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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47화 (247/250)

247화

마차가 수관문 정문 앞에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먼저 내렸다. 수수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르게 남다른 기운이 흘러나왔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용모의 청년이었다.

이어서 역시 수수하지만 단정한 차림의 미녀가 내렸다.

수광은 눈이 번쩍 뜨였다. 이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 봤다.

무림맹주의 호위들인가?

한옆에서 주약평 또한 침을 꿀꺽 삼키고 다음에 내리는 사람을 뚫어져라 주시하였다.

“……?”

마흔 가까이 된 사내가 내리는데 어째… 약간 째진 눈에 누리끼리한 얼굴이 약간 험악해 보인다. 아무리 봐도 무림맹주 같아 보이지 않았다.

다음 순간, 도열한 수관문의 무사들이 일제히 포권을 하며 외쳤다.

“무림맹주를 뵙습니다!”

저 험악해 보이는 사내가 무림맹주라고?

주약평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수관문주 수신창이 말에서 내려 청년에게 다가가 말하는 게 들렸다.

“맹주, 안으로 드시지요.”

동시에 깨달았다. 저 훤칠한 청년이 무림맹주라는 걸.

주약평은 맹주가 젊다고만 들었지 저렇게 젊을 줄은 몰랐다.

주약평의 가슴이 뛰었다.

감히 커다란 꿈을 품었다.

저 청년이 무림맹주라면… 나도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수광이 씨익, 웃으며 주약평에게 말했다.

“봤지? 저분이 무림맹주 심무한 대협이야. 오늘 저분과 함께 저녁을 먹을 거라고.”

수광이 어깨를 으쓱하며 수관문으로 들어갔다.

주약평은 정신없이 달렸다.

수관문에서 약 십 리 정도 떨어진 외곽에 있는 작은 무관.

화정무관.

주약평이 쏜살같이 무관으로 들어갔다.

무관 마당에서 대여섯 살 난 아이들이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었다. 가르치고 있던 사범이 주약평을 보더니 화를 벌컥, 냈다.

“주약평, 넌 대체 뭐하다 이제 오는 거냐? 내가 이 꼬맹이들 수련까지 맡아야 하는 거냐고!”

주약평은 들은 척 만 척 내당으로 달려갔다.

마침 관주가 내당 다청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사부!”

이제 막 환갑을 지난 사부가 주약평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무림맹주! 무림맹주가 정주에 왔어요!”

“그래서?”

“수관문에 무림맹주가 들어갔다고요.”

“…….”

주약평의 사부 화익이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무림맹주라면 과거 천하제일인의 손자 심무한이다.

천하제일인 심양조!

먼발치에서 본 심양조가 떠오르자 화익의 머릿속은 삼십 년 전 정마대전 당시로 돌아갔다.

심양조의 휘하에서 악귀처럼 날뛰는 마천도들과 수없이 싸웠다. 그가 살아남은 건 정말 천운이었다.

수많은 전우들이 죽고서야 정마대전은 끝이 났다. 천하방이 결성되었지만 그는 미련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 무관을 열었다.

천하의 기재를 배출하리라던 웅심을 현실은 따라주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작은 무관의 늙은 관주가 되었다.

그래도 한평생 그런대로 잘 살았다고 생각하며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말년에 얻은 제자 주약평이 제법 뛰어나 가르치는 보람을 느끼고 있다.

“우리도… 우리 무관도 무림맹주를 초빙하자고요.”

주약평의 말에 화익이 실소를 흘렸다.

‘무림맹주가 이 작은 무관에 왜 온단 말이냐?’

솔직히 수관문에 들었다는 것도 미심쩍다. 수관문이 정주 일대에서 좀 알려졌다지만 중원으로 나가면 알아주는 이를 찾아보기 어려운 고만고만한 문파인데.

주약평이 정신없이 외쳤다.

“사부는 천하제일인 심양조와 함께 마천과 싸웠다면서요? 그러니 맹주가 올 만도 하잖아요.”

자신이 들려줬던 옛 무훈담을 기억하고 있는 주약평이다.

“생각해보자꾸나.”

어린 마음에 상처를 주기 싫어 화익이 딱 잘라 말하지 못하고 여지를 두었다.

하지만 주약평은 사부의 그 말이… 생각 없다는 말이라는 걸 잘 안다. 사부는 내키지 않는 일은 생각해보자 하고는 묻어버린다.

‘안 돼. 무림맹주를 만나는 건 일생일대의 기회야.’

주약평은 다시 수관문으로 달려갔다.

어느새 해가 졌다.

수관문은 장원 전체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수문무사는 안에서 벌어지는 연회에 들어가지 못하는 게 불만인 듯 입이 댓발이나 튀어나와 있었다.

주약평이 기웃거리자 퉁명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냐?”

“나는 수광이 친구예요.”

친구라기보다는 호적수라는 표현이 맞긴 하지만.

“이 저녁에 왜 수광 공자를 찾는 거냐? 오늘은 못 만난다.”

“손님이 왔다고 들었어요. 무림맹주라던데요?”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제대로구나. 우리 수관문에 경사가 났지.”

“맹주가 여기서 묵나요?”

“당연하지. 이 근처에선 수관문이 제일 아니냐.”

수문무사도 약간 덜떨어진 놈이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은근히 뻐기고 있다.

“아… 맹주는 언제 떠나시나요?”

“그야 내가 어찌 알겠니. 어서 꺼져라.”

마침 교대하는 무사가 왔다. 수문무사가 주약평을 내몰았다.

주약평은 집으로 돌아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다시 수관문으로 달려갔다.

주약평의 손에는 화정무관이라는 깃발이 들려 있었다.

“뭐냐?”

수문무사가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묻자 주약평이 말했다.

“무림맹주를 기다리는 겁니다.”

“이 새끼가? 뭐 하는 짓이냐? 어서 꺼지지 못해?”

수문무사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주약평에게 다가가는데 대문이 열렸다.

“헉!”

수문무사가 황급히 제자리로 와서 섰다.

이어 한 무리의 사람이 걸어 나왔다. 가장 앞에 선 두 사람은 무림맹주와 수관문주다.

“며칠 묵으셔도 되는데 이리 일찍 가십니까?”

수관문주의 말에 무한이 예를 취했다.

“수관문의 진정은 이미 담았습니다. 무림맹에 들어오겠다는 그 한마디로, 이제 수관문은 형제입니다.”

“진작 입맹 할 생각이었습니다. 맹주께서 이런 분인 줄 알았다면 지체하지 않았을 겁니다.”

수관문주는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정주의 패자라고 자처하지만 사실 대파와 세가에 비하면 이름도 없는 문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림맹주가 수관문의 초청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하룻밤 묵었다.

그 밤에 나눈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마음을 흔들었는지.

- 무림맹은 대파와 세가의 맹이 아닙니다. 본 맹주가 있는 한!

수관문주는 무림맹에 입맹 하고자 하면서도 대파와 세가의 곁다리가 되는 게 아닌가 하여 이제까지 망설였다. 그래서 직접 맹주의 앞길을 막고 초빙하였다.

듣고 싶었던 답을 듣고 마음의 결정을 내린 수관문주는 후련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이 예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한 아이가 불쑥 다가와 포권을 하였다. 등에 깃발을 달고 있는데 화정무관이라 쓰여 있었다.

수관문주가 미간을 찌푸리곤 물었다.

“무슨 일이냐?”

주약평은 무한을 향해 포권을 하며 말했다.

“화정무관의 주약평이 무림맹주를 뵙습니다. 맹주께서 화정무관에 오셔서 한 수 지도를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이 녀석이?”

수관문주가 호통을 치려는데 무한이 막았다.

“네 이름이 뭐라고?”

“주약평입니다.”

무한의 시선이 잠시 아이의 얼굴에 머물렀다.

“약평이라…… 그 이름을 쓰는 무인이 있었지. 내게 한 수 지도해달라고 했느냐?”

“예. 나중에 저도 무림맹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주약평이 눈빛을 반짝이며 대답하였다.

“저… 화정무관은 이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작은 무관입니다.”

수관문주는 자신 때문에 온 맹주가 동네무관까지 가게 될까봐 화정무관의 실상을 넌지시 알렸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무의 길을 가는 자는 모두가 동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수관문주가 난처해하자 무한이 말했다.

“동도가 청하는데 맹주가 거절할 수는 없지요.”

그러고는 주약평에게 말했다.

“네가 온 걸 관주도 아느냐?”

“아… 그…….”

주약평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자기 혼자 생각으로 온 것이니 대답할 말이 궁했다.

“화정무관의 관주가 나를 부르는 것이냐. 아니면 주약평이 나를 청한 것이냐?”

주약평이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대답했다.

“제가 청한 것입니다.”

맹주를 초청하고 싶은 나머지 윗사람의 허락도 없이 나선 게 바로 들통 나고 말았다.

야단을 맞을 줄 알았는데 무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불쑥 화정무관을 찾는 건 실례가 아니겠느냐?”

“절대, 절대 아닙니다. 사부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주약평이 고개를 쳐들고 힘주어 말했다. 간절한 눈빛에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가서 윗분에게 일러라. 맹주를 초청해도 되는지 허락을 받고 오거라.”

주약평의 눈이 한껏 벌어졌다. 그러더니 고개를 꾸벅, 하고는 달려갔다.

등에 단 깃발이 펄럭거리는 게 주약평의 마음을 대신하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보던 수관문주가 웃으며 말했다.

“화정무관의 관주 화익은 정주 무림의 원로이기도 합니다. 한때 정마대전에도 참여했다더군요. 무관은 작지만 사람은 결코 작지 않지요.”

마침 무한의 마차가 대문 앞에 당도했다. 무한이 수관문주와 작별하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멀어지자 수관문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정한 무림맹주로구나.”

화정무관이 뒤집어졌다.

“정말 무림맹주가 온다고 했냐?”

사범이 넋이 나가 되물었다.

화정무관의 관주 화익도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니까요? 사부, 어서 허락을 해주세요.”

화익이 무관을 돌아봤다.

사범 하나와 어린 제자 주약평을 데리고 동네 꼬마들에게 권장을 가르치는 곳이다.

이런 곳에 무림맹주를 초청해도 되나?

“사부!”

주약평의 재촉에 화익이 정신을 차렸다.

“맹주가 오겠다면, 당연히 모셔야지. 한 사범, 어서… 장을 봐 오게. 나는…….”

화익이 허둥지둥 대다 말고 크게 웃었다.

주약평이 의아하여 사부를 봤다.

“왜 웃으시는 건데요? 어서 초대장이나 써주세요.”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이 생각나서 웃었다.”

화익의 머릿속에 오래 전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말단 무사와 함께 주먹밥을 나눠먹던 사람이었다.

“맹주,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어제 건너편 수관문에서 묵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관이라니요. 십 리도 못 왔습니다.”

화정무관에서 열어준 연회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온 귀영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왜요?”

“중원이 얼마나 넓은지 아십니까? 이렇게 가다간 죽을 때까지도 맹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맹주가 꼭 맹에 있어야 하는 겁니까?”

“아아… 그건 아니지만 이렇게 유랑걸식 하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요?”

“유랑걸식이라니요. 화정무관에서 우리를 초대한 겁니다. 구걸하는 게 아니죠.”

무한의 말에 귀영이 한숨을 쉬었다.

“맹주는 이 작은 무관에서 맹주를 대접하기 위해 얼마나 돈을 썼을지 정말 모릅니까?”

“모릅니다.”

“역시 귀한 집에서 자라 어려운 사람의 고달픔을 모르는군요. 저기 저 무관생의 옷차림을 보십시오. 거의 넝마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맹주는 화정무관에 와서 진수성찬을 들었지요. 이게 바로 갑질입니다. 갑질!”

그러자 남궁우가 귀영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귀 호위. 모르나 본데 맹주는 자기가 먹은 건 다 제값을 치러. 심지어 귀 호위가 먹은 것도.”

“……?”

“우리가 가고 나면 신검산장에서 사람이 와서 정산을 다 한다고.”

“……!”

“귀 호위가 정 불만이라면 앞으로는 산길로 가지요.”

당황한 귀영의 얼굴을 일별한 무한의 눈길이 무관생 주약평에게 향했다.

홀로 와서 무림맹주를 청한 당돌한 녀석. 어려도 무인은 무인이다.

무한의 입가로 한 줄 미소가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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