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무한이 전공을 쌓아 착실히 승진하는 사이 무림맹의 주요 사안들이 결정됐다.
결국, 형일천은 소림과 무당이 주도한 장로회의의 결의를 받아들여 맹주 선출 비무대회를 치르기로 하였다.
다만 무림맹의 체계가 아직 완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 년 후에 치르는 걸로 결정했다.
맹주 선출 비무대회 소식이 중원으로 퍼져나가자 사람들이 열광했다. 무림사에 보기 드문 비무대회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군사부 수석조사관실로 형소가 찾아왔다.
“십년마다 비무대회로 맹주를 선출한다는 게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아.”
맹주 선출 비무대회가 화제를 모으며 무림맹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였다.
향후, 무림맹주가 되겠다는 포부를 품고 맹에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부쩍 늘었다. 심지어 대파와 세가의 소가주나 후기지수들도 야망을 품고 속속 무림맹에 들어왔다.
“군사부 조사관 지원자가 넘쳐나는 거 알아?”
“나야 모르지. 하지만 정원은 이미 찼잖아.”
무한이 담담히 대답하곤 읽고 있던 서찰에 눈을 주었다.
“뭔데 그리 열심히 읽고 있어?”
“사룡삼봉이 회합을 갖는다네.”
“사룡삼봉? 구룡오봉이 아니고?”
“지금 후기지수 말고 전대 사룡삼봉 말야.”
“아! 그렇다면…….”
형소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전대 사룡삼봉이라면 마천의 천주 소마와 흑천의 천주 피전격, 무한의 부모와 남궁무룡, 황산여음이다.
하나같이 무림의 수장들이거나 기인이니 형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큰 사건인데? 흑천과 마천, 남궁세가가 한 자리에 모이다니.”
“무림과는 상관없다는군. 단순히 사적인 회합이니 의미를 두지 말아달라는 남궁세가주의 부탁이야.”
서찰은 남궁무룡에게서 온 것이었다. 사실이 알려지면 무림맹 군사부가 움직일 걸 예상하고 미리 고지한 것이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잖아. 마천과 흑천의 천주들이라고.”
형소의 말대로 마천과 흑천이라면 치를 떠는 대파와 세가의 수뇌부들이 이 사실을 알면 문제를 삼을 가능성이 높다.
무한은 감숙에서 사룡삼봉이 회포를 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서로 적대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는 이들이 어찌 교분을 맺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만일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탄하게 천하방주에 올랐다면 천하 삼대세력과 남궁세가 수장이 교분을 맺은 셈이지 않은가.
물론 그들이 사적 교분과 공적 위치를 망각할 사람들은 아니지만, 이 사실만으로도 무림에 적잖은 파문이 일어날 것이다.
“차라리 모르고 있을 걸. 이미 알았으니 어쩌지?”
형소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림맹 군사로서 총군사에게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무한이 말했다.
“내가 보고하지. 어차피 알려질 수밖에 없는 일이야.”
***
“사룡삼봉이라…….”
무림맹 총군사 제갈주승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제갈세가 출신의 재사 제갈주승은 맹주 형일천과 장로전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다.
“예전에 들은 바 있지. 그들이 회합을 갖는다고? 언제 어디서 모인다던가?”
“일시와 장소는 아직 모릅니다.”
제갈주승이 무한을 주시하다 말했다.
“사적 회합이라지만 신분들을 생각하면 목적을 알아보지 않을 수 없지.”
“그래서 제가 가볼까 합니다.”
무한의 말에 제갈주승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의 부모도 참석한다는 건데, 제대로 조사할 수 있겠나?”
“그러기에 정확한 목적을 알아내기 쉽지 않을까요?”
형소가 옆에서 거들었다.
제갈주승이 고개를 저었다.
“정확하게 보고가 올라온다는 보장이 없지.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을 테니 말일세. 오해 살 일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네.”
“사적 회합에 오해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숨길 것 없습니다.”
제갈주승이 잠시 무한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나만 알고 있는 거로 하지.”
그러면서 형소에게 말했다.
“장로전에서 영역분할안을 최종합의하여 보내왔네. 군사들과 검토하여 보고하도록.”
“영역분할…… 하아, 정말 밀어붙인다는 겁니까?”
형소가 분개하였다.
“나도 입장이 난처하군. 가문이 추진하는 일에 반대해야 하니 말일세.”
제갈주승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영역분할안을 반대하는 입장인데, 이로 인해 가문에서 배척당하는 처지다.
“그래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형 맹주께서 맹주 선출 비무대회를 받아들였으니, 이를 빌미로 신임 맹주 선출 이후로 미룰 생각이네.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일세.”
제갈주승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무한을 보았다.
무림맹 젊은 층으로부터 무한은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벌써부터 일 년 후 무림맹주 선출 비무대회에 무한이 출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간간이 흘러나왔다.
소림과 무당이 나이 제한을 두려하자 후기지수들이 일제히 나서서 반발하여 무산된 일도 있었다.
제갈주승이 짐짓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소림과 무당이 맹주 선출 비무대회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는데, 그들이 차지하면 영역분할안이야 무리 없이 통과되겠지.”
“절대 그렇게 둬선 안 됩니다.”
형소가 흥분하자 제갈주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타깝지만 장로전 의결을 통과하면 나도 막을 수 없네. 그만 나가 보게.”
제갈주승의 집무실을 나오며 형소가 무한에게 나직이 말했다.
“총군사도 너를 지지하는 것 같아. 장로전에서 맹주 선출 규정에 나이 제한을 두려는 걸 막은 사람이 총군사야.”
무한은 자신의 어깨에 쌓인 짐이 점점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손우자를 처리한 후 강호를 주유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림맹에 새로운 사람들이 몰리고, 그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며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천하방 청의단으로 활약했던 악일비도 다시 들어왔고, 백상인이나 모우극 등 천무관 동문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았다.
그러면서 무한은 자신의 삶에 부족한 게 뭔지 깨달았다.
고독했던 지난 삶은 그를 절대고수로 만들어주었으나 충만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에게 부족했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적을 의식하며 정상을 향해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새롭게 다가왔고, 그 사소한 것들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예를 들면 지금 이런 것들 말이다.
“오늘 홍반에서 군사부 회식 있는 거 알지? 그때마저 이야기하자.”
형소가 술잔을 들어 마셔 보이는 흉내를 하곤 갔다.
무한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
악양루.
천하 명승지답게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무한이 누각을 올라 동정호를 바라봤다.
한때 정천맹이 머물며 무림인들이 몰렸으나 지금은 썰물 빠지듯 사라지고 시인묵객들만 보인다.
무한 옆에 서서 주위를 살펴보던 귀영이 속삭이듯 말했다.
“정말 소마와 피전격이 나타날까요? 무림맹이 머지않으니 자칫 위험할 수도 있을 텐데요.”
남궁무룡이 굳이 서찰을 보내 사룡삼봉 회합을 알린 이유가 있었다. 회합 장소가 무림맹에서 그리 머지않은 악양이었다.
무한은 부모가 온다는 소식에 미리 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회합일인 보름까지 며칠 여유가 있었다.
“여기서 다 보는군요.”
갑작스레 들려오는 여인의 음성에 무한이 돌아봤다.
“월아 사저?”
무한을 보고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는 어머니 진소향의 제자 월아였다. 진소향이 심군하를 따라 은거한 후 월아는 흑월로 갔다고 들었다.
“사부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지요.”
월아는 사부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사룡삼봉 회합을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듯하구나. 그렇다면 정파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무한이 은근히 걱정하였다.
대의명분을 앞세우는 구파일방이 나서서 회합을 방해할 수도 있으니까.
정파도 다양한 부류가 있다. 흑천과 마천이라면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강경파가 있는가 하면, 제갈주승과 같은 온건파도 있다.
무림맹 창설 이후로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마천이 패퇴하고 흑천과 흑월이 분열하자 자신감을 얻은 강경파들 사이에 이참에 흑천과 흑월을 멸하자는 논의마저 오가고 있다.
“무흔 대협은 잘 계시지요?”
“흑월주를 대협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심 공자밖에 없을 거예요.”
월아가 웃으며 말했다.
무흔이 흑월주가 되었고, 흑선수사와 연이설이 보좌하고 있다. 세 사람의 삼각관계는 아마도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이왕이면 함께 다니시죠.”
무한이 혹시 몰라 월아에게 함께 다니기를 청했다.
월아 역시 흑월 소속이니 정파 인물들의 눈에 띄어봐야 좋을 일이 없으니까.
두 사람이 누각을 내려가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귀영이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자가 나타나니까 나는 있는지 없는지 거들떠도 보지 않네. 이래서 아들은 키워봐야 소용이 없는 거야.”
***
무한과 월아가 악양에서 이름난 화청루에 들었다.
주루와 객잔을 겸하는 화청루는 손님들로 넘쳐났다.
두 사람이 주루로 들어서는데 여기서도 낯익은 사람을 만났다.
“백 형? 천 부인?”
창가 자리에서 들어서는 무한을 보고 있는 이는 백가상단 백의영이었다. 백의영의 앞에는 천소향이 앉아 있었는데 배가 약간 불러 보였다.
천소향은 천종해가 보낸 자객에 의해 중상을 입고 간신히 암경을 해소했으나 몸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아이 소식이 없었다.
백의영이 웃으며 말했다.
“장인께서 설삼을 구해 주셨다오. 복용한 후 바로 아이가 생겼소.”
“감축 드립니다.”
“그런데 이분은?”
백의영이 월아와 심무한을 번갈아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월아가 나서서 말했다.
“제가 심 공자 모친의 제자랍니다.”
“아! 그러셨군요. 저는 백가상단주 백의영입니다. 기왕에 이리 만났으니 합석을 하시는 어떻겠습니까?”
주루는 사람들이 많아 빈자리가 많지 않아서 네 사람은 합석하였다.
뒤늦게 온 귀영의 자리만 없었다. 귀영이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보이지도 않는 거야? 나, 존재감이 사라진 거야?”
투덜대던 귀영이 지나가던 점소이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말했다.
“손님이 왔으면 자리를 내놔야지. 뭐하냐?”
“이 사람이? 나가! 당신 같은 사람은 안 받아.”
귀영은 아예 쫓겨나고 말았다.
무한이 백의영에게 물었다.
“백 형이 악양에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자 천소향이 대신 대답했다.
“저 때문에 온 거랍니다.”
그 말에 무한은 아, 하고는 말했다.
“사룡삼봉 회합 때문에 오신 건지요?”
아이까지 가진 천소향이 먼 길을 온 이유가 따로 있을까. 그녀의 어머니 역시 삼봉의 일원이었으니 대신 참석한 것이리라.
“남궁가주께서 초청장을 보내오셨어요. 어머니 대신 참석해줄 수 있냐고 하셨지요.”
무한은 사룡삼봉에게 이번 회합이 각별한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 심군하가 은거지에서 나오고, 죽은 사람의 후손까지 초청하지 않았나.
그때, 시끌벅적하던 주루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무한이 돌아보니 한눈에 봐도 흉폭하게 생긴 장한 대여섯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주루를 훑어보더니 구석에 자리 하나가 남은 걸 보고 그리로 우르르 장한들을 몰고 갔다.
들이닥친 기세에 비해 아주 얌전한 행동거지였다.
‘흑수애에서 온 자들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