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0화 (10/203)

# 10. excitement - 신남, 흥분 (3)

10.

***

“너 정말 써둔 거 있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누나가 묻는다.

내가 대본 쓴 적 없다는 걸 아는 누나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당연하지.”

내가 또 거짓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 그럼 내가 먼저 볼 수 있어?”

아무래도 누나는 내가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보여주는 건 힘들어.”

“왜?”

“여기에 있거든.”

나는 내 머리를 가리켰다.

순간 누나의 표정이 굳어진다.

“야, 당장 내일까지 원고 보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정 피디님한테 말해. 못하겠다고. 아니다, 이럴 시간에 내가 전화를...”

나는 휴대폰을 꺼내는 누나를 말렸다.

“신경 쓰지 마. 쓸 수 있으니까 한다고 말한 거야.”

지켜보던 누나의 눈동자가 걱정으로 물든다.

“너 솔직히 말해. 집안 사정 어렵다는 소리 때문에 이러는 거지?”

“그것도 어느 정도는 있지.”

“야, 그거라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 나도 원고 잘 넘겨서 나머지 잔금 받을 수 있으니까. 굳이 니가 급하게 이러지 않아도 돼.”

“경험 삼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래도 소설하고 대본 쓰는 건 천지 차이라고. 아니면 기한이라도 좀 늘려달라고 하던지.”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나는 노트북을 챙긴 채 집을 빠져나왔다.

“아니, 야! 권서준!”

현관문을 닫자 귀찮은 누나의 잔소리도 조금씩 멀어진다.

‘이제야 살겠네.’

누나 마음이야 알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당장 내 머릿속엔 수천 편이 넘는 작품들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저 내 작품을 보고 놀라지나 말라고.’

나는 서늘한 밤공기를 가르며 번화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정류장 근처 24시간 카페.

늦은 시간이었지만 손님이 꽤 많았다.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는 학생, 자기계발서를 읽고 있는 회사원, 휴대폰으로 주식 강의를 듣는 장년이 보인다.

하나같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모습을 관찰한다.

그들의 표정과 숨소리.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듯 내 기억 창고에 담긴다.

이들의 모습은 언젠가 쓰게 될 어느 작품 속 인물들의 모습이 될 터.

나는 조용히 창가 자리에 앉아 낡은 노트북을 꺼냈다.

위이잉.

요란한 팬 소리와 함께 모니터가 깜빡인다. 전원 버튼을 누른지 한참이 됐지만 아직도 윈도우 로고가 돌고 있을 뿐이었다.

‘많이 느리네. 기회 되면 이것부터 바꿔야겠어.’

나는 노트북 전원이 들어오길 기다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떤 걸 써볼까?’

우선 웹드라마에 적합한 소재가 필요했다. 그래야 정 피디의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고 계약까지 이뤄낼 수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확실한 결과를 낼 수 있는 작품이 어필하기 쉬워.’

소재 자체는 특이하면서 조회 수를 끌어올릴 포인트도 명확해야 했다.

말 그대로 익숙하면서도 그 안에서 새로움을 줄 수 있는, 신선하면서도 친숙한 느낌의 그런 작품이 필요했다.

‘결국 주제는 돌고 돌아 사랑 이야기야.’

장르는 학원 로맨스 쪽으로 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랑 이야기야 말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주제이며, 동시에 가장 많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재니까.’

그러나 달리 말하면 너무나 뻔한 이야기라는 뜻.

내가 해야 할 일은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풀어내는 것이었다.

‘이제 내 머릿속 도서관을 깨울 차례인가.’

나는 설레는 마음을 누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끝을 알 수 없는 드넓은 상상의 세계.

쿵.

나는 세계수처럼 하늘로 쭉 뻗은 탑 앞에 서 있었다. 눈앞엔 올림포스의 거인족도 열지 못할 거대한 문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

‘열어라...’

나직한 외침에 거대한 문이 열린다.

비로소 수백 년 동안 잠들어있던 상상 속 도서관이 깨어난다.

나는 걸음을 옮겨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어두운 복도가 내 걸음에 맞춰 불이 밝혀진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다가 이내 가볍게 몸을 허공에 띄운다. 빠르게 복도를 지나 거대한 홀 가운데 멈췄다.

완벽하게 원을 이룬 거대한 도서관.

어디를 봐도 온통 책장으로 가득 차 있다.

평생토록 내가 쓴 작품들.

세상에 나온 적 없는 미발표작이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천천히 책들을 바라본다.

‘이 중에서 뭐가 좋을까?’

고민하던 중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가만, 그게 좋겠어.’

나는 살짝 도움닫기를 하고는 쏜살같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대략 10층 높이쯤 될까.

북쪽 책장에 손을 뻗어 제목 없는 한 책을 꺼냈다.

‘스코틀랜드 지방의 어느 군인과 연인의 이야기였지.’

영주의 징집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생이별하게 된 연인을 보고 쓴 이야기였다.

이걸 현대식으로 재해석해 보면 입대를 해야 하는 남자와 고무신 정도가 될까?

이별이 두려운 여자는 울고,

떠나기 싫은 남자는 안타까워하고.

대한민국이라면 너무나 친숙한 그림이었다.

‘일단 여주인공을 떠올려 보자.’

긴 다리, 잘록한 허리, 풍성한 머리.

큰 눈, 도톰한 입술.

‘이건...’

생각할수록 조예슬을 닮은 모습이었다.

‘뭐, 잘 어울린다면야 누가됐든 문제없지.’

나는 구체적으로 떠오른 여주의 외모 묘사를 마쳤다.

뒤이어 여주에 어울릴만한 차가운 이미지의 남주가 떠올랐다.

인물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고대 스코틀랜드의 이야기는 어느새 현대적인 느낌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이야기가 너무 싱거워.’

말 그대로 뻔한 그림이었다.

‘가만, 여기서 살짝 비틀어보면 어떨까?’

나는 설정을 아주 조금 틀었다.

그러자 전혀 새로운 그림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오호.’

이야기가 어느새 몽글몽글 덩어리를 이룬다.

이미지가 구체화되자 영감도 덩달아 솟구친다.

‘그래. 이거지.’

순간 호흡이 깊어지고 주변의 공기도 차분히 가라앉는다.

나는 천천히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째깍째각.

시곗바늘 소리와 내 숨소리 외엔 모든 것이 침묵했다.

새벽 공기가 아스라이 깔리며 공기의 온도가 미묘하게 낮아지는 시간.

나는 마음껏 상상에 젖어 든다.

그리고 복잡한 남녀의 감정이 글 속에 속속 스며들기 시작했다.

타다타닥 타다닥.

경쾌한 키보드 소리와 함께 흰 여백이 이야기로 채워진다.

슬프면서 웃기고, 유치하면서 이해가 되는 캠퍼스 러브 스토리.

타닥타다, 타다 타다닥.

마치 보따리를 푼 것처럼 쉴 틈 없이 이야기가 쏟아진다.

나는 곧 내가 타자를 치고 있다는 것조차 잊는다.

내가 작가인지, 그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시청자인지조차 모호해진다.

그렇게 이야기는 맛있게 익어 가고,

나의 밤도 점점 깊어간다.

***

다음 날 아침.

권지연은 해가 중천에 뜬 뒤에야 거실로 나왔다.

전날 마신 맥주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아. 이제야 살겠네.”

몇 주 째 이어진 수정 작업.

게다가 엄마와의 다툼이 여전히 신경 쓰여 과음하고 말았다.

“그나저나 얜 어디 갔지? 아, 학교 가는 날이구나.”

머리를 긁적이던 권지연은 어젯밤 동생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내가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한 건가?’

평생 소설만 써온 애한테 갑자기 웹드라마 쪽을 연결시켜준 게 잘한 일인가 싶었다.

사실 이쪽 업계에 오래 있다 보니 더러 봐왔다.

소설 쓰다가 대본으로 가고, 반대로 대본 쓰다가 소설로 넘어가는 사람들.

그러나 대부분은 적응에 실패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게다가 단 한 번도 소설 외에 다른 길을 고려한 적 없던 동생이었기에 더욱 걱정되었다.

‘괜한 짓을 했어...’

애초에 수정과 창작은 전혀 다른 과정이었다.

‘장르를 바꾼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권지연은 올라오는 숙취를 애써 밀어내며 습관처럼 메일함을 열었다.

프로덕션에서 온 메일이 있나 확인하는데 뜻밖에도 낯익은 이름의 발신자가 보였다.

[권서준 :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_웹드라마 1화.hwp]

동생이 보낸 메일이었다.

대충 원고 분량을 보니 10분 대본을 꽉꽉 채운 듯 보였다.

‘뭐야? 벌써 쓴 거야?’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동생이었다.

그래서 그런 동생의 실패를 볼 때마다 더욱 가슴이 아픈 것도 사실이었다.

‘하아.’

권지연은 한숨과 함께 파일을 열었다.

‘가망 없으면 바로... 말리는 게 맞겠지?’

그게 진정으로 동생을 위한 길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한 장짜리 시놉시스였다.

메인 콘셉트는 입대를 앞둔 캠퍼스 커플의 위기.

배경은 대학 캠퍼스, 남주와 여주는 같은 과 CC라는 설정이었다.

‘군대와 연애라, 소재 선택은 나쁘지 않아.’

남녀 모두 공감이 갈 수 있는 콘셉트였다.

다만 닳고 닳아 너무나 익숙한 소재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대본을 읽자마자 권지연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진다.

[대학, 연애, 그리고 군대. 너무나 뻔히 보이는 전개라고? 그러나 내 경우엔 조금 달랐다. 왜냐면... 난 이제 막 전역한 군필자였으니까.]

남자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도입부부터 호기심이 확 생겼다.

‘어라? 남주가 군필자인데 왜 제목이 고무신이지?’

권지연은 재빨리 눈곱을 떼어내고는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모았다.

어제 처음으로 웹드라마를 쓴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숙했다.

더 놀라운 것은 군대라는 뻔한 클리세를 기가 막히게 비틀었다는 점이었다.

‘뭐야, 여기서 이렇게 나온다고?’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어느덧 정신을 차렸을 땐 1편을 모두 읽고 난 후였다.

그리고 다 읽고 난 그녀의 평가는 한 마디였다.

“이거... 엄청 재미잖아?”

권지연은 서둘러 메일을 재전송했다.

수신자를 당연히 정은미 피디였다.

***

“정 피디, 다음 작품 어쩔 거냐고?”

“죄, 죄송합니다. 대표님.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대체 언제까지? 마땅한 대본도 없다며?”

“...”

순간 정 피디가 벙어리가 되고 만다.

그 모습을 본 대표는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리고.

“내가 이러니 머리털이 빠지지. 이래서 입봉도 못한 애들은 쓰면 안 된다니까.”

“...”

자존심을 박박 긁는 말.

그러나 철저하게 을인 정 피디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뭘 잘했다고 서 있어? 안 나가? 이럴 시간에 가서 대본 찾으라고, 대본!”

정 피디는 하는 수 없이 대표실을 나왔다.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머리를 쥐어뜯는다.

‘누군 대본 안 찾는 줄 아나.’

무시당하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이런 일이 잦아질수록 자신감은 떨어지고 의욕은 사라졌다.

‘내가 저 인간한테 본때를 보여주고 그만둬야 하는데... 하아.’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대본이 필요한데 마땅한 대본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본때를 보여줄 기회조차 없는 격.

‘참, 그러고 보니 오늘까지 보내준다고 했었는데...’

정 피디는 어제 권서준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메일함을 확인했다.

‘어? 진짜 보냈네?’

현업 작가도 아닌 문창과 학생의 대본이었다.

솔직히 기대하는 것도, 기다린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딱 그 정도의 기대감이었다.

당연히 권서준을 떠올리면 함께 떠오르는 것도 커다란 물음표였다.

‘과연 잘 썼을까?’

어디 한번 읽어나 보자는 마음에 원고를 출력해 손에 들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대본 넘기는 속도가 빨라진다.

‘이거... 뭐지?’

정 피디의 입이 본인도 모르게 점점 벌어진다.

혹시 모른다는 정도의 얄팍한 기대감.

등단도 못 한 문창과 학생이라는 점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건 분명 물음표였다.

그런데 그 물음표가,

어느새 곧게 퍼져 있었다.

마치 홈런 타자의 손에 들린 야구 배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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