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소마는 천하상단을 찾아 혁련향의 유해를 천산으로 이장하겠다고 소동을 피웠다.
그리고 소주의 절경을 보고는 신교의 제당을 짓겠다고 해서 정파와 분쟁을 빚었다.
“예전에 심 대협께서 소마의 천성이 악동이라 하셨는데… 정말 그런 모양이군.”
고벽후가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
“그런데 마적이 그리 횡행합니까?”
무한은 아까 마적을 며칠 동안이나 쫓았다는 장초의 말을 잊지 않았다.
“혈랑대가 없어지니 오히려 여기저기서 마적들이 출몰하더군. 게다가 무공을 익힌 자들도 꽤 많아서 골치야.”
“무공을 익혔다면, 무림인들이 마적질을 한다는 겁니까?”
“맹주가 중원의 산채와 수채를 다 박살내지 않았는가. 놈들이 올 곳이 어디 있겠나. 난주는 혈랑이 버티고 있으니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마적질을 하더군.”
마천이 물러나고 천하방도 사라진 뒤 한동안 멸마대만 남아 고원의 마적을 상대했다.
마흔이 좀 넘는 멸마대만으로는 무수한 마적을 모두 토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뒤따라오던 연추산이 거들었다.
“파맹단이라는 놈들이 근자에 생겼는데 세가 장난이 아니야. 많을 때는 수백 명에 이른다더라고.”
“파맹단?”
“무림맹에 원한이 있는 놈들이지. 그래서 파맹단이라나? 여러 마적의 연합인 듯해. 수시로 뭉쳤다 흩어지니 쫓기도 힘들어.”
무한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었다.
“그런 부작용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맹에 연락하여 멸마대의 충원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러자 장초가 끼어들었다.
“정말 충원이 절실해. 이제 새로운 얼굴 좀 보고 살자고. 늘 같은 놈들만 보니 아주 지긋지긋해.”
“비리비리한 놈은 차라리 보내지 않는 게 좋아. 며칠 못 가 죽어나간다고.”
연추산의 말에 무한이 웃었다.
“자원자를 뽑아 아주 강훈을 시켜 보내겠습니다.”
무림맹은 천하방과 달리 지부가 없다. 대파와 세가가 사실상 지부 역할을 한다.
그러니 멸마대의 위상은 독특하다.
그날 저녁.
멸마대가 손님을 맞아 내놓는 양 통구이 회식이 벌어졌다.
귀영이 난주에서부터 싣고 온 술통을 열자 멸마대가 환호하였다.
고벽후가 술잔을 들고 일어서 말했다.
“이봐, 오 년 전 어수룩한 무관 제자가 무림맹주가 될 줄 누가 알았겠냐?”
“대형, 나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어.”
홍화가 손을 들어 말하자 장초가 잡아 내렸다.
“부인, 자중하시오.”
“아냐. 나는 알았다고. 그때 겁도 없이 소마를 독대했잖아. 누가 그럴 수 있었겠어?”
고벽후가 파안대소를 하였다.
“맞아. 무관 제자 주제에 간이 배 밖에 나왔지. 승룡대를 구하고 광포를 살려 보낸 건 나도 놀랐지.”
천무행의 후일담이 쏟아졌다.
무한은 낯이 간지러워 술만 들이켰다.
그런데 남궁우가 가만 무한의 손을 잡았다. 무한이 돌아보자 남궁우가 속삭였다.
“맹주는… 취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
“…….”
귀가 밝은 귀영이 다 들었다.
“드디어 시작됐구나… 바가지.”
그때.
삐이익!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고원의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마적이다!”
성벽 경계무사의 외침에 술을 마시던 멸마대원들이 벌떡 일어나 병장기를 챙겼다.
연추산이 커다란 도를 들고 후아, 긴 숨을 토했다. 순식간에 취기가 가신 연추산이 고함을 질렀다.
“모두 정위치!”
멸마대원들이 성벽과 성문 등 자기 자리로 가는 사이 고벽후와 연추산, 무한이 성벽에 올랐다.
“허걱! 저 새끼들이 작정을 했네?”
성 밖 은은한 달빛 고원에 마적떼들이 새까맣게 몰려왔다. 얼추 봐도 오백은 넘을 듯했다.
서로 무리 지어 있는 걸 보면 인근의 마적들이 모두 몰려온 듯했다.
“저놈들 참 운도 없지. 하필 맹주가 온 날 기습을 할 게 뭔가.”
고벽후가 클클, 웃었다.
그때 마적의 무리 맨 앞에 선 자가 소리쳤다.
“고벽후! 나와라. 형제의 원한을 갚겠다!”
“엉? 저 새끼는 음산쌍귀의 소귀 아닙니까?”
연추산이 소리친 자를 알아보았다.
“대귀의 복수를 할 모양이군. 어디 처박혀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지?”
참 공교로운 일이었다. 무한이 천무행을 오던 날 고벽후가 따온 머리가 대귀였는데.
이후 잠적했던 소귀가 몇 년 만에 갑자기 대귀의 복수를 하러 왔다.
“안 그래도 저놈을 놓치고 내내 찜찜했었는데. 잘됐군. 맹주는 손 쓸 것도 없어. 내가 처리하지.”
고벽후가 반월도를 툭, 치며 성벽을 뛰어내렸다.
동시에 소귀가 말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파악!
소귀의 얄팍한 칼에서 파르스름한 강기가 날아왔다.
“저 새끼, 어디서 기연이라도 얻는 모양인데?”
소귀의 무공이 심상치 않았다.
고벽후의 반월도에서 반달 모양의 강기가 날아갔다.
콰쾅!
굉음에 이어 두 사람이 접전을 벌였다.
“놀랍군. 저놈들이 몰려온 이유가 있었어.”
소귀가 고벽후를 상대하는 사이 수백의 마적들이 성벽을 향해 짓쳐들었다.
그중 선봉에 선 이들이 말에서 솟구치며 성벽으로 날아들었다. 몇몇은 절정을 넘은 고수들이었다.
소귀가 고벽후를 상대하는 사이 고수들을 앞세운 마적떼가 멸마대를 공격하는 전략이었나 보다.
다만, 그들은 고벽후의 말대로 날을 잘못 잡았다.
파앗!
무한이 성벽에서 날아오르며 손을 휘저었다.
쿠웅!
거대한 강기의 벽이 형성되며 날아오르던 마적떼 고수들이 일제히 뒤로 튕겨나갔다.
“절대고수! 절대고수가 한 명 더 있다!”
마적떼 고수 중 한 명이 외치는 순간, 하늘로 날아오른 무한이 강기의 검을 날렸다.
파파팟!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나 날아오는 강기의 검에 마적떼 고수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피, 피해랏!”
쾅!
“크윽!”
몇몇은 피하고, 한둘은 간신히 막아냈으나 나머지는 강기의 검에 관통당하여 그대로 쓰러져갔다.
무한은 첫수부터 독수를 썼다.
다시는 멸마대 감숙지부를 넘보지 못하게 공포를 각인시킬 참이었다.
쿠쿵!
어두운 밤하늘이 무너질 듯한 굉음과 함께 무한이 마적떼를 향해 날아갔다.
퍼퍼퍽!
강기의 검이 비처럼 쏟아지며 마적떼들이 삽시간에 죽어갔다.
“크악!”
“이, 이건 말이 안 돼!”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멸마대원들이 뒤늦게 달려들었다. 마적들은 넋이 나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쓰러져갔다.
“커흑!”
고벽후와 소귀가 싸우는 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이어 튀어 오르는 머리.
자신이 고벽후를 붙잡고 있는 동안 다른 고수들과 마적떼가 멸마대를 해치우고 지원을 오길 기다렸는데, 오히려 무한과 멸마대에 의해 무너지자 당황한 소귀는 손발이 흐트러졌고, 고벽후는 어렵지 않게 그의 목을 쳤다.
이 광경을 본 연추산이 고함을 질렀다.
“대주가 소귀를 잡았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그간 마적떼를 쫓느라 갖은 고생을 한 멸마대는 하나라도 도망칠까 미친 듯이 달려들어 검과 도를 휘둘렀다.
무한 역시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마적은 같은 무림인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상단이나 민가 등 힘없는 자를 노략질하는 무리다. 그러니 한 놈도 살려 보낼 수 없었다.
잠시 후.
감숙지부 앞 고원에 마적의 시신들이 즐비하게 널렸다.
귀영과 남궁우는 성벽에서 전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맹주의 손속이 갈수록 잔혹해지는 것 같지?”
귀영의 말에 남궁우가 대답했다.
“그는 이제 심무한이 아니야. 무림맹주라고. 맹주로서 손을 쓰는 거야.”
***
무한은 공동파를 거쳐 호북으로 내려와 무당파를 들른 후 소림으로 넘어갔다.
무당파나 소림은 무한을 정중하게 맞았으나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쳇! 아직도 천하공부출소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숭산을 내려오며 귀영이 투덜거렸다.
맹주에 대한 예를 갖췄으나 어딘가 모르게 냉대를 받은 느낌에 기분이 상한 것이다.
“당연히 자기들이 차지할 줄 알았던 무림맹주 자리를 뺏겼으니 그럴 만도 하지. 불도를 닦는다고 해도 명예는 버리지 못하나봐.”
남궁우도 구시렁댔다.
“이제 대파나 세가는 가지 말자고요. 맹주, 우리를 환대하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껄끄러운 곳을 갈 필요가 있나요?”
“안 가면 오지 않았다고 또 앙심을 품을 거야.”
남궁우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무한은 개의치 않았다.
대파와 세가를 직접 눈으로 보고 사람과 분위기를 확인하고자 함이었지, 환대를 기대한 건 아니었으니까.
같은 대파라도 수행의 길이 다르고 무공이 다르니 기풍 또한 달랐다.
소림이나 무당과 달리 중소문파는 무한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무림맹주의 행보가 알려지며 예상 경로에 있는 문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나와서 무한이 오기를 기다렸다.
***
파파팟!
흙먼지가 일었다.
두 아이가 목검을 들고 겨루었고, 이를 몇몇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둘 다 용을 쓰며 목검을 휘두르는데 솜씨가 제법이었다.
따다닥!
목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이들은 열 살 남짓 되어 보였다. 한 아이는 고급스런 무복을 갖춰 입은 데 반해 다른 아이는 좀 남루했다. 헤진 무복을 기운 곳이 한둘이 아니다.
검식 또한 달랐다. 고급스런 무복을 입은 아이는 화려한 검식을 구사하였다. 제법 내력이 있을 법한 검법이었다. 다만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초식을 아이의 숙련도가 따라가지 못했다.
반면 남루한 아이의 검식은 단순하였으나 제법 수련을 했는지 힘의 안배나 초식의 숙련도가 적절했다.
한 아이는 검법의 우위를, 다른 한 아이는 숙련도의 우위를 점하였기에 비무는 팽팽하게 이어졌다.
이윽고.
따다닥!
퍽!
파악!
목검이 부딪히고, 두 아이는 서로 어깨와 옆구리를 격타했다. 실전이었다면 동귀어진 했을 것이다.
“크윽!”
“윽!”
아이들이 신음을 흘리며 떨어졌다.
고급스런 무복을 입은 아이가 분한 듯 남루한 아이를 보며 말했다.
“주약평, 오늘도 무승부야.”
“수광, 아직 시간이 있잖아. 오늘 끝을 보자.”
주약평이라 불린 아이가 호기롭게 말했다.
그러나 고급스런 무복을 입은 수광이 고개를 저었다. 입꼬리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 본문에 아주 대단한 손님이 오시거든.”
“손님?”
“놀라지 마라. 무림맹주께서 우리 수관문에 오실 거야.”
“무림맹주? 거짓말 마라. 무림맹주가 수관문에 온다고?”
“흥, 거짓인지 아닌지 네가 직접 와서 보면 될 것 아니냐?”
수광의 말에 주약평이 뒤따라갔다. 관전하던 아이들도 따라갔다.
수관문이라는 커다란 장원에 이르자 문 앞에 도열한 무사들이 보였다.
단정하게 무복을 차려입은 무사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정말인가?’
주약평은 수관문이 이렇게 예를 갖춘 걸 처음 봤다.
수관문은 정주의 중견문파로 제법 이름이 높다. 하지만 저 높은 하늘에 있는 무림맹주가 찾아올 만한 곳은 아닌데…….
주약평이 들은 무림맹주는 하늘을 날고, 벼락을 내리치는 절대고수다.
그런 고수가 소림이나 무당도 아니고 수관문 같은 곳을 찾아올까.
이윽고, 한 대의 마차가 천천히 달려왔다.
주위로 말을 탄 무사들이 호위하고 있었는데 선두에 선 자는 분명 수광의 아버지이자 수관문주 수신창이다.
문주가 직접 마중을 나가서 데려올 만한 귀빈이라면, 정말 무림맹주?
주약평의 호흡이 가빠졌다.
‘무림맹주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