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1화 (11/203)

# 11. marketable - 잘 팔리는, 시장성이 있는 (1)

11.

***

다음 날.

나는 2화 대본을 추가로 쓴 뒤 누나와 함께 정은미 피디를 다시 만났다.

“벌써 2화까지 쓰셨네요?”

정 피디가 놀란 듯 묻는다.

“원래대로면 3부까지 완결 지을 수 있었는데, 이놈의 노트북이 말썽을 부렸네요.”

진짜였다.

자꾸만 전원이 나가는 낡은 노트북 때문에 원고를 몇 차례나 날렸다.

“이틀 만에 웹드라마 대본 1개도 엄청난 건데... 집필 속도가 정말 빠르시네요.”

혀를 내두르던 정 피디가 이내 출력한 대본을 집어 든다.

정 피디가 대본을 읽는 사이, 누나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꾹 찌른다.

“노트북 이상 있으면 말을 하지. 내 거라도 빌려줬을 텐데...”

“누나도 원고 쓰고 있었으면서 누가 누굴 챙겨?”

“그래도...”

“됐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러나 누나는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듯 내 노트북을 힐끗거렸다.

“와...”

그때,

정 피디의 감탄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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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

로그 라인 : 전역한 지 한 달 만에 고무신이었던 여친이 입대를 선언한다.

1년 6개월의 시간.

꾸역꾸역 버텨낸 하준은 서연이와의 행복한 캠퍼스 낭만을 꿈꾼다.

[이제부터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그런데...

전역에 대한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여친이 갑자기 부사관 입대를 선언한다.

[나 보러 지금 고무신이 되라고?]

하루아침에 입장이 뒤바뀐 하준과 서연.

당황한 하준은 어떻게든 서연이의 마음을 되돌리려 하지만 쉽지 않다.

[난 아무 말 없이 오빠 기다렸어. 설마, 못 기다리겠다고 하는 건 아니지?]

일반 병사보다 훨씬 더 긴 부사관의 복무기간.

그렇다고 못 기다리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너무 사랑하니까...]

이런 젠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하준.

복학과 동시에 꿈꿨던 캠퍼스 로맨스가 산산이 조각나기 시작한다.

[대체 왜 부사관이 되겠다는 선택을 하게 된 걸까?]

그제야 서연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기 시작하는 하준.

그런데 서연의 사연을 알아갈수록 점점 더 놀랍기만 하다.

천사와 다름없던 고무신 여친이 갑자기 군대 선언을 하면서 벌어지는 역 고무신 프로젝트.

[과연 그녀에겐 어떤 아픔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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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결 깔끔하게 떨어지는 플롯.

거기에 살짝 가미된 색다름이 신선한 재미를 선사했다.

대본을 읽어 내려갈수록 정 피디의 감탄사가 자연스럽게 길어진다.

“와...”

이내 2화 대본의 마지막 장이 넘어간다. 잠시 허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정 피다가 입을 연다.

“1화 대본을 보고 감이 오긴 했는데...”

고개를 젓던 정 피디가 입술을 질끈 물고는 나를 바라본다.

“이 작품, 저희랑 계약하시죠?”

대본을 앞에 둔 정 피디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표정과 눈빛에서 결코 대본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나쁘지 않군.’

누군가 내 작품을 저리도 애달프게 원한다는 건 그 어떤 칭찬보다 가슴 설레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쉽게 손을 잡는 건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제대로 결과물을 낼 사람인지 확인해야 해.’

돈 몇 푼 받겠다고 섣불리 계약하는 건 망생이나 하는 짓이었다. 내가 손댄 모든 작품이 내가 기대하는 결과를 내야만 했다.

“피디님이 보시기엔 어땠나요?”

나는 일부러 표정을 감춘 채 되물었다.

내 표정이 너무 잔잔해서인지 정 피디의 상체가 훨씬 더 앞으로 가까워진다.

“너무 좋았습니다. 이번 달에 바로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요.”

“다행히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들다마다요.”

정 피디가 자세를 고쳐 앉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대본 위에 손을 올린다.

“뻔한 이야기를 완벽하게 틀었어요. 고무신이면 당연히 여자 쪽일 거로 생각했는데 이건... 하아.”

잠시 감탄사로 쉼표를 찍은 정 피디가 다시 말을 잇는다.

“게다가 미스터리로 둘러싸인 서연의 사연 때문에 이야기가 탄력을 받아요. 대체 어떤 사연인지 궁금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요?”

대본에 질린 현업 피디가 기다려지는 스토리. 그게 바로 내가 만든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정 피디가 이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익숙하면서 다른 맛.

모두가 공감할 수 있지만 꼭 봐야만 하는 색다름이 존재하는 작품.

그게 바로 내가 쓴 이 작품의 가치였다.

“솔직히 읽기 시작하고 나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만큼 흡입력 있는 스토리라 모처럼 작품에 푹 빠질 수 있었거든요.”

말을 이어갈수록 정 피디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강조할 때마다 들썩이는 엉덩이와 목소리가 그 말이 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사실 로맨스 장르는 언제나 한결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요. 눈부시게 타오르는 감정으로 시작되지만 솔직히 진부하기 짝이 없는 주제니까요. 게다가 이미 수많은 작가에 의해 소비된 주제고, 모두가 아는 감정이라 뻔한 흐름으로 갈 수밖에 없고요. 근데 이 작품은...”

정 피디는 대본을 보며 고개를 몇 번 내 젓더니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런 뻔한 이야기를 재미있는 설정으로 뒤바꿔버렸어요. 마치 셰익스피어가 뒤바뀐 편지를 통해 사랑에 빠진 남녀 사이를 애간장 태웠던 것처럼 말이죠.”

오호.

갑자기 소환된 내 작품에 관심이 동한다.

“「사랑의 헛것」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내가 제목을 말하자 정 피디가 놀란다.

“네, 맞아요. 셰익스피어 초기작이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역시 문창과 학생은 다르네요. 어쨌든 제가 보기엔 그만큼 신선하고 재미있었어요.”

나는 열변을 토하는 정 피디를 가만히 관찰했다.

‘이 사람, 지금 즐기고 있군.’

돈과 명예만을 위해 피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타는 듯한 목마름 속에서 발버둥 치는 창작자의 영혼이 정 피디에게서 느껴졌다.

‘기회만 잘 만나면 꽤 크게 되겠어.’

대본의 가치를 판별하고, 추진하고, 거기에 자신이 만들어내는 작품에 대한 애정을 갖는 것.

제작자라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재능이었다.

“맡겨만 주시면 제가 제대로 한번 찍어볼게요.”

말투에서도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래, 이 정도면 맡겨볼 만하지.’

내 작품에 대한 간절함도 흡족했고,

마지막에 덧붙인 비유도 만족스러웠다.

말 그대로 합격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한번 해 보죠.”

정 피디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돈다.

“고맙습니다. 믿어주셨으니,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정 피디가 작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나는 열기로 가득 찬 따스한 손을 마주 잡았다.

위아래로 시원하게 흔들리는 손.

어제와 달리 정 피디의 손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것은 작품에 대한,

아니, 성공에 대한 확신이었다.

***

짧은 악수와 함께 일사천리로 구두 계약이 진행되었다.

가장 중요한 원고료 부분은 대본 6개를 다 보고 정하기로 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정 피디가 의아한 듯 물었다.

“네, 일단 원고료보다는 작품에 집중하고 싶어서요. 아무래도 첫 작품이다 보니 전체 대본 퀄리티를 확인하고 결정하시는 게 정 피디님한테도 나을 테고요.”

배려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핑계였다.

보다 높은 고료를 받아내기 위한 밑 작업이었다.

‘누나 말로는, 이 바닥에서 경력 없는 작가는 대충 1회당 50만 원 정도 받는다고 했어. 누나 정도 경력이 돼야 100만 원 정도 받고...’

생각보다 웹드라마 시장은 박봉이었다.

그러나 난 고작 그 정도의 원고료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계약하면 최대 100만 원이 한계야. 하지만 완성된 대본이 미칠 정도로 마음에 든다면 어떻게 될까?’

눈앞에 아른거리는 대본을 손에 넣기 위해 더 많은 금액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극장주로서의 경험을 통해 얻은 확신이었다.

‘더, 더 간절하게 만들어야 해.’

물론 자신 있었다.

시간과 장비만 조금 뒷받침해준다면.

“그럼, 원고 보내주시는 대로 확인해서 메일로 최종 계약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정 피디가 들뜬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런데 어쩌나, 벌써 이렇게 내 작품에 빠지면 안 되는데...

왜냐고?

그야 훨씬 더 매력적인 클라이맥스가 남아있으니까. 이 정도로 놀라긴 아직 이르니까.

“그렇게 하시죠.”

나는 악수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된 미팅. 누나와 나는 정 피디의 과분한 배웅을 받으며 프로덕션을 빠져나왔다.

***

건물을 나오자 갑자기 누나가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번화가로 이끈다.

“어디 가는 거야?”

“잔말 말고 따라와 봐.”

무작정 끌고 간 곳은 다름 아닌 한 전자 대리점이었다.

“자, 마음에 드는 거로 한 번 골라봐.”

“고르라고?”

“그래. 이제 계약도 할 텐데 장비는 제대로 갖춰야지. 이거 어때?”

누나가 집어 든 건 최신형 노트북이었다.

아마 내가 정 피디와 나눈 대화가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됐어. 누나 노트북 살 돈도 없으면서.”

내가 말려도 누나는 확고했다.

“얘 말은 무시하시고요, 괜찮은 노트북 좀 보여주세요.”

누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직원이 노트북을 집어 들고는 제품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는다.

코어가 어쩌고, 메모리가 어쩌고 하는데, 내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 투성이였다.

다만, 마지막에 나눈 대화만큼은 똑똑히 들었다.

“이 모델이 제일 낫네요. 얼마죠?”

“지금 할인 들어가서 197만 원입니다.”

“...”

가격을 들은 누나가 순간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결심한 듯 카드를 꺼내 내민다.

“계산해 주세요.”

“할부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음... 6개월로 해주세요.”

직원이 새 제품을 꺼내러 간 사이 나는 누나를 바라봤다.

“왜 무리하고 그래?”

누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리라니, 이 정도면 투자지.”

“투자?”

“그래. 떡잎을 보였는데 그냥 두면 바보지.”

누나는 그제야 나를 바라봤다.

“니가 쓴 대본, 정말 재미있었어. 정 피디님이 저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것도 처음 봤고. 그런데 노트북 때문에 원고가 더디게 나온다는 게 말이 돼?”

우리 누나가 글은 좀 못 쓰지만 사람 보는 눈은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잠시 뒤,

직원이 박스에 담긴 노트북을 가져왔다.

“자, 받아. 장인은 도구 탓하지 않는다지만 적어도 애써 쓴 글을 날리면 안 되지.”

같은 길을 걷는 누나라 원고를 날린 고통에 대해 공감해주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마음껏 써 봐.”

누나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노트북을 내밀었다.

참나.

본인 노트북도 오늘내일하면서 내 노트북을 먼저 사주다니...

아주 기특했다.

***

나는 새로 산 노트북을 들고 카페를 찾았다.

‘좋네.’

전원을 켜자 곧바로 화면에 불이 들어온다. 마우스도 별도로 구매한 탓에 세팅이 깔끔했다.

‘역시 돈이 좋아.’

누가 보면 속물이라 욕하겠지만 이게 인간의 본성인 걸 어쩌겠어.

‘그러고 보니 이 시대는 예술의 가식적인 부분을 높게 사는 것 같네.’

숭고한 예술.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

예술에 대해 대중들이 생각하는 이미지였다.

그러나 글쎄...

그 시대를 산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뭐 개중 몇몇은 그런 의도로 예술을 대했을 수도 있었다.

‘돈 많고, 시간 많고, 우연히 재능까지 얻게 된 그런 사람이라면 말이지.’

그러나 대다수의 예술인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자신의 글을 팔았고, 그림을 그렸으며,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 고고함, 숭고함 따위는 고작 사흘만 굶어도 생각조차 나지 않으니까.’

나는 고향 에이번을 떠나 정처 없이 헤매던 7년의 세월이 떠올랐다. 되뇌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

그 삶을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제값은 받아야지.’

마지막 하루 남은 주말 휴일.

그러나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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