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담철조의 시선은 무한 뒤쪽 비무장 상석에 앉아 있는 무림맹주 형일천을 향해 있었다.
무림맹주 비무대회의 승자가 결정됐으나 아직까지 맹주는 형일천이다.
형일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철패가 날아와 비무대에 꽂혔다.
“맹주령!”
누군가 소리쳤다.
무림맹주의 신분을 알리는 맹주령이다.
“…….”
“……”
모두가 형일천의 입만 바라봤다.
형일천이 훌쩍 몸을 날려 비무대에 섰다. 그리고 고마를 향해 말했다.
“어리석구나. 천하방이 네 목숨을 붙여 주었거늘…… 스스로 사지로 걸어가다니.”
“크하하. 모든 걸 다 뺏고 목숨을 붙여 주었다고? 세상이 도천부를 버렸으니, 도천부가 세상을 지워버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리석은 놈. 네 아비가 한 짓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아직 죄를 뉘우치지 못하다니.”
“형일천, 권왕의 꼭두각시 주제에 감히 내 아버지를 입에 올리다니!”
고마는 눈이 완전히 뒤집혔다. 입에 거품까지 물며 발악을 하였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절강으로 떠난 줄 알았던 도천장원의 고수가 누군가를 잡아왔다. 고수는 격전을 치른 듯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손에는 한 사람의 수급이 들려 있었는데 피가 뚝뚝, 흘렀다.
고수가 외쳤다.
“고마! 도천부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라! 너는 더는 도천부가 아니다!”
그러더니 수급을 비무대 위로 던졌다.
쿵!
비무대에 떨어진 수급은 고성후의 장남 고군의 것이었다.
“이 자가 맹 밖에서 무력대와 함께 대기하고 있었소. 절강 도천장원의 무사들과 무림맹 무력대가 이들을 진압하였소.”
그러고는 형일천을 향해 포권하였다.
“도천장원의 반도를 직접 처단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
형일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고마가 소리쳤다.
“어림없는 소리! 나는 죽어 원귀가 되어서라도 도천부의 한을 풀 것이다!”
그러더니 피를 울컥, 한 바가지나 쏟아냈다. 스스로 심맥을 끊어 자결한 것이다.
무한이 내심 탄식을 하였다.
“…….”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장내를 수습하라!”
형일천의 명에 맹도들이 재빨리 고군의 수급과 고마의 시신을 치웠다.
형일천이 사방을 향해 포권을 하고는 말했다.
“무림맹주 선출 비무대회의 승자가 가려졌소. 나는 바로 맹주의 위를 넘기겠소.”
그러더니 심무한을 향해 말했다.
“자네가 무림맹주일세.”
***
절벽으로 난 아슬아슬한 잔도를 지나자 절지가 나왔다.
“우와, 이런 곳도 있었군요. 정말 천혜의 요새가 따로 없네요.”
뒤따르던 귀영이 절지의 풍광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심 대협은 신선이 되시려나 봅니다. 여기가 선계가 아니고 뭡니까?”
“턱 빠지겠네. 그만 떠들어. 창피하니까.”
남궁우가 핀잔을 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세 사람이 나타나자 들일을 하던 이들이 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봤다.
잠시 경계하던 눈초리가 무한을 알아보곤 풀어지더니 손까지 흔들었다.
‘여기가 고향 같구나.’
무한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가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향 같았다.
여기저기서 들일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절지의 마을은 예전보다 활기가 넘쳐 보였다.
무한은 심군하의 집으로 향했다.
심군하의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새로 집이 한 채 들어섰다. 문조차 없는 집이었다.
무한이 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인기척을 듣고 부엌에서 진소향이 나왔다.
“왔구나.”
진소향은 음식을 하다 나왔는지 손에 묻은 물을 털며 반겼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생경하였다.
섬서 집에서는 집안일을 하는 하인들이 있었으니 어머니가 잡일을 하는 건 어릴 때도 못 봤다.
‘누가 이 모습을 보고 흑월의 주인이라 할까.’
무한이 가볍게 예를 올렸다.
진소향이 뿌듯한 눈길로 무한을 보았다.
무한이 무림맹주에 올랐다는 사실을 인편으로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
- 천하의 주인이 되라.
심군하의 죽음에 독기가 올랐을 때 천하방주가 되라는 뜻에서 일렀고, 나중에는 후회했다.
그런데 아들이 자신만의 방법으로 무림맹주에 올랐다. 그리고 흑천과 마천과 암묵적인 화친을 맺어 중원의 평화를 이끌어냈다.
진정한 천하의 주인이 된 아들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잖아도 아버지가 기다리신다.”
진소향과 함께 심군하의 집으로 가니 텃밭에서 풀을 매고 있던 심군하가 일어나며 손을 흔들었다.
원봉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심무한의 품에 안겼다.
“왜 이제 오는 거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수련은 잘하고 있니?”
“그럼.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보여줄까?”
“그래. 이따 확인해 보자.”
그날 저녁.
심군하의 집 마당에 커다란 탁자가 놓이고, 모두 모여 앉아 함께 저녁을 먹었다.
‘좋구나.’
무한이 가족을 둘러보며 이렇게 모여서 밥을 먹는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오다 보니 마을이 활기차 보이더군요.”
“황제가 바뀌며 대사면령이 있었다더구나. 이제 쫓길 염려가 없으니 그런 거겠지.”
절지 사람들은 역모죄로 유배되던 중 도피했기에 늘 불안에 떨며 지내야 했는데 사면령이 내리고 잡혀갈 위험이 사라졌다고 했다.
진소향이 남궁우를 향해 말했다.
“남궁 낭자는 혼기가 이미 지났는데 혼인을 할 생각이 없는 건가?”
“예?”
느닷없는 질문에 남궁우가 난처해하는데 귀영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주 물귀신입니다. 물귀신.”
귀영의 말에 모두가 어리둥절해 하였다.
“맹주 곁에 착 붙어 다니며 다른 처자들이 맹주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다고요. 혼자 노처녀로 늙는 건 좋은데 이러다 맹주 혼삿길까지 막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퍽!
남궁우의 매서운 손바닥이 귀영의 등에 작렬하였다.
“크윽! 손은 또 얼마나 매운지…… 혼인을 하면 서방을 잡을 겁니다.”
귀영의 너스레에 모두가 크게 웃었고, 남궁우는 얼굴이 벌게지더니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진소향이 무한에게 말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좋지 않다.”
무한이 담담하게 웃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무한은 아버지와 밤산책을 나갔다.
강가에 이르러 작은 정자에 오르자 아버지가 가져온 술과 안주를 꺼냈다.
“달빛 내린 강을 보며 아들과 술을 한 잔 하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구나.”
무한은 아버지의 이런 모습만 봤기에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궁금했다.
고벽후마저 존경하는 철혈무인의 모습을 떠올려봤지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정마대전 이후 끊임없이 이어지던 분쟁이 이제야 끝났구나. 수고했다.”
“하지만 아직도 이곳저곳에서 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악행을 일삼는 무리도 여전하고요.”
무한은 사람을 해치는 산적이나 수채, 무림문파는 흑백을 가리지 않고 엄단했다. 끝까지 추적하며 발본색원했고, 무림맹의 위상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너무 강하게만 몰아치는 게 아니냐?”
“무림맹에 대한 인식을 각인시키는 중입니다. 후일 누가 맹주가 되어도 사람들의 인식이 무림맹을 지탱해줄 겁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무림맹을 찾아가라!
무림맹이 무림의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이런 인식이 확산을 하고 있다. 다분히, 무한이 의도한 바다.
심군하가 무한을 잠시 보다 말했다.
“십 년은 해야 한다.”
아들이 무림맹의 기틀을 다지고 그만둘 생각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십 년이라뇨. 할아버지 나이가 될 때까지 할 생각입니다.”
무한은 자신의 길을 인간도(人間道)로 정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면서도 정도를 걷고자 했다.
“미력한 힘이나마 천하에 도움이 된다면, 힘에 부치지 않는 한 할 생각입니다.”
“나는 기억이 없다만, 네 할아버지도 아마 같은 생각이셨을 것이다.”
심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밤늦도록 달을 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다음 날.
남궁우가 수수한 여인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바구니에 빨랫감을 담아 들고 있었다.
“여장을 하니 정말 예쁘구나.”
진소향이 흡족한 듯 남궁우를 보며 웃었다.
남궁우도 나이가 들며 선머슴 같은 행동이 많이 줄었다. 그러니 성숙한 여인의 태가 물씬 났다.
“조만간 손자를 보겠네요. 이 나이에 할머니가 되면 좀 억울할 것 같은데요?”
봉영영이 웃으며 진소향에게 말하자 남궁우가 기겁을 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오는 길에 워낙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갈아입은 것뿐이라고요.”
그러고는 종종 걸음으로 빨랫감을 들고 강으로 가버렸다.
***
며칠 절지에 머물며 가족과 시간을 보낸 무한이 감숙으로 향했다.
마천이 물러가며 감숙도 안정을 되찾았다.
새로운 황제는 변방의 군세를 강화하였기에 이민족의 약탈이나 마적떼의 출몰도 잦아들었다.
무한이 난주에 들어서자 어찌 알았는지 혈랑이 사람을 보내왔다.
혈랑은 강하보를 차지하고 난주 흑도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다.
혈랑이 무한을 대접한다며 연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는 난주표국 동사철을 비롯한 정파 사람들도 참석했다.
난주는 동사철과 혈랑의 인연으로 흑백이 뒤섞인 이상한 곳이 됐다.
“맹주가 되었다며? 피곤하겠군. 벌써 얼굴이 쭉 빠졌는걸?”
무한에게 말을 하면서도 혈랑의 시선은 자기 발치를 기어 다니는 여자아이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무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운랑이 곧 걷겠군요.”
운랑은 혈랑의 딸 이름이다.
혈랑의 입이 쫙 벌어지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미 일어서서 한 발 걸었다고.”
혈랑의 얼굴에서는 연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사제가 강하보를 찾아올 거요.”
“강문평 말인가? 온다 해도 다시 내줄 수는 없는 거 알지?”
“문평은 무림맹 사람인데 어찌 난주 흑도로 복귀하겠소. 다만, 참변 후 제대로 제를 지내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오.”
“그런 거라면야…….”
혈랑이 말하다 말고 휙, 사라졌다.
운랑이 단상 끝에서 떨어지려는 걸 휙, 잡아채서 들어 올린 혈랑이 투덜거렸다.
“나의 혈풍보를 딸아이 돌보는 데 쓸 줄은 몰랐어.”
난주를 떠난 무한이 이번에는 멸마대가 주둔하는 감숙지부로 향했다.
무한이 맹주로 취임한 후 멸마대는 맹에 투신했다. 마흔이 넘는 무인들이 살아가려면 현실적으로 지원이 필요했으니 어디든 의탁해야 했다.
무한이 당도하자 멸마대가 성 밖까지 나와 도열하여 맞았다.
“맹주를 뵙습니다!”
가장 앞에 선 고벽후가 외치자 멸마대가 일제히 따라서 예를 올렸다.
무한이 황급히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며 말했다.
“형제들, 왜 이러십니까? 과분한 예는 부담스럽습니다.”
“아니지. 과분한 예가 절대 아니라네. 우리에게 먹을 걸 주고 입을 걸 주는 맹주 아닌가?”
고벽후가 크게 웃으며 농을 했다.
“맹에서 돈을 주니 마적질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거지. 저놈들 봐. 얼마나 놀고먹었는지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잖아.”
“대형,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 몰골이 어떻게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걸로 보입니까? 지난 며칠 마적 잡는다고 수백 리를 쫓아다니느라 빠진 육수라고요.”
장초가 항의하였으나 고벽후가 콧방귀를 꼈다.
“마적 잡는다고 하곤 마을에 숨어서 진탕 술 마시다 왔을지 누가 아나.”
그러고는 무한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마는 아직도 중원 유랑 중인가?”
무한이 맹주에 취임하자 소마는 중원 유랑을 한다며 떠났다.
“마천주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가는 길이 피바다겠군.”
“그런 일은 없습니다.”
무력대 하나를 보내 암중 호위를 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가끔 엉뚱한 실갱이를 벌여서 문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