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흑수애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무한을 힐끔 보다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한을 아는 게 분명했다. 하기는 흑수애에서 한바탕 난리를 피웠으니 알아보는 이가 꽤 있을 것이다.
무한은 내색하지 않고 백의영 등과 한담을 나누었다.
그때 주위 분위기가 다시 한 번 싸늘해졌다.
무한이 보니 한 무리의 도사들이 흑수애 패거리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종남?’
도사들의 복장에서 종남 문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흑수애 패거리는 굳은 얼굴로 다가오는 종남 문하들을 보았다.
무인들끼리 시비가 벌어질 듯하자 평범한 이들이 긴장하였다. 악양성 내 객잔에서 무인들 간의 싸움이 벌어지는 일은 많지 않았으나 불안한 듯 두 패거리를 보았다.
흑수애 패거리의 우두머리는 종남 무리의 우두머리를 노려보다 슬쩍 무한의 눈치를 살폈다.
이 자리에서 정파와 싸웠다가 혹시라도 무한이 끼어들면 그들은 죽은 목숨이다.
흑수애 패거리의 우두머리가 자신을 젖혀두고 엉뚱한 곳을 보자 종남 무리의 우두머리가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흠칫, 놀란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어 그가 방향을 돌려 무한에게 다가왔다.
“무림맹 군사부 수석조사관께서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종남의 장명이라고 합니다.”
장명은 종남의 기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감숙 출정을 갔던 구파연합의 일원이었고 무한을 직접 보기도 했다.
무한이 일어서서 마주 예를 취하며 말했다.
“장명 도사셨군요. 지인들과 한담을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무한이 소란 피우지 말라는 뜻을 에둘러 전하자, 장명이 알아듣곤 주위를 둘러보다 마침 생긴 빈자리로 무리를 이끌고 갔다.
뭔가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가라앉자 주루 안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다만, 무한을 흘끔거리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만 일어나야겠군요.”
사람들의 시선에 백의영과 천소향이 부담스러워하자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이만 쉴 생각입니다. 심 장주께서도 이 객잔에 묵으실 생각이시지요? 백가상단에서 계산을 해두겠습니다.”
“그럴 건 없습니다.”
“백가상단의 동업자이신데 당연히 그래야지요.”
무한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백의영은 월아의 방값까지 다 계산하였다.
무한이 숙소에 들어와 생각에 잠겼다.
남궁무룡이 지극히 사적인 회합이라고 해서 당사자들만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상황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하기는, 피전격이나 소마가 혼자 움직이겠다고 해도 밑에 있는 수하들이 그냥 있을 리가 없다.
‘정파의 한복판에 수장이 들어가는데 알아서 준비를 하겠지.’
게다가 종남 도사들이 왔다는 건 구파일방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무림맹 장로전에서 아무런 이야기가 없기에 구파일방에서 모른 척 하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무림맹을 제쳐두고 독자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나 때문인가?’
사룡삼봉 중에 두 사람이 무한의 부모다. 지금 무림맹에서 가장 뜨고 있는 인물이 무한이다. 그러니 무림맹을 움직이자는 말을 못하고 직접 나선 것이다.
구파일방으로서는 눈엣가시인 흑천과 마천의 수장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만큼 상당한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귀 호위.”
무한이 귀영을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어? 귀 호위?”
그제야 귀영이 없는 걸 안 무한이다.
***
다음 날.
무한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조사관들을 불러들였다.
이번에 오면서 혹시 몰라서 조사관 셋을 데리고 왔다. 조사관마다 두 명의 조원이 있으니 모두 아홉 명이 무한을 수행하고 있다.
“악양에 들어온 무인들 현황을 파악하고, 군승대를 불러들이게.”
군승대는 이번에 조사를 나오며 은밀하게 배정받은 무림맹 무력대였다. 그들은 지금 악양성 밖에서 야영하는 중이다.
“그리고 악양에서 무력 충돌이 일면 무림맹이 개입할 거란 소문을 퍼뜨렸으면 하네.”
“알겠습니다.”
조사관들은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들은 과거 천하방주이자 현 천하제일인 밑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다. 지옥으로 들어가라 해도 주저하지 않고 갈 것이다.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무한이 다시 지옥에서 꺼내줄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무한은 갖가지 임무를 수행하면서 수하를 한 명도 잃지 않았다. 그러니 무한 밑에서 일하는 건 안전하면서도 명성을 높일 수 있는 일이다.
조사관들이 나가자 귀영을 불렀다.
“무슨 일인데요?”
얼굴이 툴툴 불은 귀영이 퉁명스레 물었다.
“산장 궁여직에게 지급으로 신검무적대 출동을 요청하세요. 보름 전에 당도하려면 밤낮으로 달려와야 할 겁니다.”
그리고 서찰 한 통을 건넸다.
“이건 귀 호위가 직접 하 숙부에게 전해주세요.”
“저더러 중경을 다녀오라고요?”
하기주는 무한이 천하방을 해체하자 신검산장을 떠나 중경에 있는 자신의 옛집으로 돌아가 하가보를 재건하였다. 강문평과 악가박도 하기주를 따라 하가보에서 머물고 있다.
“중요한 일입니다. 귀 호위 외에 맡길 사람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귀영의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그래도 뒤끝은 남아 있었다.
“급할 때만 제 존재감이 드러나는군요.”
툴툴거리며 방을 나갔다.
무한이 지도를 보았다.
악양으로 오는 소마와 피전격, 그리고 부모님의 동선을 그려보곤 한숨을 쉬었다.
“이분들이 정마대전을 다시 일으키려 하나…….”
***
오후가 되자 무림맹 무력대 복장을 한 이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곳곳을 돌아다녔다.
무한의 명에 따라 구경이라도 나온 듯 한가로이 다녔기에 평범한 사람들은 분위기가 바뀐 걸 몰랐다.
그러나 악양 곳곳에 스며든 무림인들은 이들이 그저 구경삼아 다니는 게 아니란 걸 잘 알았다.
게다가 과거 천하방주이자 무림맹 군사부 수석조사관이 악양 화청루에 묵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켕기는 게 있는 이들은 주위를 피해 다녔다.
무림맹 편제상 군사부 수석조사관이 그리 높은 직책은 아니다. 위로 당주와 부주, 전주와 장로 등 다양한 상관들이 있다.
하지만 그가 심무한이기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반년 간 무한이 토벌한 산적과 수적, 그리고 해결한 무림의 분쟁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면서 천하방주라는 구름 속 까마득한 자리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의 명성이 더 높다. 활약상 또한 과장되어 퍼지며 진정한 천하제일인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의도를 품은 자들과 반대로 무한을 보기 위해 화청루로 모여드는 무인들도 줄을 지었다. 화청루는 무한이 들은 뒤로 방이 꽉 차서 더는 손님을 받을 수 없었다.
주루도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터져나갈 듯했다. 죽치고 앉아서 무한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바람에 빈자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한이 이렇게 악양의 치안을 휘어잡고 있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 보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관도를 천천히 달려오던 검은 마차가 멈춰 섰다. 온통 시꺼멓게 칠한 마차는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마차를 몰던 광풍대주 광포가 미간을 찌푸렸다.
관도를 막고 서 있는 무리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광포.”
마차가 멈추자 안에서 소마의 음성이 들려왔다.
“소림과 무당…… 화산도 있군요. 많이도 몰려왔습니다. 얼추 한 삼백 명은 되겠는데요?”
광포는 소림과 무당, 화산의 고수들을 마주하고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소마가 천천히 내려왔다.
소마를 확인하자 소림승 한 명이 나섰다.
“아미타불. 과연 마천의 천주께서 왕림하셨구려.”
“귀하는 누구신가?”
“빈승은 소림의 방오라고 하외다. 삼십육방을 관장하고 있지요.”
“아하, 소림 삼십육방주? 그래, 그 먼 숭산에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와서 길을 막고 선 겐가?”
소마가 시치미를 딱 떼고 물었다.
“마천주를 소림으로 모시고자 이리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나를? 하기는 소림은 예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지. 장경각 구경도 하고, 대환단도 한 알 얻어 볼 생각이 있었거든. 근데 지금은 개인적인 일이 있어 초대를 사양해야겠군.”
광포가 소마를 흘깃 봤다. 마천의 천주에 오르고서 말솜씨가 늘더니 이제는 정파 놈들처럼 번지르르하다.
‘저놈들이 뭣 때문에 왔는지 다 알면서. 그냥 때려잡지.’
광포의 시선이 뒤쪽을 향했다.
그러자 소마가 말했다.
“광포, 왜 뒤를 보는 거냐?”
소마는 이번에 광포만 대동하고 오면서 아무도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광포는 광풍대에게 변복을 하고 백리 주위로 퍼져 따라오라 일렀다.
소마가 웃으며 광포에게 다가왔다. 광포가 섬찟하여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소마가 웃을 때는 화가 났다는 뜻이다.
‘제기랄. 부상도 희한하게 입으셔서…….’
웃으며 때리니 더욱 섬뜩하게 느껴지는 소마다.
“애들 불렀냐?”
“아닙니다. 휴가를 주었습니다.”
커다란 체구의 광포가 쩔쩔매며 대답했다.
소마의 웃음이 더욱 짙어진다.
“휴가?”
“제가 천주를 모시고 장기간 여행을 하게 돼서 광풍대에게 모처럼 휴가를 주었는데…… 어, 저 녀석이 왜 여기 있지?”
저 멀리 여기저기서 광풍대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광포가 신호만 주면 달려올 기세다.
광풍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소림승과 무당 도사, 화산의 정예들의 기세도 맹렬하게 솟았다.
소마가 그런 정파 쪽을 보다 하늘을 보고 허허, 웃었다.
“무한, 네놈이 천마를 죽인 뒤로 이놈이고 저놈이고 마천을 우습게 보고 있다는 건 알고 있냐?”
예전 같으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놈들이…….
소마의 얼굴에 핀 웃음이 짙어가고, 소림 무당 화산의 정예들이 서서히 진형을 움직였다.
그때 저 뒤쪽에서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먼지구름이 피어나더니 무려 일백에 달하는 기마무력대가 달려왔다.
두두두두.
정파와 광풍대 모두 긴장을 하고 다가오는 기마무력대를 주시하였다.
가까이 온 무력대는 신검산장 신검대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있었다. 무력대를 끌고 온 이는 신검산장 호법 담철조였다.
담철조가 소마와 십여 장 거리에 이르자 멈춰 서더니 말에서 내려 포권을 하였다.
“신검산장 신검대! 무림맹 군사부 수석조사관의 부탁을 받아 천주를 모시러 왔소.”
소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림맹 군사부 수석조사관?”
광포가 옆에서 속삭였다.
“심무한입니다.”
“아, 그렇지. 그놈이 무림맹에 들어가 뭘 한다고 했지. 근데 맹주가 아니고 군사부 수석조사관이라고?”
“정파 놈들이 원래 그렇잖습니까? 나이 따지고 경력 따지고. 실력만 보는 우리 마천과는 다르죠.”
신검대가 나타나자 정파 사람들이 당황하였다.
신검대의 무위는 감숙 전투에서 만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이백의 무력대가 팔천에 달하는 적진에 뛰어들어 본진을 유린하였다. 그야말로 전투에 특화된 무력대의 원조다.
게다가 심무한의 명을 받고 왔단다. 이건 심무한의 경고다. 소마를 건들이지 말라는.
담철조가 방오대사를 향해 말했다.
“소림과 무당, 화산에서도 마중을 나온 모양이구려.”
방오대사가 못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주가 중원 여행을 나오셨다기에 숭산에도 한번 오시라고 권유하던 참이오.”
방오대사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은밀하게 움직였건만 어떻게 알았지?’
방오는 천하가 심무한의 손아귀에 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