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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238화 (238/250)

238화

피전격 또한 신검산장에서 급파한 무적대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감히 본좌를…….”

피전격이 화를 내며 거부해도 소용이 없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함이니 어쩔 수 없소.”

공곤은 궁여직이 일러준 대로 답했다.

궁여직은 소마와 피전격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고, 그에 맞게 대응하라 하였다.

소마에게는 담철조를 보내며 무한의 명이라는 걸 강조하라 했고.

“흑천의 천주가 날뛰면 여러 사람이 다치지 않겠소. 그러니 흑천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소.”

공곤의 무적대는 피전격의 주위에 산재하여 삼삼오오 무리지어 따르고 있었다. 피전격이 멈추면 멈추고 말을 달리면 경공을 펼쳐 따랐다.

자신을 호위하기 위함이라고 했다면 자존심이 강한 피전격은 아예 말을 버리고 경공을 펼쳐 빠져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함이라니. 채신머리없이 경공까지 펼쳐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심무한, 정말 해괴한 짓을 하는군.”

백 장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피전격의 뒤를 따르는 공곤이 무한을 대신하여 대답했다.

“이번 회합이 피로 물드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하셨소.”

“끄응.”

피전격은 사룡삼봉 회합을 위해 악양으로 오면서 내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마천의 소마가 마차 한 대와 호위 하나로 온다는 말을 듣고는 자신은 말 한 필에 올라 호위도 없이 왔다.

정파에서 길을 막으면 일격에 격살하여 흑천주의 위엄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만일 떼로 몰려들면 그 또한 좋았다.

이십여 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혈로를 뚫고 왔다!

세상은 피전격의 행보를 칭송하리라.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다.

공곤의 무적대가 호위하는 가운데 아무 일 없이 길을 가는 중이다.

***

“군사부 조사관께서 여긴 무슨 일로…….”

피전격을 치기 위해 길목에 있는 마을에서 진을 친 정파는 점창과 청성, 아미파였다.

점창의 검객 운룡신검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무한을 맞았다.

말 한 필을 몰고 홀로 나타난 무한이었으나, 당금 천하제일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자이니만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 왔습니다.”

“……?”

“흑천주가 이리로 온다더군요. 무림맹 군사부 수석조사관으로서 그가 왜 정파의 영역으로 들어오는지 알아보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운룡신검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수석조사관은 굳이 말을 돌릴 필요 없소. 어째서 흑천주를 옹호하는 것이오?”

무한이 담담한 눈길로 운룡신검을 보며 말했다.

“운룡신검께서는 흑천의 영역에 들어가신 적이 있습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운룡신검이 눈살을 찌푸렸다.

점창파는 흑천의 영역과 접하고 있어 끊임없이 싸워온 곳이다. 그러니 흑천주에 대한 원한도 가장 크다.

서로 강경하게 대치하기에 운룡신검이 흑천의 영역까지 발을 들인 적은 없었다.

“흑천의 영역도 사람 사는 곳이고, 세력이 미약하지만 정파를 표방한 문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점창파는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지요. 물론 흑천도 죽을 각오를 해야만 점창의 영역에 들어올 수 있겠지요.”

“놈들이 점창산 아래 나타난다면 죽은 목숨이오.”

“점창의 영역에도 흑도는 있지 않습니까?”

“그건…….”

세상에는 무수한 문파가 있다. 모두가 자신들은 떳떳하다지만 명문정파로 인정받는 문파는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무림문파라는 게 논밭을 가꾸거나 장사를 하여 꾸려가기보다는 힘을 쓰는 일에 나서고, 그러다 보니 종종 피를 보기에 대부분 흑백지간(黑白之間)에 놓여 있다.

그러다 사람들의 공분을 살 악행을 저지르면 흑도로 낙인찍히고 정파의 적이 된다.

그 낙인을 어디서 평가하여 찍는 게 아니다. 악행이 드러나고 공분을 사고 점차 여론이 형성되어 흑도문파라는 인식이 굳어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다.

그러니 운룡신검도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흑천 소속 문파를 다 제거하려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할까요?”

“그러니 흑천주를 잡으려는 게 아니오!”

운룡신검이 자신들의 의사를 단호하게 밝혔다.

“흑천주만 잡으면…….”

“다음 누군가가 흑천주가 되겠지요.”

흑천은 흑도로 완전히 굳어진 문파들이 자신들의 뒷배로 삼기 위해 모여 이룬 흑도맹이다. 소속 문파는 중원 전역에 걸쳐 있다.

필요에 의해서 이뤄진 세력인 만큼 피전격이 죽으면 누군가 나서서 다시 천주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그자 역시 죽을 것이오. 흑천이 무너지는 그날까지 점창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이오.”

흑천에 의해 사형제를 잃은 운룡신검의 원한은 뿌리 깊었다.

“무림 정의를 위해 점창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소.”

“무림 정의라. 흑천이 무너지면 다음 차례는 흑월이겠군요.”

무한의 말에 운룡신검이 약간 당황하였다.

흑월은 점창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절강에 자리 잡고 있다. 무림 정의를 수호한다고 몇 만 리 원정을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무림맹이 있는 것 아니겠소.”

“무림맹은 정천맹이 아닙니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운룡신검이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게 무슨 뜻이오.”

“정파를 대변하는 맹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

“무림맹은 무림을 대변합니다.”

이는 형소를 정천맹으로 보내며 무한이 일러준 말이다. 그에 따라 형소는 정천맹에서 무림맹으로 이름을 바꿨다.

운룡신검의 얼굴이 분노의 기색이 어렸다.

“지금 그 말은 무림맹이 정도의 수호자임을 포기하겠다는 뜻이오?”

“무림맹은 정의를 수호합니다. 정파를 지키는 게 아니지요.”

무한이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비슷한 말 같지만 의미는 확연히 다르다.

정파라도 정의에 어긋나는 짓을 한다면 처단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무한의 얼굴에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그래서 묻습니다. 점창이 흑천과의 싸움에 앞장선 것은 무림 정의 때문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 겁니까?”

운룡신검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애초에 점창과 흑천의 분쟁은 광산의 이권을 두고 벌어진 두 문파의 싸움에서 비롯됐다.

점창이 한 문파를 지지하자 상대 문파가 흑천으로 투신했고, 점창과 흑천이 접전을 벌였다가 무수한 사상자가 나왔다. 이후, 점창과 흑천의 사생결단 대결로 이어져 왔다.

무한은 무림 정의는 명분이고 결국 영역 다툼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무림맹이 나선 이유가… 그러니까…….”

운룡신검이 말을 잇지 못하고 중언부언했다.

무한이 말을 잘랐다.

“피전격은 절대고수입니다. 쉬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지요.”

“지금 점창과 청성, 아미를 무시하는 것이오?”

“물론 절대고수도 사람이니 고수들이 합공하면 죽을 수도 있겠지요. 다만 그 과정에서 제자들이 흘릴 피를 안타까워하는 겁니다.”

무한이 냉랭한 어조로 말하면서 뒤에 진을 치고 있는 삼파의 정예들을 보았다.

“그 피로 얻은 이권이 그리 가치가 있습니까?”

“…….”

운룡신검은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무한을 노려보다 휙, 몸을 돌려 갔다.

점창을 무시하는 발언이었으나 아니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보는 무한의 눈빛이 진실을 말하라고 강요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무슨 눈빛이…….’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 앞에서 무림 정의 외에 다른 뭐가 있겠느냐,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 고귀한 희생이다, 등 입에 발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도 밑바닥으로 들어가면 이권 싸움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전격을 죽이려는 것도 수장을 잃은 흑천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점창이 잃은 영역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때, 마을로 들어오는 관도에 홀로 말을 타고 오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흑천주 피전격이다.

운룡신검은 당장이라도 검을 빼들어 나서고 싶었다.

그때, 피전격이 말에서 훌쩍 솟구치더니 무려 삼십 장을 날아왔다.

“……!”

순간, 운룡신검은 가슴이 철렁했다.

흑천주가 절대고수라는 말은 들었지만, 여기 삼백여 정예도 각 문파에서 고수라는 이들만 모였다.

그러기에 일백 명 정도 희생자를 감안하고 왔는데 막상 삼십여 장을 훌쩍 날아온 걸 보니 여기 모인 삼백여 고수가 목숨을 걸고 동귀어진하지 않는 한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무한의 말이 옳았다.

피전격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더니 무한을 향해 버럭, 화를 냈다.

“지금 무슨 짓이냐?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냐?”

그러자 무한이 날아와 내려서며 예를 취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림맹 군사부 수석조사관으로서 흑천주께서 오신다니 그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마중 나왔지요.”

“흥! 못 보던 사이 입만 번지르르해졌군. 구닥다리 정파 놈들에게 물들었어. 네놈 속셈이 내 발을 묶으려는 게 아니냐?”

“오랜 벗들과 교분을 나누는 자리를 가면서 혈로를 밟는 건 옳은 일이 아니지요. 피 묻은 손으로 술잔을 잡을 겁니까?”

“그게 무인의 길 아니더냐?”

“이제 흑천도 안정이 되지 않았습니까? 눈앞의 적이 아니라 산하 문파를 단속하는 게 실속 있는 행보지요.”

흑월이 나간 후 흑천의 내분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세력은 대폭 줄었다. 무한 말대로 이제 내실을 다져야 할 때다.

“흥, 나도 굳이 피를 볼 생각은 없다. 저기 뒤에 있는 놈들은 생각이 다른 것 같다만.”

피전격이 한 발 내디뎠다.

쿠웅!

피전격의 전신에서 살기가 터지며 주위로 퍼져나갔다.

짙은 묵광이 번뜩이는 시선이 이십여 장 밖 진을 치고 있는 운룡검객과 삼파연합의 정예를 훑었다.

무한은 피전격이 또 하나의 벽을 넘어섰음을 깨달았다.

‘피전격 역시 화경을 넘어섰구나.’

현경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화경의 벽은 넘어선 듯했다. 실제로 피전격은 무한과 천마의 대결에서 얻은 바가 컸다.

하지만 생사경의 끝자락에 선 무한이나 피전격의 경지를 알 수 있지, 운룡검객 등 삼파연합의 고수들은 피전격이 어느 경지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밀려드는 묵직한 살기를 감당하느라 내기를 끌어올려야 했다.

삼파연합의 고수들은 엄선한 정예들로 일류의 끝자락이나 절정에 이른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몇은 진경의 강자였다. 그러나 피전격 한 사람이 내지른 살기를 감당키 어려웠다.

무한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싸움이 하고 싶으면 저하고 하면 됩니다.”

확산하던 피전격의 살기가 뚝, 끊겼다.

“아!”

무한의 일수에 피전격의 살기가 막히자 삼백여 무인 사이에서 탄식성이 흘렀다.

피전격이 스윽, 살기를 거두며 말했다.

“나는 싸우러 가는 길이 아니다. 왜 너와 싸운다는 말이냐?”

무한과 전대 마천주, 천마의 싸움을 본 피전격이다. 무한과 절대로 맞붙을 생각이 없다.

“이런, 길에서 너무 시간을 지체했군. 이러다 늦겠다.”

너스레를 떨더니 뒤에 처져 있던 말을 불렀다. 말이 달려오자 피전격이 올라타고 그대로 질주하였다.

공곤과 무적대원들이 황급히 몸을 날려 뒤를 따랐다. 무한 역시 말에 올라 고삐를 채었다.

모두가 사라지자 운룡신검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절대고수의 경지라는 게 대체 어디까지를 말하는 건가…….”

그는 무한이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왔음을 깨달았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말을 달리는 무한의 뒷모습에 오래도록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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