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화정무관을 뒤로하고 다시 여정에 올랐다.
귀영의 불평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무림맹주의 중원 순찰(?) 소식이 전해지며 무림이 떠들썩해졌다. 온갖 문파에서 길목마다 지키고 맹주를 청했다.
어느 한 문파를 들르면 다른 문파의 초청을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여정이 한없이 늘어지고 있다.
무한은 어느 순간부터 인적 없는 산길을 이용해 움직였다.
험한 산길을 타고 차디찬 맨바닥에서 야영하며 귀영은 자기 주둥이를 몇 번이나 후려쳤는지 모른다.
“이놈의 주둥이, 괜한 헛소리를 해서…….”
***
“이제 왔습니다.”
무한의 말에 천기자의 눈꺼풀이 힘겹게 열렸다.
“먼 길을 왔구나.”
아담한 정원이다. 천기자는 대나무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망혼고는 제거했으나 후유증은 어쩔 수 없었다. 천기자의 기력은 날로 쇠해갔다.
“손우자는 오가촌에 묻혔습니다.”
“들었다. 제 운명이니 누구를 탓할 것도 없지.”
천기자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는 이미 죽음을 초월하였다.
“봄볕이 귀하구나.”
한마디를 하고 눈을 감았다.
가느다란 천기자의 숨소리를 뒤로하고 무한이 물러나왔다.
정원을 나와 내전으로 건너가니 강유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소와 형소가 곧 도착한다는구나.”
소소는 혼인식을 강소성 집에서 치르기를 원했다.
천기자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기에 갑자기 서두른 혼인이다.
중원을 유랑 중인 무한이 소식을 듣고 바로 왔는데 신랑 신부보다 먼저 도착했다.
강유는 오랜만에 보는 딸을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는지 대문 밖까지 마중을 나갔다.
무한도 함께 대문 앞에 서서 길 쪽을 바라보았다.
멀리 몇 대의 마차와 말을 탄 무인들이 나타났다.
“이제 오는군.”
무심한 듯 한마디 하는 강유의 표정에 반가움 빛이 어렸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고 형소와 소소가 내렸다. 뒤에 따라온 마차에서는 형일천이 내렸다.
“하하! 사돈, 잘 있었소?”
강유를 본 형일천이 성큼성큼 다가오며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돈이라지만 형일천이 한 배분 높으니 강유는 깍듯하게 대했다.
“무림맹 원로전주가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하는 일 없이 밥만 축내는 자리요.”
맹주의 자리를 넘긴 형일천은 무림맹 원로전의 원주를 맡은 뒤 안색이 밝아졌다. 천상 무인인 그는 수련에만 집중할 뿐 맹에는 거의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잠시 후.
천기자에게 문안을 드리고 온 형소와 소소가 무한이 기다리고 있는 다실로 왔다.
무한과 남궁우, 형소와 소소가 오랜만에 모이자 이야기꽃이 피었다.
“대체 맹에는 언제 돌아올 거야? 이러다 무림맹에 맹주가 있다는 걸 잊어버리겠어.”
형소가 무한의 여정이 길어진 걸 투덜대고.
“무림맹에서 혼사를 치렀으면 하객이 구름떼처럼 몰렸을 건데…….”
남궁우가 아쉬워하고.
“남궁 군사는 꼭 무림맹에서 혼인을 해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다 동원해줄 테니.”
어딘가 모르게 다소곳해진 소소가 남궁우의 말에 답하고.
“아직 반에 반도 못 돌았어. 일이 년은 더 걸릴 거야.”
무한이 자신의 여정을 밝혔다.
서로 엇갈려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며 떠드는데 귀영이 들어와 고했다.
“남궁세가에서 하객이 왔습니다.”
“응? 하객은 안 받기로 했는데?”
형소와 소소는 혼인을 가까운 사람에게만 알렸다. 천기자가 임종을 앞둔 데다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강유의 성품을 생각하여 하객도 사양했다.
그랬기에 남궁세가의 하객이 뜬금없기는 했다.
잠시 후.
남궁세가 소가주 남궁악이 들어왔다.
“오라버니가 여기까지 무슨 일이래요.”
“가주께서 널 잡아오라 하셨다. 맹주도 끌고 오라시더라.”
“아니 뜬금없이 왜?”
남궁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궁악이 혀를 찼다.
“너는 오늘 이 자리를 보고도 느끼는 바가 없냐?”
남궁우가 주위를 둘러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형소와 소소가 크게 웃었다.
“남궁 가주께서 칼을 빼들었네.”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차린 남궁우는 얼굴이 벌게졌다.
형소와 소소가 혼인식을 치르고 며칠 후, 천기자가 세상을 떠났다.
천기자의 장례 또한 조촐하게 치러졌다.
이로써 한때 천하를 군림했던 천하사패는 무림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장례를 마치고 모두 대청에 모였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니 모두가 아쉬워하였다.
“맹으로 오시지 않으시렵니까?”
“제갈주승이 잘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곳이 편하네.”
무한의 초빙을 사양한 강유가 딸에게 말했다
“소소에게도 돌아올 곳이 있어야지.”
“무슨 소리인가? 소소는 이제 형씨 집안사람이네. 죽어서도 형씨 집안의 귀신이 될 것이야.”
형일천이 어림없는 소리 말라는 듯 딱 잘라 말하곤 소소에게 말했다.
“아이 셋을 낳기 전까지 친정에 갈 생각 말아라.”
“아버지!”
형소가 무안하여 아버지 형일천의 말을 막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형소가 혼자 자라서 너무 외롭게 컸다. 그러니 자식이라도 많아야지.”
형일천이 자신의 손을 벌렸다.
“낳기만 해라. 내가 다 키워줄 테니.”
***
남궁악은 무한과 남궁우가 다른 곳으로 빠질까봐 아예 동행을 하였다.
남궁악의 감시(?) 겸 호위를 받으며 남궁세가에 당도했을 때는 초여름이었다.
무한이 온다는 기별을 받은 남궁무룡이 십 리 밖까지 마중을 나왔다.
“하하. 무림맹주의 행차를 고대해왔는데 이제 오시는군.”
“진작 왔어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맞네. 늦긴 했지. 아주 많이 늦었어.”
남궁무룡의 시선이 남궁우를 향했다.
“사촌동생 내외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내가 저놈을 떠안았지. 저놈을 치워야 나도 마음 편히 뒷방으로 물러날 수 있단 말일세.”
“아직 정정하신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뒷방이라니요.”
남궁우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아니다. 나이가 드니 아침저녁으로 다르다. 이제는 검을 드는 것도 힘들단 말이다.”
남궁무룡이 무한을 보았다.
“이 녀석을 계속 달고 다니려면 아예 혼인을 하게.”
중언부언 할 수 없게 쐐기를 박듯 딱 잘라 말했다.
“혹 마음에 둔 여자가 있어도 저 녀석은 처리해야겠네. 영웅이 삼처사첩을…….”
“가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남궁우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이 녀석 보게? 가주에게 지금 반항하는 것이냐?”
딸이 없는 남궁무룡에게 남궁우는 딸과 같은 사촌조카였다.
“오냐 오냐 했더니. 이봐라. 이 녀석을 당장 잡아다 방에 가둬라. 혼인할 때까지 한 걸음도 못 나온다.”
그러자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혼인은 저 혼자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부모님께도 알려야 하고…….”
“흐흐. 이미 다 준비했네. 맹주의 양친도 이리 오는 중일세.”
“예?”
“이미 혼인첩을 보내 승낙을 받았네.”
남궁무룡은 정말 작정을 하고 준비를 해뒀다.
“구파일방과 다른 세가에도 사발통문을 돌렸다네. 무림맹주가 남궁세가에서 혼인을 할 거라고.”
“아…….”
“무림맹주를 조카사위로 두는 게 본 가주의 마지막 대업일세. 어찌 소홀할 수 있겠는가?”
무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언젠가 혼인을 할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치를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무림의 경사지. 크하하하!”
남궁무룡이 득의에 찬 광소를 터뜨렸다.
남궁무룡의 말대로 며칠 후 심군하와 진소향, 그리고 봉영영과 심원봉이 도착했다.
진소향이 흐뭇한 얼굴로 무한과 남궁우를 보며 말했다.
“이제야 내가 마음이 놓이는구나.”
이어 신검산장의 담철조와 공곤, 궁여직이 당도하고 하기주와 강문평도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무림맹에서는 형소와 소소, 대장로 운학진인이 오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물론이고 중원 대소방파에서도 하객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독왕은 당가의 가주 당전수와 함께 나타났다.
“하하, 결국 혼인을 하는구나.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독왕이 자신의 손자를 장가보내는 듯 흐뭇해하였다.
남궁세가에는 그야말로 무림 고수들이 구름같이 모였다.
심지어 흑천에서도 사람을 보내왔고, 아직도 중원 유랑 중인 소마도 찾아왔다.
“나를 따라 중원 유랑을 한다며?”
“따라서 하는 건 아닙니다만.”
“나는 동영까지 갔다가 서역으로 넘어갈 참이다. 거기까지 따라오지는 않겠지?”
몰려드는 하객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한은 기가 막혔다.
남궁무룡이 언제부터 준비를 했기에 이 많은 이들이 알고 찾아오는 건지 의아하기만 했다.
“대체 언제부터 준비하셨기에…….”
“남궁지낭을 데려가는 일인데 도둑장가라도 할 심산이었나? 어서 가세. 천하상단 천이금 단주가 왔다는군.”
남궁명이 웃으며 무한을 잡아끌었다.
천이금은 백가상단 백의영 부부와 함께 왔다. 백의영의 품에는 뒤늦게 얻은 아들이 잠자고 있었다.
무한의 혼례식은 남궁세가의 대광장에서 성대하게 열렸고, 이어진 잔치는 보름이나 지속되었다.
***
눈 덮인 벌판은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났다. 끄트머리 야트막한 구릉에 침엽수림이 펼쳐져 있다.
숲속 공지에 마차 한 대가 서 있고 옆으로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에 북해빙궁이라니요?”
귀영이 모닥불에 걸린 솥에서 뜨거운 국물을 담아 호호 불며 투덜거렸다.
눈 덮인 설원을 오는 내내 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보라가 수시로 몰아쳤고, 마차는 수시로 눈구덩이에 빠졌다. 그때마다 무한이 내려 들어 올리곤 했다.
무한의 여정은 혼례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일 년여 중원 남쪽 바닷가를 돌아본 후, 배를 타고 요동으로 건너가 장백산 장백검문을 찾았다가, 이제 저 멀리 북해에 있다는 빙궁을 찾아가는 길이다.
“북해빙궁은 중원 무림에 속하지도 않는다고요. 맹주가 가봐야 환대하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아니, 적으로 대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귀영은 천하를 유랑하는 무한의 속내가 정말 궁금했다.
무림맹 심처에서 호의호식하며 지낼 수도 있는데 찬바람 맞으며 계속 길을 이어가니 그럴 만도 했다.
무한이 묵묵히 나뭇가지를 끊어 모닥불에 던지는데 마차 문이 열리며 남궁우가 내려왔다.
두꺼운 옷을 껴입은 남궁우가 입김을 호호 불며 말했다.
“북해빙궁은 좀 심하긴 해.”
천지를 떠돌면서 이제껏 불평 한마디 없던 남궁우도 북해의 매서운 추위는 질렸는지 엄살을 떨었다.
“따끈한 국물을 먹으면 좀 괜찮아질 거야.”
무한이 솥에서 국물을 떠서 건네주었다.
“나도 궁금해. 우리 여정의 끝이 어디야?”
남궁우가 물었다.
무한이 눈을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차고 시린 겨울하늘에는 별이 가득하다.
“천하방에 있을 때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
무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천하방은 천하를 관장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 그런데 막상 그 좁은 성에서 서로 아옹다옹하며 한줌 권력을 쥐기 위해 혈안이더라고.”
무한이 시선을 내려 침엽수림 밖 눈 덮인 벌판을 보았다.
“천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다툰다는 생각을 했지. 그래서 길을 나선 거야.”
“…….”
“동시에 나의 한계를 알고 싶어.”
무한의 무공은 이제 단계를 논하는 게 무의미한 경지에 이르렀다. 저 눈 덮인 벌판을 가듯 미지의 세계를 가는 중이다.
‘어쩌면 소마도 같은 생각일 수도 있어. 그가 천마에 오르려면 세상의 끝까지 다녀와야 할 거야.’
무한도 소마도, 각자의 방법으로 무의 극한을 향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