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2화 (12/203)

# 12. marketable - 잘 팔리는, 시장성이 있는 (2)

12.

***

사흘 뒤.

나는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 총 6화 대본을 모두 정 피디에게 전송했다.

‘휴우. 모처럼 불태운 시간이었어.’

학교 수업을 듣고, 과제를 제출하고, 게다가 원고까지 쓰느라 하루에 세 시간도 자지 못했다.

그런데도 기분이 상쾌했고, 뿌듯함이 밀려온다.

‘이게 글 쓰는 매력이지.’

그러나 인간인 이상 잠을 이길 수는 없었다. 나는 밀린 잠을 해결하기 위해 침대로 향했다.

눕자마자 스르르 봄볕처럼 젖어 드는 잠기운에 온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온 에너지를 쏟고 침대에 스며들 듯 찾아오는 잠. 달콤하면서 절로 웃음 짓는 그런 잠.

그래, 꿀잠이었다.

***

이튿날 오전.

정은미 피디는 권서준이 보낸 완성된 대본을 손에 들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확인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적절한 가치만 인정해주시면 정 피디님과 작업하고 싶네요.

적절한 가치라.

수많은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금액이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 해줄 수 있는 건 백만 원이 최고야.’

경력 작가들의 평균 고료가 백만 원에서 플러스, 마이너스 정도였다.

그런데...

‘어째 그 금액이면 안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특히 통화를 끊기 직전에 했던 말이 자꾸 뇌리에 남았다.

-뭐 이번 기회가 아니라고 해도 언젠간 한 번 정 피디님과 해보고 싶어요.

워딩은 배려심 가득한 말처럼 보였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압박감이 전해졌다.

‘마치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곳을 찾겠다는 말처럼 들렸단 말이지...’

정 피디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밀어내며 서둘러 대본을 확인했다.

‘역시... 대박이야.’

10분짜리 총 6부작 대본.

스토리, 개연성, 캐릭터.

3박자가 모두 완벽했다.

“대표님! 대표님!”

정 피디가 대본을 들고 서둘러 대표를 찾아갔다.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지난번에 보여드린 권 작가 동생이 쓴 대본 있잖아요. 최종고가 도착했어요.”

“뭐, 벌써?”

대표가 벌떡 일어나 대본을 받는다.

이미 3부까지 본 상태라 대본을 확인하는 눈이 빠르다.

1시간쯤 지나자 대표가 고개를 든다.

대표의 반응도 정 피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아. 정 피디, 이건 무조건해야 돼. 무슨 말인지 알지?”

“그래서 제가 이렇게 가져왔잖아요. 원고료만 잘 조율하면 무조건 저랑 작업한다고 했거든요.”

이쯤에서 중요한 건 바로 금액이었다.

그런데 돈 얘기가 나오자 대표의 표정이 싹 바뀐다.

“초짜 작가지? 대충 오십 정도 불러봐.”

대본의 퀄리티를 보면 오십은 너무했다.

내키지 않는 정 피디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적은 거 같아?”

“네.”

딱 떨어지는 정 피디의 대답에 대표가 다시 입을 연다.

“그럼 뭐, 백만 원 맞춰준다고 해. 기성작가 수준의 대접이라고 하면서 생색도 좀 내고.”

그러나 이번에도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가 안 한다고 하면요?”

“미쳤어? 100만 원인데 왜 안 해?”

“애초에 대본도 제가 부탁해서 가져온 거예요. 아까 통화할 때 보니까 금액 마음에 안 들면 다른데 투고할 생각도 있는 거 같고요.”

“뭐? 투고?”

대표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본인도 아는 거지. 이 대본이 다른 데 가는 순간 그쪽에서도 난리가 날 거라는 걸.

“그럼 정 피디는 얼마 생각하는데?”

“적어도 백 이상은 줘야 해요. 그래야 확실히 도장 찍을 수 있을 거 같아요.”

“흠. 그럼 백이십?”

“...”

대표의 물음에 정 피디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설마, 백오십?”

짠돌이 대표 입장에선 경력직에게도 흔히 주지 않는 거금이었다. 그런데도 정 피디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잘 생각해보세요. 만일 금액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계약하지 않으면 아마 두고두고 후회하실 걸요? 솔직히 전 다른 데에서 대박 터트리면 배 아파서 못 살 거 같아요.”

“야, 그래도 백오십 이상 주는 건 오버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이번엔 대표가 생각에 잠긴다. 솔직히 이 정도 퀄리티의 대본은 1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들었다. 아니 웹드라마 사업을 시작한 지 햇수로 6년째지만 처음 잡은 대어였다.

“흠.”

잠시 고민하던 대표가 이내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목소리를 낮춘다.

“이백...”

짠돌이 대표의 입에서 놀랄만한 금액이 흘러나왔다.

“이 이상은 죽어도 안 돼.”

금액을 들은 정 피디의 얼굴에도 화색이 돈다.

“그 정도면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은 건 안 돼. 무조건 계약해야지. 알겠어?”

“네!”

힘차게 대답한 정 피디는 곧바로 자리로 돌아와 계약서를 출력했다.

그런데 한참 세부 조항을 확인하던 정 피디는 순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원고료를 가지고 대표를 설득하는 거지?’

피디는 어쩔 수 없이 회사 쪽일 수밖에 없었다. 원고료를 깎으면 깎았지, 더 챙겨주려고 하진 않는다.

‘내가 뭔가에 홀린 건가?’

고작 두 번의 만남.

그리고 아까 나눈 짧은 통화.

그 가운데 풍기는 기운이 은연중에 정 피디를 압박하는 느낌이었다.

말투와 행동.

미련 없는 듯한 자세까지.

자신도 모르게 초조해지고 말았다.

‘나이는 어린데, 마치 노회한 사업가를 대하는 기분이랄까...’

정 피디는 이내 잡생각을 털어냈다.

어찌 되었든 이 작품만 손에 쥐면 목적은 달성하는 셈이었다.

‘이 작품이 내 동아줄이 될 거야.’

미니 시리즈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

자신의 중요한 포트폴리오가 될 작품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정 피디는 대표의 승인을 받은 원고료를 기준으로 급히 최종 계약서를 작성해 권서준에게 전송했다.

‘제발...’

신인 작가 치고는 최고 대우.

그런데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만큼 탐이 나니까...’

***

점심 무렵.

느지막하게 일어난 나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이틀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지만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난 것으로도 체력이 회복되었다.

‘젊음이 좋긴 해.’

온몸을 휘도는 이 기운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렇다고 이 축복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건강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걸 이미 경험해봤으니까.

나는 오후 수업을 위해 등교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그때, 낯선 방문자가 집에 도착했다.

“퀵 왔습니다.”

정 피디가 보낸 계약서였다.

‘등기 우편이 아닌 퀵으로 보낸 걸 보니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달리 말하면 그만큼 내 대본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었다.

서류 봉투를 열어 계약서 내용을 살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웹드라마 대본 계약서>

갑 : 권서준

을 : 소담 프로덕션

제작 형식 : 웹드라마 6회 예정.

제작 길이 및 편수 : 회당 10분물 6회

‘이건 이미 아는 거고.’

쭉 훑어보는데 드디어 숫자가 나온다.

작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원고료였다.

‘오호.’

금액을 보자 저절로 눈썹이 성큼 올라간다.

기성도 아닌 신인 작가에게 주어진 회별 원고료는 무려 200만 원이었다.

나는 기타 내용도 세부적으로 확인했다.

<지급 시기별 원고료>

계약금 : 200만 원.

1차 중도금 : 400만 원.

2차 중도금 : 600만 원.

합계 :1,200만 원.

회별 200만 원이라는 특급 대우.

백만 원 이상을 원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금액이 책정되었다.

‘정 피디가 힘을 많이 썼나 보군.’

은연중에 압박했던 게 주효하게 먹힌 모양이었다. 나는 나머지 계약서 내용도 꼼꼼하게 살폈다. 다행히 독소 조항도 없었고, 일반적인 계약 내용이었다.

‘서명만 하면 되겠어.’

나는 만년필을 쥐고 기분 좋게 서명을 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영문 필기체가 흘러나온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시절의 서명이었다.

‘이런.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니까.’

나는 얼른 서명을 멈췄다.

그러나 이미 ‘S’자가 들어간 상태. 나는 내친김에 ‘S’자에 이어 자연스럽게 이름 ‘준’을 섞은 서명을 만들었다.

‘제법 괜찮은데?’

얼결에 만든 사인이지만 마음에 들었다.

나는 새로운 서명과 함께 꼼꼼하게 간인(間印)을 찍고는 다시 퀵으로 정 피디에게 계약서를 보냈다.

“이제 기다리면 되겠군.”

권서준으로써 하게 된 첫 번째 계약.

물론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오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길.

정 피디에게서 연락이 왔다.

-작가님! 최종적으로 계약처리 됐고, 계약금과 잔금 포함 전액 입금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려요.

최종고를 모두 보낸 상태라 내 통장엔 1,200만 원이라는 금액이 한 번에 꽂혔다. 학생 신분으로는 쉽게 벌 수 없는 거액의 원고료. 자연스럽게 어깨가 올라간다.

‘당장 이사 가기엔 애매하지만, 그래도 몇 달 월세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어.’

처음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돈만 보고 무지성으로 삶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뒤따라오는 거야. 급할 필요 없어.’

가장 중요한 행복의 조건은 가진 것을 충분히 누리고 즐기는 것. 그리고 나는 그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돈을 받은 나는 제일 먼저 지난번 누나와 함께 갔던 전자 대리점을 찾았다.

“어? 지난번에 누나랑 오신 손님 아닌가요?”

직원이 나를 알아본다.

“절 기억하시네요?”

“아, 네. 키도 크시고, 이목구비도 뚜렷하셔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잘생겼다는 우회적인 표현.

권서준으로써는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하긴, 요새 들어 거울을 보면 이전보다 훨씬 더 인물이 훤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이게 다 자신감의 차이인가?

“혹시, 제품에 문제가 생겼나요?”

직원이 묻는다.

“아닙니다. 같은 모델로 하나 더 구매하고 싶어서요.”

“아, 그렇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이 신이 나서 노트북을 하나 가져온다.

“197만 원이었죠?”

“네. 근데, 이번엔 제가 직원 할인가 좀 해드릴게요.”

예상 못 한 호의에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왜요?”

원래는 고맙다는 답을 해야겠지만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 그러자 직원이 뒷머리를 긁으며 대답을 잇는다.

“그때 두 분 모습이 참 보기 좋았거든요. 저도 글 쓰는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두 분 보면서 잘 챙겨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아마 우리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굳이 거절할 필요 없는 호의이기에 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노트북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뭐야, 이게?”

내가 노트북을 내밀자 누나 눈이 커진다.

“몰라서 물어? 노트북이잖아.”

“너, 설마 벌써 계약금 받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막 쓰면 어떡해? 그거 얼마나 된다고. 아껴뒀다가 너 사고 싶은 거 사고하지...”

이 바닥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누나이기에 할 수 있는 걱정이었다. 대답하기도 귀찮고 해서 나는 계약서를 보여줬다.

“회별... 이, 이백?”

계약서 내용을 확인한 누나의 눈이 배는 커진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

***

‘저, 정말로 1,200만 원이야.’

동생의 통장 잔고를 확인한 권지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막 대본을 쓴 동생이 작품을 계약한 것도 모자라 벌써 경력 작가 이상의 대우를 받다니...

놀랍다 못해 경이로울 정도의 성장세였다.

“물론 이번엔 내가 누나한테 투자하는 거야.”

“어, 어?”

뒤늦게 정신을 차린 권지연이 되물었다.

“이번엔 내가 누나한테 하는 투자라고. 그러니까 분발해야 할 거야.”

“투자라고? 나한테? 왜?”

“같이 성공해야지.”

“그게 무슨...”

동생은 대답도 없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왜 스산한 느낌이 드는 거지?

앞으로 뭔가 많이 고생할 것 같은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건 또 왜일까?

어느 순간부터는 말투에서조차 알 수 없는 무게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얘 천재 아냐?’

처음 자신의 대본을 수정했을 땐 우연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로 동생의 작품을 봤을 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니야. 얜 진짜 천재야...’

번데기를 찢고 나온 나비처럼 동생은 큰 날개를 활짝 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날갯짓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그런데 정말로 앞머리가 휘날린다.

‘...어?’

놀란 권지연이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막 문을 닫고 들어온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 귀신이라도 봤어?”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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