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brave new world - 멋진 신세계 (3)
3.
***
‘그래. 이게 글 쓰는 기쁨이지.’
간만에 맛본 환희(歡喜).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뽑아낸 글이었다.
그 때문에 다소 거칠기는 했지만, 기분만큼은 후련했다.
세상 속의 나.
다시 내 안에 담기는 세상.
어느 순간 둘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하나가 되고, 희미하면서 막연했던 생각들이 몽글거리며 선명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무수히 반복된 사색의 과정을 통해 단 하나만이 오롯이 남는다.
‘바로 나 자신.’
결국 글이란 나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기회였다.
그렇게 ‘봄’이라는 계절은 나에게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
모처럼 찾아온 소스라치는 희열.
그것은 창작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고통이자 기쁨이었다.
‘좋군.’
나는 봄볕을 즐기며 천천히 캠퍼스를 거닐었다.
완연한 봄 날씨.
옷차림만큼이나 마음도 가벼웠다.
정문을 지나 작은 길을 따라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길을 따라 놓인 벤치엔 캠퍼스 청춘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잔디밭을 두고 서로를 부르는 학생들 대화 소리.
따스한 햇볕에 데워지는 잔디 냄새.
분명 어제와 같은 공간이지만 그곳을 거니는 나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서준 오빠!”
막 학교를 나서던 그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검은색 긴 머리를 휘날리며 내게 다가오는 여자가 보인다.
계절과 잘 어울리는 산뜻한 원피스 차림.
지나가던 남자들이 한 번씩 돌아볼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조예슬?’
같은 과 후배이자 캠퍼스를 대표하는 퀸카.
그런데 다가올수록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차가워진다.
“오빠, 휴학 신청한다고 했어?”
언뜻 들으면 따지는 말투였다.
표정 역시 찬바람이 쌩쌩 돈다.
물론 나를 쌀쌀맞게 대하는 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 여친이니까.’
대학교 신입생 OT 때.
나는 순수함 그 자체였던 예슬이를 만났다. 선배 버프 잔뜩 받은 나를, 예슬이는 그저 믿고 따랐다.
예쁘고, 착하고, 게다가 글로벌 기업 일성의 무남독녀인 그녀.
‘신입생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애를 만날 수나 있었을까?’
그래서 더 부담스럽고 불안했다.
다른 세상에 사는 예슬이의 앞길을 내가 막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군대 갈 때 이별을 고했는데, 그 충격에 예슬이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고작 공모전 몇 번 떨어졌다고 휴학? 오빠 정말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
표정과 말투가 더없이 차가웠다.
원수를 만나도 저렇게 무섭게 쳐다볼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내 눈엔 조금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꼿꼿한 허리.
흐트러짐 없는 자세.
주름 하나 없는 빳빳한 블라우스는 빈틈없는 그녀의 성격을 드러냈다.
‘그런데 머리는 제대로 말리지 못했어.’
게다가 촉촉한 눈빛에, 살짝 떨리는 목소리까지. 이건 달리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애증이구나.’
그녀가 꼭꼭 숨겨진 진심이 읽힌다.
사랑과 미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
이전에 보지 못했던 그녀의 진심이 들린다.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휴학 안 해.”
나는 차분히 답했다.
“...뭐?”
“휴학 안 한다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
순간 당황한 조예슬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본다.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한다.
“거, 걱정은 무슨. 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
대답과 동시에 미간 주름이 짙게 잡힌다.
당황할 때마다 나오는 그녀의 표정이었다.
그런데 내 관심은 예슬의 말보다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정확히는 며칠 전과 달라진 작은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보다, 머리 잘랐네?”
“...어?”
“앞머리 말이야.”
무심코 던진 질문에 예슬이가 당황한다.
그 정도로 놀랄만한 일인가 싶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한 마디를 보탰다.
“잘 어울린다.”
“...”
지나치듯 무심코 던진 한마디였다.
그런데 차갑던 예슬이의 표정이 봄바람처럼 녹아내린다.
“...이상하지 않아?”
“예뻐.”
“...”
미소 짓던 예슬이가 뒤늦게 당황해서는 입술을 꼭 깨문다.
“뭐, 뭐야. 이제 와서 신경 쓰는 척해주면 내가 뭐 좋아할 줄 알고?”
다시 온도를 낮춘 예슬이가 인사도 없이 몸을 휙 돌려 멀어진다.
예슬이의 생각과 달리 특별히 신경 쓴 건 아니었다.
‘그저 진심을 전했을 뿐이지.’
찬란하게 빛나는 젊음을 향한 순수한 예찬.
그 아름다움을 덧없이 놓쳐버렸던 어리석은 자의 후회 섞인 고백일 뿐이었다.
***
[아무튼 휴학하기만 해 봐. 내가 가만 안 둘 테니까.]
조예슬은 문자 보내는 수고를 감내하면서까지 나의 휴학을 막으려 애를 썼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관심 없는 척하는 그녀의 모습이 오히려 풋풋해 보였다.
‘당황한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거지.’
그러나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열 길 물속보다 복잡한 인간의 감정.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우 흥미로운 소재였다.
‘저런 주인공도 재미있겠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이어진다.
젠장.
첫사랑의 상처마저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니.
나는 어쩔 수 없는 작가였다.
생각을 정리할 겸 하염없이 걷다 보니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망원동 깊숙이 위치한 반지하 집.
환기도 안 되고, 여름이면 곰팡이가 단골로 찾아오는 좁은 집이었다.
거실에서 노트북으로 작업 중이던 누나가 인기척을 느끼고 힐끗 쳐다본다.
“왔냐?”
“엄마는?”
“단체 손님이 늦게까지 있나 봐.”
누나는 캔 맥주를 들이켜고는 나를 한번 슬쩍 바라본다.
“참, 공모전 떨어졌다며?”
엄마한테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됐어.”
대답과 동시에 누나가 한숨을 푹 내쉰다.
“엄마랑 약속 한 건 기억하지? 이번에도 떨어지면 얌전히 취업하기로 한 거?”
잊을 수가 없었다.
전과하려고 했던 것도 다 엄마와의 약속 때문이었으니까.
“너무 좌절하지 마. 해보니까 글 쓰는 것도 결국 재능이더라. 빨리 진로를 바꾸는 게 어쩌면 이득일 수 있어.”
프리랜서 웹드라마 작가인 누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는 맥주를 집어 들었다.
꿀꺽꿀꺽.
맥주 한 캔을 기어코 비어낸 누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들고 뭔가를 입력했다.
지이잉.
곧이어 내 휴대폰에 진동이 울린다.
누나가 보낸 타타오 머니.
무려 5만 원이었다.
“뭐야?”
“뭐긴, 용돈이지. 맛있는 거 사 먹고 힘내.”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기 지갑 사정도 뻔하면서 동생을 챙기는 모습이 기특했다.
“배고프면 엄마가 해놓고 간 김치찌개 있으니까 챙겨 먹고.”
누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충혈된 눈으로 거칠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인상을 팍 쓰는 걸 보니 글이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슬쩍 누나의 모니터를 봤다.
작년에 계약한 웹드라마 대본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잘 안 풀려?”
“어. 이게 캠퍼스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내용인데, 담당 피디가 계속 수정하라고 하잖아. 하, 근데 틀린 말도 아니니까 더 미치겠고...”
이미 몇 차례 수정 요청을 받은 터라 누나는 한껏 예민한 상태였다.
지지잉.
그때, 누나의 휴대폰이 울린다.
새로 도착한 메일을 확인한 누나의 표정이 확 구겨진다.
“또 수정하라고? 아니 대체 몇 번을 수정하라는 거야?”
머리를 헝클어트리던 누나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피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투덜대던 좀 전과 달리 한없이 상냥한 목소리였다.
“네. 피디님. 제가 수정안을 읽어 봤는데요... 말씀하신 대로 수정하면 여주의 행동이 조금 고구마라서요. 남주의 행동도 좀 뜬금없고요. 네? 아, 대표님이 원하신다고요? 네, 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수정해서 다시 보내드릴게요. 네, 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자마자 누나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진다.
“어후, 이러니 내가 술을 못 끊지.”
누나는 타는 속을 달래려는 듯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내가 한번 봐줄까?”
내가 관심을 보이자 순간 누나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네가 보면 아냐? 로맨스의 로자도 모르는 게.”
“내가 로맨스를 모른다고?”
무의식적으로 반문하고 말았다.
「로미와 줄리엣」,「한여름 밤의 꿈」, 「햄릿」...
하나같이 운명적 사랑과 증오를 담은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누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너 기껏해야 연애 한 번 해봤잖아.”
하긴, 누나의 눈에 난 여전히 평범한 동생일 뿐이었다. 누나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후아. 이걸 오늘 밤까지 어떻게 수정하냐고? 수정 포인트는 왜 또 이렇게 많은 건데?”
힘든데도 마감을 미루지 못하는 건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이미 몇 차례 마감을 미뤘다고 들었어. 또 미루면 계약금까지 날아갈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당장 다음 달 월세부터가 문제였다.
결국 누나의 위기는 누나만의 위기가 아니었다.
“으아, 미치겠네.”
또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저러다가 탈모가 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괴로워했다.
“안 되겠다. 딱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야지.”
한숨을 내쉬던 누나는 결국 알람을 맞춘 뒤 그대로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며칠 동안 잠을 설쳐서인지 머리를 대자마자 곧 잠이 들어버린다.
‘대체 뭐가 저렇게 안 풀리는 거지?’
나는 호기심에 펼쳐 놓은 누나의 모니터를 바라봤다.
[제목 : 캠퍼스 첫사랑]
캠퍼스 커플이 헤어진 뒤 겪게 되는 실질적인 고민과 감정에 대해 다룬 작품이었다.
늦은 밤.
비 내리는 자취방 앞 골목길.
여자는 수없이 함께 걸었던 거리를 보며 옛 추억에 잠긴다.
편의점, 카페, 자주 가던 단골 호프집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그가 있었다.
-너와 걷지 않은 길이 없고, 너의 기억이 남지 않은 곳이 없네.
짧게 느껴졌던 그 길이 한없이 길게 이어진다.
아쉬웠던 그 길은 이제 후회로 가득 찬다.
‘옛날 생각나네.’
가슴 아파하는 여주인공의 대사를 보며
나도 모르게 예슬이와의 추억이 떠오른다.
그래.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처음이라는 게 언제나 그렇듯 부족하고 서툰 법.
나는 옛 기억을 슬쩍 밀어내며 다시 대본에 집중했다.
디테일한 감정 묘사 덕분에 여자의 아픔이 고스란히 떠오르게 만든다.
‘자연스러운 상황 묘사와 대사들이 좋아. 덕분에 몰입도도 상당하고.’
장점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만큼 단점 역시 두드러졌다.
‘주인공의 캐릭터가 너무 평면적이야. 그래서 사건에 대한 임팩트가 별로 없어.’
무엇보다 가슴 아픈 느낌이 전달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입체적으로 바꿔보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근데, 이게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닌데...’
쓱 한 번 봤을 뿐인데 내 머릿속엔 벌써부터 수십 가지의 대안이 떠오른다.
‘조금만 손대볼까?’
처음 시작은 고작 그 정도 마음이었다.
그저 5만 원 어치 정도의 도움을 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어느 새 내 안의 갈급함이 자꾸만 나를 재촉한다.
빨리,
어서 빨리 글을 써 달라고...
타닥타닥 타다닥.
나는 뭔가에 홀린 듯 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어느덧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전체 대본을 모두 수정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