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봄볕에 취한 무한이 꾸벅꾸벅 졸다 선잠에 들었다.
- 봄볕이 귀하구나.
언젠가 들었던 천기자의 음성이 나직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래서 귀하다고 한 건가?’
몸을 뒤덮은 봄볕이 왠지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귓가에서 새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와 함께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찻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듯한 소리 같기도 하고.
그래서였나.
- 천하의 주인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이냐?
할아버지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는 천하방을 해산할 거라고 했지.
하지만 지금은…….
‘할아버지, 애초에 천하에는 주인이 있을 수 없었더라고요.’
따스한 봄볕을 덮고 있자니 북해에 몰아치던 거센 눈폭풍이 거짓말 같다. 세상에는 봄, 봄뿐인 듯하지만 어딘가는 뜨겁고 후덥지근한 여름이고, 또 어딘가는 나뭇잎 우수수 지는 가을일 것이다.
계절마저 이리 다른데 누가 천하를 논할 수 있을까.
- 천하의 주인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이냐?
재차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하의 한 사람으로 살아갈 겁니다. 이 따스한 봄볕이 귀한 걸 아는…… 응? 봄볕이 왜 이리 축축하지?’
무한이 눈을 뜨자 동그란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하하하.”
아이가 웃으며 입이 벌어지고 침이 뚝, 얼굴에 떨어진다.
“크윽!”
무한이 자신의 얼굴을 점령한 아기를 잡아 올렸다.
“이 녀석이!”
감히 무림맹주를 암습해?
“아하하하.”
아버지가 자기와 놀아준다고 생각했는지 아기가 크게 웃으며 버둥거렸다.
“우아야.”
아들 심우를 찾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궁우가 들어왔다. 무한과 아들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녀석이 자는 척하더니 이리 내뺐네.”
심우를 재우다 자기가 잠들었는지 남궁우가 민망한 얼굴로 다가와 아들을 건네받았다.
“왜 자꾸 졸린지 모르겠네.”
“귀한 봄볕이니까.”
무한이 알쏭달쏭한 답을 하는데 바깥에서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맹주, 수상한 노인이 와서 맹주를 찾습니다.”
“수상한 노인?”
“엄청난 고수입니다. 갑자기 나타났는데 감히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수라는 말에 남궁우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어렸다.
무한이 천하제일인이라지만 세상은 넓고, 또 다른 세상의 천하제일인도 있을 수 있으니까.
“곧 나가지.”
무한이 옷을 갈아입는데 남궁우가 따라와 걱정했다.
“누굴까?”
“가 보면 알겠지. 설마 무림맹 한복판에서 맹주에게 도전하는 자가 있겠어?”
“그건 그렇지만.”
무한이 거처를 나와 맹주전으로 향했다.
맹주전 널따란 광장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맹주전 앞으로 무인들이 도열하여 경계를 하고 있다. 장내에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흘렀다. 노인에게서 어딘가 모르게 흑도의 기운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시꺼먼 흑의장포를 걸친 노인은 백발이 성성했는데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흑천노조!’
무한은 멀리서도 단박에 노인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오래 전 피전격에게 흑천을 넘기고 서장으로 떠난 흑천노조였다.
흑천노조 역시 무한이 나타난 걸 느꼈는지 이쪽을 돌아봤다. 그런데 눈을 감고 있다.
무한이 황급히 다가갔다. 어쨌든 그에게는 외조부가 된다.
“노조를 뵙습니다.”
“무림맹주가 함부로 고개를 숙이면 안 되지.”
“외조부께 인사드리는데 맹주라는 신분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그런가…….”
흑천노조는 외조부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렸는지 클클, 웃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무한이 맹주전으로 안내하려 하자 흑천노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네 어미를 찾았더니 증손자가 생겼다며 한번 보고 오라더라. 네 거처로 갔으면 한다.”
흑천노조의 핑계에 무한이 내심 웃었다.
두 사람이 후원 무한의 거처로 갔다.
흑천노조는 여전히 눈을 감고 가는데도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이 걸었다.
“눈을 잃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다만 보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하기는 누가 있어 흑천노조의 눈을 상하게 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이 거처에 이르자 남궁우가 심우를 안고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고수가 왔다니 아무래도 걱정이 됐나보다. 낯선 노인을 보자 남궁우가 경계하였다.
“외조부께서 오셨소.”
무한의 말에 남궁우가 아, 하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흑천노조가 눈을 떴다.
맑고 투명한 눈이다. 그 눈이 무한의 아들 심우를 보았다.
“아, 아……”
심우가 낯선 할아버지를 보자 손을 내밀어 잡으려 했다.
흑천노조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가더니 작은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내밀어 쥐어 주었다.
한참 심우를 보던 흑천노조가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됐다.”
돌연 흑천노조의 신형이 사라졌다.
“나는 흑수애에 있을 것이다. 훗날 아이가 크면 한번 들르라고 하거라.”
‘흑수애…… 다 무너진 건 아시나?’
무한이 찜찜해 하였다.
남궁우가 흑천노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말했다.
“좀 무서운 분이시네.”
“흑도의 하늘이니 당연하지.”
***
곤륜산 아래 한 대의 마차가 섰다.
심우를 안은 무한과 남궁우가 내려섰다.
“아, 아…….”
심우가 높은 산봉우리를 보고는 뭐라 말하고 싶은지 아아, 하고 소리를 냈다.
무한과 남궁우가 경신법을 펼쳐 산으로 올라갔다.
심우가 잠이 들 무렵 산도의 모옥에 당도하였다.
그런데 모옥이 한 채가 아니다.
모두 다섯 채.
“이분들이 다 모였나보네.”
무한이 산도의 모옥에 가서 예를 갖추며 말했다.
“제자 무한,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 대답도 없다.
돌아보니 사람의 자취가 끊긴 지 며칠 된 것 같았다.
곤륜산을 다녀온 대장로 우학진인 편에 산도가 다녀가라 했다는 말을 듣곤 바로 출발했으니 그리 오랜 시간 걸리지 않았는데…….
그때 저 멀리 상도봉에서 상서로운 빛이 어렸다.
무한은 흠칫, 느끼는 바가 있었다.
“봉에 올라갔다 와야겠어.”
무한이 심우를 남궁우에게 건네고 몸을 날렸다.
한 마리 새처럼 순식간에 정상에 이르자 다섯 도인이 보였다.
산도가 한가운데 앉아 있고 나머지 요산자와 풍운벽력수, 목령산인과 화정노 등이 사방을 점하고 좌정하였다.
- 왔구나.
좌정한 산도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심어로 말했다.
- 무인의 길은 찾았느냐?
무한이 상도봉에서 깨달음을 얻고 내려왔을 때도 한마디 묻지 않았던 산도가 뜬금없이 옛 질문을 다시 하였다.
“길에서 내려온 지 오래입니다.”
산도의 입꼬리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 듯했다.
- 됐다.
그러더니 산도의 머리에서 황금빛이 솟구쳤다.
눈부신 빛은 산도의 모습과 같았는데 순식간에 하늘 높이 솟아 사라졌다.
잠시 후.
“후우…….”
목령산인 등 네 사람이 눈을 떴다.
그러자 좌정하고 있던 산도의 육신이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졌다.
목령산인이 일어나더니 허리를 두드리며 물었다.
“산도의 승선(昇仙)을 어찌 알고 왔느냐?”
“소식을 보내오셨습니다.”
“흐음. 가르친 거 하나 없이 스승 행세를 하고 가다니…… 내가 네 진정한 스승이라는 걸 잊지 마라.”
“무슨 소리. 이 녀석은 내가 키웠다고.”
요산자가 어림도 없는 소리 말라는 듯 무한의 앞을 막자 풍운벽력수가 그 사이로 끼어들며 말했다.
“내가 바람과 구름에 이어 비와 눈의 조화를 깨달았단다. 풍운조화공이 풍운우설천지개벽공이 되었지. 어떠냐? 관심이 생기지?”
화정노의 시선은 까마득한 아래 남궁우와 심우에게 향했다.
“아기다!”
마치 신기한 걸 발견했다는 듯 화정노가 그대로 몸을 날려 절벽에서 떨어진다.
“아기야. 아기라고.”
“미친놈.”
목령산인이 그런 화정노를 비웃다 흠칫하더니 당황한 기색으로 울부짖었다.
“지화령석? 안 돼!”
목령산인이 휙, 뒤따라 내려가며 외쳤다.
“지화령석, 나한테 넘긴다고 하지 않았냐? 또 엄한 데다 쓰면 죽을 줄 알아라!”
여전한 네 도인을 보며 무한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의 시선이 산도의 양신이 올라간 하늘로 향했다.
곤륜의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
무한이 맹주의 자리에 오른 지 십 년이 되던 해, 규정대로 맹주선출 비무대회가 열렸다.
이번에도 무한이 나섰고, 감히 상대하는 자가 없어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해 마천에서 역시 흑천과 마천, 정파의 후기지수 비무대회가 열렸다. 이번에는 소마의 제자가 우승을 했다.
그러자 정파에서 다음 비무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며 대파와 세가는 물론이고 중원의 인재를 모아 무림맹으로 보냈다.
장로전에서 만장일치로 의결하여 무림맹 직속 무관을 설치했는데, 공교롭게도 천무관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초대관주는 무림맹주가 겸직하도록 했다.
무한은 장로전의 수가 뻔히 보였으나 웃으며 관주직을 받아들였다.
***
“사부, 우리 귀영문은 왜 본거지가 없어요?”
모로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귀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본거지?”
귀영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던 아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들은 그럴 듯한 장원을 지니고 있잖아요.”
“이놈아. 장원을 얻으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아느냐? 여기 있으면 무림맹이 다 우리 차지인데.”
“무슨 소리예요. 무림맹에서 셋방살이하는 문파는 처음 봤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거 모르세요?”
“셋방살이라니. 어떤 놈이 그따위 소리를 한단 말이냐?”
“소운이하고 심우가요.”
“에잉. 그놈들 말 들을 거 없다. 무림맹이 생길 때 세상에 있지도 않은 놈들이 주인 행세를 하다니…… 고얀 놈들.”
귀영이 자세를 고쳐 앉고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귀수야. 우리 귀영문의 사조는 원래 낭인이셨다. 돌아가시며 유훈을 남기셨지. 귀영문은 낭인의 유파라고, 장원 같은 부동산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다.”
“…….”
귀수는 눈알만 굴릴 뿐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때, 바깥에서 귀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귀수야.”
귀영이 손짓을 하자 문이 스르륵, 열렸다.
“네놈들이구나. 너희가 귀수더러 셋방살이 한다고 놀렸냐?”
심우가 또르르 눈알을 굴리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양쪽에 기둥을 세우고 나무판때기로 현판을 달았는데 거기에 귀영문이라고 쓰여 있었다.
“무림맹 뒷산에 깃들어 사니 셋방살이라고 한 건데 뭐가 잘못된 건가요?”
“네놈들이 뭔가 단단히 잘못 알고 있구나. 여기는 무림맹 땅이 아니다. 뒷산이라고.”
귀영문은 무림맹주의 거처인 후원에서도 더 들어가는, 뒷산 바로 아래에 있다.
“단단히 알아두거라. 귀영문이 여기에 자리 잡은 건, 혹 뒷산으로 스며드는 적을 막기 위함이다. 결코 셋방 사는 게 아니란다.”
“…….”
“……”
심우는 물론이고 형소운도 귀수도 믿지 않는 표정을 짓자 귀영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모두 이리 와서 앉아봐라. 내가 옛날 일을 이야기 해주지. 너희가 세상에 없었을 때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귀영문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이해할 것이다.”
세 아이가 조르르 나란히 앉았다.
“에헴.”
귀영이 헛기침을 하고는 희끗해지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오래전에 말이다. 한 아이가 있었다. 딱 너희만한 아이였는데, 걔가 하는 일이라고는 아침마다 사당으로 가서 위패를 지키는 일이었지…….”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