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귀영의 걱정과 달리 북해빙궁은 일행을 환대하였다.
모계로 이어지는 지방답게 빙궁주 역시 여인이었다.
오똑한 콧날에 희디흰 피부, 투명한 눈빛을 지닌 빙궁주를 보자 귀영이 감탄했다.
“이제야 진짜 빙궁에 온 듯하네요.”
중원 사람들이 북해의 여인들이 백설 같은 피부의 미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건 한참 착각이었다.
일 년 내내 눈 덮인 지역이라 반사된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구릿빛으로 번뜩였다.
귀영은 잔뜩 기대했다가 실망을 했는데 빙궁에 와서 눈이 번쩍 뜨였다.
빙궁주를 비롯한 귀족들은 중원에 알려진 대로 투명하고 맑은 피부와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빙궁주가 청아한 목소리로 반겼다.
“한겨울 추위는 우리 빙궁 사람들도 두려워하는데 이를 뚫고 오다니. 정말 대단하군요.”
놀랍게도 빙궁주는 무한을 알고 있었다.
“중원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게 참으로 우습지요. 우리 북해에 오면 이 땅의 중심이 여기라는 걸 알게 된답니다.”
“모두가 자신을 중심이라 여기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본 궁주의 말을 믿지 못하는군요. 그렇다면 밤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무한은 오면서 본 밤하늘을 떠올렸다.
신비한 빛과 함께 거대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게 곧 세상의 중심을 뜻하는 건 아니려나, 굳이 빙궁주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날, 무한 일행을 위한 연회가 열렸다.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싱글벙글인 귀영과 달리 남궁우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늘 남장을 하고 다니면서도 자신의 미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빙궁의 여인들은 이국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어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더구나 소궁주란 여인이 자꾸만 무한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고, 심지어 껴안기까지 하니 영 불편하였다.
결국, 남궁우의 성화에 북해빙궁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제 곧 몇 달 간 밤이 올 텐데. 이럴 때 길을 가는 건 지혜롭지 못한 일이에요.”
빙궁주가 말렸으나 남궁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 맹주, 조만간 중원으로 갈 건데 그때 꼭 찾아갈게요.”
소궁주의 말에 남궁우는 무한을 잡아끌고 서둘러 빙궁을 나섰다.
북해빙궁을 떠난 무한은 서쪽으로 길을 잡았다.
눈보라를 헤치며 길도 없는 눈밭을 가는 건 무공을 익힌 고수들에게도 고행이나 마찬가지였다.
밤도 낮도 아닌 어두운 하늘이 계속 이어졌다.
마차는커녕 말도 타고 갈 수가 없어 걸어야 했고, 민가도 없어 항상 야영을 해야 했다.
이미 지도도 의미가 없어졌다. 오로지 밤하늘의 별을 의지하며 가는 길이다.
한 달여 여정이 계속되자 귀영은 입술이 다 부르텄다.
남궁우와 귀영이 극한의 자연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중간 중간 무한이 불어넣는 기운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연신 불만을 털어놓던 귀영도 어느 순간부터는 말이 없어졌다. 귀영은 묵묵히 걸으며 무한을 지켜보았다.
마치 예전 목검을 휘두르던 아이를 보던 그 시간으로 돌아간 듯했다.
온종일 나뭇잎 속에 숨어 아이를 지켜보던 그 끔찍했던 시절보다는 지금이 나았다. 적어도 대화는 할 수 있었으니까.
간혹 맹수들이 달려들곤 했다.
호랑이나 곰은 별게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때려잡아 입을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먹을 수 있으니 오히려 반가웠다.
가장 곤란한 놈들은 늑대였다.
무리지어 달려드는 늑대들은 우두머리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쫓아왔다.
계속된 어둠을 벗어나자 끝없는 황무지가 이어졌다. 이어 뜨거운 사막과 거대한 호수를 지났다.
그렇게 몇 달을 걸어 천산에 이르렀을 때, 귀영이 말했다.
“나, 도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러자 남궁우가 웃었다.
“귀선이라 불러드릴까?”
***
“천주께서는 서역으로 가셨습니다.”
천산에 오라던 소마는 없고 천주의 대리를 맡은 사추선이 맞아주었다.
눈 덮인 봉우리들이 줄줄이 이어진 천산은 십만대산이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무한 일행을 맞은 십이호교가문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그들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사추선이 천주의 초빙이라고 공포하였기에 감히 허튼 짓을 하지 못했다.
첫날 형식적인 연회가 끝나고 마뇌가 다가왔다.
“내일은 제 집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
무한의 여정은 계속됐다.
천산을 떠나 곤륜을 거쳐 아미와 당가, 청성을 지나 운남을 거쳐 월국까지 들어갔다.
그렇게 천하를 주유하고 맹으로 돌아오니 그사이 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게 누구신가? 혹시 무림맹주? 설마 아직도 무림맹주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마중 나온 형소가 불만을 터뜨렸다.
삼 년 전부터는 맹하고도 연락이 끊겼다. 그러니 형소가 분통을 터뜨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사이 다른 맹주를 세운 건 아니겠지?”
“누가 무림맹주를 하려고 하겠어? 골치 아픈 일이 하나둘이 아닌데.”
“……?”
형소가 한숨을 팍, 쉬곤 말했다.
“종남과 화산이 기어이 한판 붙었어. 사망자가 한둘이 아니라고. 지금 장로전은 양파로 갈려서 분위기가 살벌해.”
그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흑천과 흑월이 지겹게 싸우고 있지. 그 통에 중간에 낀 중소문파들까지 죽어나가는 중이야. 이 새끼들이 지들끼리 싸우면 됐지. 왜 중소문파까지 치는지. 서로 짜고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지경이야.”
“도천장원에서 지원요청이 왔어. 동영에서 건너온 해적이 그냥 해적이 아니야. 수천 명이 넘는다더라고.”
“수상한 세력이 암약하고 있어. 십천회라는데 산서를 근거지로 하고 점차 세력을 넓히고 있지.”
천하는 여전히 북새통이었다.
무한이 형소의 어깨를 툭, 치고 말했다.
“저녁에 술 한 잔 하자.”
형소가 입을 쩍, 벌렸다. 무한이 먼저 술자리를 갖자고 한 건 처음이었다.
“너, 사람 됐구나.”
그러자 뒤따르던 귀영이 말했다.
“아주 몹쓸 사람이 됐지.”
***
귀영의 말대로 무한은 아주 몹쓸 사람은 아니지만, 수상한 소문을 달고 다녔다.
맹에 복귀한 지 사흘 만에 무한은 종남과 화산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두 파의 분쟁이 종식됐다.
그런데.
“종남과 화산의 장문인들 멱살을 잡아 앉혔다더라고.”
“설마…… 아무리 무림맹주라도 그럴 수는 없지. 뭔가 잘못 안 거 아니야?”
“진짜라니까? 양파 장문인의 목에 칼을 대고…… 그랬대. 싸우고 싶으면 너희 둘이 싸워봐라.”
“하하하. 농담이 너무 지나치네.”
수상한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무한이 흑수애를 다녀온 뒤에 호남에 빠르게 퍼진 소문이 있었다.
“흑수애가 무너졌다며?”
“뭐?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났다는 건가?”
“그냥 무너졌대. 흑천이 이주하느라 바쁘다더군.”
“오호, 흑월이 살판났겠군.”
“흑월이 잠수 탔다는 걸 아직 모르나 보군.”
“뭐라고? 왜?”
“모르지. 흑월의 자취가 싹 사라졌다고.”
소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림맹주가 산서성을 방문한 후에 성 밖에 머리가 주렁주렁 걸렸다.
무려 열 명이나 효수 당했는데 그들의 신분을 아는 이들은 기겁하곤 쉬쉬하였다.
이후로 십천회라는 수상한 조직에 대한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아는 건 무림맹에서 무력대 전원을 급파하여 절강성을 침탈하는 동영의 해적을 몰살했다는 사실뿐이었다.
“무림맹이 전 무력을 동원할 줄은 몰랐어. 경비 서던 무사들까지 총동원 했다더라고.”
“조정에서 못한 일을 한 거지. 무림맹이 뭘 하나 했더니 이번에 제대로 보여줬어.”
절강의 해적들 때문에 골치 아팠던 조정에서 무림맹에 공로를 치하하는 예물을 보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
“으음, 이대로 후기지수들을 보내도 될까?”
형소가 우려하였다.
피전격과 약속한 오 년이 됐다. 후기지수 비무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보냈다가 다 죽는 거 아닐까? 그랬다간 바로 흑백대전이야. 이번 후기지수는 대파와 세가 출신들이라고.”
과연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오 년 동안 비무대회를 착실히 준비하였기에 선발된 십인 모두가 대파와 세가 출신이다. 만일 잘못되면 엄청난 파장이 일 것이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피전격이 그럴 사람은 아냐.”
자존심이 강한 피전격이다. 자기가 한 말은 지킬 것이다.
“네가 한 일 때문에 걱정하는 거지. 아무리 피전격이라도…….”
형소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흑수애를 무너뜨리다니. 그건 너무했지”
무한이 흑수애 절벽을 다 무너뜨리자 흑천은 급히 동정호로 본거지를 옮겨야 했다.
“내가 직접 인솔해서 다녀오지.”
“안 돼. 널 보면 당장 죽이려 들 거야. 내가 갈게.”
“과거, 피전격이 직접 무림맹에 왔었어. 그러니 내가 가는 게 맞아.”
그러면서 무한이 손에 찬 손목보호구를 풀어 형소에게 건넸다.
“왜 이걸 내게……”
“네가 아니라 소운에게 주는 거야.”
형소운은 형소의 아들이다. 무한이 여정을 하는 사이 형소에게 아들과 딸이 생겼다. 세 살 난 형소운은 한창 뛰어다니고 있다. 딸은 아직 강보에 싸여 있는데 형일천이 품에서 내려놓지를 않는다고 한다.
“내 아들에게는 이미 귀왕갑이 있는데…….”
“이 손목보호구, 네가 사준 거야. 기억나지? 이 보호구 덕분에 여러 차례 목숨을 건졌다. 소운의 목숨도 지켜줄 거야.”
“아…….”
형소가 재빨리 받아들었다.
“무림맹주 신물이니 감히 그 어느 누구도 건들지 못하겠지?”
***
“흑수애와 비슷하군.”
흑천의 새로운 둥지는 강과 호수라는 것만 달랐을 뿐, 흑수애와 비슷했다. 뒤로 절벽이고 앞으로 물이다.
멀리 부두가 보였다.
흑백도와 마도가 함께 하는 후기지수 비무대회인 만큼 다양한 관객이 배를 타고 흑천으로 건너왔기에 새로 이주하며 지은 부두가 좁아터질 지경이었다.
무한의 일행을 실은 배가 천천히 부두에 닿았다.
도열한 흑천의 무사들이 무한을 보는 눈길이 싸늘하다. 무한이 절벽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갖은 고생을 하며 본거지를 이전해야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피전격은 무한을 보기도 싫다며 자기 거처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날 저녁.
우사가 찾아와서 한숨을 쉬었다.
“대체 왜 그러셨소? 아무리 적이지만 천재지변을 일으키다니. 천주가 무림맹을 박살내겠다는 걸 간신히 뜯어 말렸소.”
“우사, 그건 오해요. 본 맹주가 무슨 힘이 있어 절벽을 무너뜨릴 수 있겠소. 이게 다 우사가 알려준 통로 때문이오.”
우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아, 하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무한이 흑수애를 빠져 나갈 때 자기가 통로를 일러준 게 기억난 것이다.
우사가 얼굴을 붉혔다.
“무림맹주가 되더니 정말 뻔뻔해지셨구려. 나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피 천주를 찾아 설득하려고 흑수애로 들어가던 길이었소. 그런데 석상 바로 밑에 기관장치가 있어 무심코 당겼더니…….”
흑수애 절벽이 요동치고는 차례차례 무너졌다는 무한의 말에 우사가 입을 쩍, 벌렸다.
“그런 장치가 있었다는 거요?”
“몰랐소? 아무튼 우사께서 피 천주의 오해를 풀어주시구려.”
그러나 피전격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비무대회를 치르는 내내 무한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비무대회는 성황리에 마쳤고, 최후의 승자는 흑천에서 나왔다. 그러자 기분이 다소 풀린 피전격이 무한에게 말했다.
“언젠가 무림맹 뒷산이 무너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