.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흔히 문학에서 말하는 심상(心像)이었다. 글을 쓰기 전 심상이 선명하지 않으면 글은 추상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시의 경우 그 이미지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당락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없는 걸 있는 척할 순 없으니까.’
간혹 그럴듯한 표현을 마구 섞어 뭔가 있어 보이는 척 꾸미는 사람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것도 문학적 소양이 얕은 사람들에게나 통하지, 글의 맥을 아는 사람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송영도 교수가 내 단편 소설, 「봄과 삶」을 읽고 단숨에 높이 평가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봄의 심상을 통해 삶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선명하게 전해졌으니까.’
특히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예대에서 문창과로 전과한 장현웅에게 보다 효율적인 스터디가 될 수 있었다.
[시제 : 길, 노래]
나는 백일장 시제를 떠올리며 장현웅의 그림을 살폈다.
피아노, 하프, 플롯 등 각종 악기가 한 줄로 길게 똬리를 틀 듯 이어진 그림이었다.
‘다양한 악기들의 모습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노래를 상징화시켰어. 그 악기들의 연결을 통해 길이라는 시제를 담았고.’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엄청나게 좋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노래와 길이라는 시제를 담았을 뿐이었다.
“...왜? 별로야?”
내 표정을 살피던 장현웅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좀 아쉬워서. 구체적으로 네가 말하고자 하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랄까?”
“흠. 그럼 어떡하지?”
“먼저 시제를 보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그려봐. 단순히 외형이나 색깔 말고, 냄새, 맛, 그리고 촉감까지.”
“촉감까지?”
“어.”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뭔가 깨달은 듯 장현웅의 눈이 커진다.
뒤이어 머릿속에 떠오른 심상을 옹골차게 매만지는 게 눈에 보인다.
‘다행히 이해력이 빠른 편이야.’
그림으로 이미지화를 먼저 알려주고 뒤이어 감각적인 심상을 알려주는 방식이 주효했다.
“이제 감이 좀 와?”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장현웅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 완전. 너 진짜 대박이다. 웬만한 선생님들보다 잘 가르치는데?”
그거야 당연하지.
내가 가르치고 지도한 사람이 몇 명인데.
감탄사를 내뱉던 장현웅이 이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쳐다본다.
“근데, 네 작품은 스터디 안 해도 돼?”
“난 따로 준비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지금은 심상을 이미지화시키는 거에만 집중해.”
“...고마워서 그렇지. 이 정도면 솔직히 거의 과외 아니냐?”
장현웅의 표현은 정확했다.
스터디라 쓰고 과외라고 읽는 게 맞았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도 손해는 아니었다.
‘가르치는 것만큼 어떤 분야를 깊이 깨우치게 되는 방법도 드무니까.’
배우는 건 수동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지만 가르치는 건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를 설득해야 하므로 수많은 가짓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무수한 가지들은 결국 작품의 깊이가 되고, 폭넓은 소재가 되었다.
‘동시에 현대 시의 기조를 체득하는 중이고.’
조금씩 내 안에 쌓이는 경험치를 토대로 백일장에 낼 작품을 구상하는 중이었다.
애초에 장현웅과 스터디를 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
저녁 무렵.
나는 기분 좋게 스터디룸을 나섰다.
‘좋아, 모든 게 순탄해.’
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백일장 스터디뿐만이 아니었다.
‘아마 오늘 밤이었지?’
오늘이 바로 누나의 웹드라마가 처음 공개되는 날이었다.
지이잉.
그때,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역시나 누나였다.
이래저래 양반은 못 되는 사람이었다.
-드디어 오늘 밤이야...
점 세 개가 누나의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누나는 마치 수능을 앞둔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망하면 어떡하지?
누나는 벌써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었다.
나는 그런 누나를 조용히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테니까.]
[정말?]
[나만 믿어.]
[응...]
대답 뒤에 또다시 따라붙는 점 세 개.
그 안에 담긴 건 초조함, 불안함,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아니, 애초에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 대본을 수정한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
근거 있는 자신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감정은 기대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