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다음 날.
무한은 형일천을 찾아갔다.
“맹주를 뵙습니다.”
“어서 오게.”
형일천의 낯빛은 어두웠다.
과거 천하방 패천부 패천대주와 무림맹주의 자리는 사뭇 다른 것이다.
형일천은 오랜 세월 권왕을 보좌하는 데 익숙했다. 무림맹과 같은 거대조직을 운용하는 건 그의 성격과도 맞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지금 사퇴 압력을 받고 있다. 그의 성격으로 봐선 벌써 맹주직을 던져버렸을 텐데 형소가 말리고 있는 중이다.
“그간 무량하셨습니까?”
“한바탕 싸우고 싶은데 상대가 없군.”
형일천이 복잡한 심사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복호가에서 사람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권왕이 살아 있을 때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은 자들이네. 이제 와서 옛 인연을 들먹이지만, 나는 이미 복호가를 떠난 지 오래일세. 형가는 더는 복호가의 가신이 아니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복호가에서는 권왕이 남긴 유산을 넘기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패천부에서 정천맹으로 넘어왔던 권왕의 재산과 사업체를 일가로 귀속시키겠다는 것이다.
그걸 넘기면 무림맹은 몇 달 가지도 못하고 파산할 것이다. 대파와 세가는 맹주 정통성을 거론하며 아직까지 한 푼도 내지 않고 있다.
“그 재산은 의형과 내가 일군 것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복호가를 나왔지. 어림도 없는 소리야.”
형일천이 단호하게 말했으나 산동 복호가는 대장군을 배출한 명문가로, 조정과 군부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국법을 들어 주장하면 형일천의 입지는 좁아진다.
“소림이 이리 비열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불도를 닦는다는 것들이…….”
형일천이 말하다 말고 끊었다.
곧 무사 한 사람이 들어와 고했다.
“소림과 무당, 산동 복호가에서 뵙기를 청합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들어오라 해라.”
잠시 후.
소림 방수와 무당 청해, 그리고 건장한 노인이 들어왔다. 위맹한 기풍이 전신에 흐르는 노인은 군의 장수를 보는 듯했다.
“신검장주께서 계시는 줄은 몰랐소.”
과거 천하방주 취임식 때 왔던 방수와 청해가 무한을 보곤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일은 형일천이 매듭을 지어야 할 사안이다.
“일어서려던 참입니다.”
“장로회의에서 뵙겠소.”
방수와 청해도 굳이 잡지 않았다.
그때 복호가 노인이 무한을 보고 말했다.
“신검장주라면 전 천하방주 아닌가? 이리 젊은 사람인 줄은 몰랐군. 나는 산동 복호가 복호군이라 하네.”
“심무한입니다.”
무한이 예를 취하곤 복호군을 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권왕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복호군이 무한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자네가 절대고수라지? 아직 젊은 나이인데 그런 실력을 나라를 위해 쓸 생각은 없나?”
그러자 형일천이 말했다.
“복호군, 그가 중원을 위해 한 일을 안다면 그런 말을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무한에게 말했다.
“그만 가보시게.”
복호군이 사나운 기세로 형일천을 노려봤다.
무한이 내심 탄식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
그날 저녁.
형소와 소소가 술과 함께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찾아왔다.
“명문정파라는 자들이 정말 후안무치하네.”
형소가 불만을 토로했다.
“어찌 됐어?”
“어쩌긴, 배 째라 했지. 사실 패천부 재산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어.”
“그런데 뭘 요구하는 거야?”
“저들이 원하는 건 무림맹 총단이야. 패천부 자금으로 샀으니 총단을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이게 말이나 돼?”
형소가 술을 벌컥, 들이켰다.
“더욱 가관인 것은 소림과 무당이 중재한다면서 은근히 맹주 사퇴를 종용하고 있다는 거지. 이틀 후 장로회의에서 아마 맹주 선출을 위한 비무대회 결의안이 나올 거야.”
“맹주를 비무로 선출한다고?”
남궁우의 말에 소소가 대답했다.
“맹주 임기는 십 년이고, 그때마다 비무로 선출한다는 안이야.”
“구파일방과 세가가 돌아가면서 한 번씩 하겠다는 소리네?”
남궁우가 숨은 맥락을 짚어내자, 형소가 말했다.
“남궁가까지 차례가 가려면 백년은 걸릴걸?”
“무슨 소리! 가주께서 나서시면 초대 맹주가 될 수도 있어.”
“비무는 형식일 뿐이야. 구파일방과 몇몇 세가는 이미 조율을 마친 듯해.”
남궁우가 무한을 향해 말했다.
“장주가 출전하면 상황은 끝이야. 이건 장주를 무림맹주로 만들려는 구파의 음모가 아닐까? 거저 떠먹여 주는 것 같은데?”
“아니, 그들이 그리 허술할 것 같아? 무한을 장로회의에 초빙했지? 마천의 마뇌와 소마를 순순히 돌려보낸 문제를 가지고 무한을 몰아세울 거야. 맹주 비무대회에 출전하려면 무림맹 소속이 되어야 하는데 마천과 흑천과의 인연을 빌미로 아예 가입할 길을 차단하려는 거지.”
“이야. 그런 꼼수를?”
무한이 듣다가 말했다.
“장로전의 의사결정은 어떤 식으로 하지?”
“다수결! 장로 일인당 공평하게 한 표를 행사해.”
남궁우가 머리를 굴렸다.
“그러면 그들이 불리하지 않아? 무림맹 장로의 절반이 중소문파 명숙들이잖아? 대부분 천하방 출신이니 무한을 지지할 것 같은데?”
“모르지. 하지만 이런저런 대가를 이유로 회유했을 거야. 그러니 자신 있게 무한을 부른 거지.”
무한이 듣다가 말했다.
“내일 입맹원서를 가져와라.”
“엉?”
“그들의 의도가 그렇다면 선수를 쳐서 먼저 입맹하면 되지. 입맹은 집행기관에서 하잖아.”
“그렇지! 그러면 되겠네.”
“장로회의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어.”
“거부권?”
“거물급 인사의 입맹은 장로회의에서 심사할 권한이 있지.”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군사부 위사도 거물급이라고 할 수 있나?”
“그게 무슨 소리야?”
“일반 무사로 입맹하지.”
“말도 안 돼. 천마를 꺾은 천하제일인이 평무사로 들어가겠다고?”
남궁우가 입을 쩍 벌렸다.
“그들이 꼼수를 쓰니 어쩌겠어. 설마 일반무사의 입맹까지 장로회의에서 다루는 건 아니지?”
“그렇기는 하지만…… 무림맹은 상명하복 체계가 확실해. 아무리 무한이라도 평무사라면…….”
파격적인 제안에 형소도 긴가민가하였다.
“뒤통수에는 뒤통수로 대응하자고.”
무한의 말에 남궁우가 고소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맹주 선출 비무대회가 열리면 볼만 하겠네. 평무사 출신의 맹주라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형소가 주저하자 소소가 말했다.
“무한 말대로 뒤통수 한번 쳐보다. 그래야 나도 속시원하겠어.”
***
이틀 후.
무한이 장로전에 들었다.
서른 명의 장로들이 반원을 그리고 앉아 있었다.
천하방과 달리 무림맹 장로들은 모두 동등한 위치였다. 다만, 연배가 높은 곤륜의 우학진인이 대장로의 자리를 맡아 회의를 주재하였다.
“신검장주, 반갑구려.”
우학진인은 붉은 얼굴에 기다란 백발을 늘어뜨린 신선과 같은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눈빛이 맑았는데 어딘가 모르게 순진무구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정말 산속에서 도만 닦다 온 듯했다.
무한은 우학진인을 대장로로 추대한 이들이 구파일방과 세가 쪽이 아니라 중소문파 출신의 무림 명숙이라고 형소에게 들었다. 형소는 우학진인만큼은 공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한이 우학진인에게 예를 취하곤 좌중을 바라봤다.
“무림맹 장로전에서 저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요?”
“소림과 무당이 장주의 해명을 듣고자 한다네.”
우학진인의 말에 무한이 방수와 청해를 바라보았다.
“제가 소림과 무당에게 무슨 해명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방수대사가 일어나 입을 열었다.
“지난 감숙에서의 정마대전 당시…….”
형소의 예측대로 소림은 마천의 마뇌를 놓아준 걸 거론하였다.
“장주가 마천과의 교분이 심상치 않으니 정확하게 어떤 관계인지 듣고자 하오.”
무한이 청해를 바라봤다.
청해가 일어나서 이번에는 흑천과의 관계를 거론하였다.
“……흑천 피전격은 물론이고 새로 재기한 흑월과도 교분이 깊다고 들었소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장주의 입장을 듣고자 하오.”
그러자 남궁세가 출신 장로 남궁무휘가 무한을 두둔하려는 듯 말했다.
“장주는 무림맹 사람이 아니니 굳이 답변을 할 의무는 없소.”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소식을 듣지 못하셨나보군요. 본인은 이미 무림맹 맹원입니다. 답변을 드려야 할 처지입니다.”
“뭐요?”
방수와 청해가 놀라 소리쳤다.
“어제 맹에 가입했습니다.”
“장주의 입장을 명확히 해명하지 않는 한 입맹 서류는 승인되지 않을 것이오.”
방수가 장로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역시, 형소의 말대로 이미 표를 점검해둔 모양이다.
“평무사의 입맹은 인화당에서 결정하더군요. 어제부로 군사부 위사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무한의 말에 다시 한 번 장로전이 술렁거렸다.
“장주가…… 평무사라고? 지금 빈승과 농을 하자는 거요?”
방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전직 천하방주가 무림맹 평무사로 입맹한다?
누가 들어도 맹의 체계를 희롱한다고 할 것이다.
무한의 얼굴이 갑자기 서늘해졌다.
“제가 지금 농을 하는 걸로 보이십니까, 방수 대사? 아니 방수 장로?”
방수와 청해가 입을 쩍 벌리곤 말을 잊지 못했다.
“이번에 수적을 잡아온 공로를 인정받아 군사부 위사로 특채되었소.”
무한이 장로들을 향해 말했다.
“본인의 과거사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으니 답변은 문서로 정리하여 보내겠소. 지금은 근무를 하러 가야 하니 다른 용건이 없으면 가보겠소.”
그러고는 살짝, 읍을 하고는 장로전을 빠져 나왔다.
***
무한의 평무사 입맹이 무림맹을 화끈하게 달궜다.
몇몇 사람들은 정말 무한이 군사부 위사로 근무하는지 찾아오기도 했다.
무한은 평무사 복장을 하고 군사부 순찰을 돌았다.
뒤따르던 귀영이 한숨을 쉬었다.
“아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천하제일인의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걱정 마세요. 무림맹에서 가장 빨리 승진하는 사람이 될 겁니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승진이요?”
“두고 보세요.”
무한은 군사부를 돌며 근무하는 이들을 모두 살폈다. 그리고 그중에 몇을 붙잡아 추포당으로 갔다.
무한이 사람들을 끌고 왔다는 말에 선우휘가 직접 나왔다.
“이자들은 흑천의 간세요. 이자는 흑월이고, 마천의 간세도 있소.”
무한의 천심공은 이제 극성에 달했다. 평소 사람의 마음을 읽고자 하지 않아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첩자 하나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군사부에 스며든 첩자를 잡아낸 일로 무한은 군사부 조사원으로 승격되었다.
이어 무림맹 곳곳을 다니며 각 부에 숨은 첩자들을 찾아내어 조사관으로 올랐다.
불과 한 달여 만에 위사에서 조사관이 된 무한은 이제 독자적인 조사 권한이 생겼고, 활동 반경 또한 중원 전 지역이 됐다.
다시 여섯 달이 흘렀다.
그 사이 무한은 단신으로 산채 다섯 곳과 수채 일곱 곳을 소탕했다.
이는 무림맹의 어느 무력대보다 뛰어난 전과였다.
이에 무림맹에서는 무한을 추앙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심지어 구파일방 출신 후기지수들까지 무한을 지지하였다.
산적과 수적을 토벌한 전과를 인정받아 무한은 군사부 수석조사관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무림맹 간부라고 할 수 있는 자리다. 그러나 평무사로 들어와 전과를 쌓아 올라왔기 때문에 장로전에서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수석조사관 임명장을 받자 귀영이 신이 나서 말했다.
“이러다 일 년도 안 돼 맹주 자리까지 올라가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