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장강 뱃길을 지나 마차로 갈아타고 달리길 한참. 마차는 이윽고 고갯길을 올랐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마차 안에서 무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멈추세요.”
마차를 몰던 귀영이 말고삐를 당겼다.
무한이 마차에서 내려 고개 아래 웅장한 성을 내려다봤다.
한때 천하방이었던 곳이다.
지금은 무림맹으로 바뀌었으나 저녁 햇살에 빛나는 성벽은 십년 전 그때와 똑같았다.
남궁우가 따라 내려섰다.
“왜 그래?”
무한은 말없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성벽을 내려다보았다.
남궁우가 무한의 옆모습을 보았다.
자기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무한의 생각은 무척 깊다. 지금 이 표정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라는 뜻이다.
이윽고 무한의 입이 열렸다.
“오래전 이 자리에서 천하의 주인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일까 생각한 적이 있었어.”
“헉! 어린 나이에 참 광오한 생각을 했네?”
“천하제일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니까.”
“아…….”
무한의 진지한 표정에 남궁우가 입을 닫았다.
“천하제일인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지. 삼두육비의 괴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어.”
남궁우는 무한의 개인사를 처음 듣는다. 이제껏 함께 다녔지만 자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천하제일인은 어땠어?”
“……그저 손자를 걱정하는 할아버지였을 뿐이었어.”
무한이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그들이 타고 온 마차 뒤에는 수레가 딸려 있었다. 수레에는 나무로 된 틀이 있었다.
무한이 다시 마차에 오르자 귀영이 채찍을 휘둘러 말 궁둥이를 때렸다.
“가자!”
***
천하방 성밖마을에 한 대의 마차와 죄인을 가두는 틀을 실은 수레가 나타났다.
수레에는 오른팔과 양 무릎 아래가 잘린 흉악한 사내가 갇혀 있었다.
과거 천하방 외성은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무림맹은 내성만 쓰고 있었다. 마차가 외성을 지나 내성 문 앞에 이르자 수문무사들이 세웠다.
“무림맹에는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없소. 그리고 뒤에 있는 수레는 무엇이오?”
무한이 마차에서 내렸다.
수문무사가 무한을 보다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심무한이라 하오. 장강에서 살육을 일삼은 수적을 잡아 오는 길이오.”
무한이 포권을 하며 자신을 밝히자 수문무사들이 화들짝 놀라 예를 취했다.
“천하방주를 뵙습니다.”
“천하방은 사라졌습니다.”
“…….”
무한의 말에 수문무사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무사 하나가 쏜살같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들어가시지요.”
수문장으로 보이는 자가 직접 무림맹 집법당으로 안내하였다.
무한이 집법당 앞에서 문신 사내를 인계하며, 그간의 죄상을 기록한 문서를 건넸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누군가 그를 불렀다.
“심 방주!”
집법당 안에서 나온 이는 과거 천하방 집법당 추각주 선우휘였다.
선우휘가 계면쩍은 얼굴로 말했다.
“할 줄 아는 게 범죄자를 쫓는 것뿐이라…… 무림맹 추포당을 맡게 됐소.”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무림맹에서 죄를 저지르고 특권을 누리는 사람은 없겠군요.”
“한참 부족한 사람이오. 과거 변 당주가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생각뿐이오. 안으로 드시겠소?”
“아닙니다. 죄인을 인계하러 왔을 뿐입니다.”
무한이 사양하자 선우휘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그때는 죄송하였소.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지금 생각하니 공명심이 앞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오.”
과거 당현전 장로 살인사건 당시 마찰을 빚었던 걸 마음에 두고 있었나보다.
무한은 말없이 웃으며 포권을 하였다.
“무림맹은 처음이실 터이니 안내하겠소.”
“일단 객사로 가고 싶습니다만.”
“객사는 그대로라오.”
선우휘가 직접 객사까지 안내하고 돌아갔다.
무림맹 객사는 외성 객잔 절반 수준의 돈을 받았다.
“형소가 정말 짠돌이네. 돈을 받고 객사를 운영하다니.”
남궁우가 혀를 내둘렀다.
“하기야 무림맹은 돈 나올 구석이 많지 않겠지. 대체 어떻게 운영하는지 모르겠네.”
천하방은 소속 문파로부터 일정 금액을 거두었지만, 무림맹은 맹원 중심이다 보니 문파로부터 거두는 상납금이 없었다.
무한이 객사에 들었다는 소식에 형소와 소소가 달려왔다.
“드디어 왔구나.”
“마치 올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네?”
“응. 한번 들르지 않을까 생각했지.”
형소가 얼버무리려는데 무한이 말했다.
“당연히 들러야겠지. 무림맹주 자리에 오르려면 무림맹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봐야하지 않겠어?”
무한의 말에 형소가 어, 하고는 놀라는 척했다.
“무림맹주에 관심이 있었어? 천하방을 내려놓은 게 그런 이유였던 거야?”
“무한이라면 맹주가 되기 충분하지. 한 십 년 후라면 말야. 아니, 오 년이면 충분할 거야.”
소소가 맞장구쳤다.
그러자 남궁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치미 떼지 마. 대체 무슨 상황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린 거야?”
“무슨 소문?”
형소가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남궁우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노려보았다.
“네 얼굴에 다 쓰여 있거든?”
“아…….”
“너는 군사 체질이 아니야.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잖아.”
“흥! 군사라고 모두 손우자나 공손승 같은 자만 있는 건 아니지.”
“말 돌리지 말고. 무한을 부른 이유가 뭐야?”
남궁우가 압박하자 옆에 있던 소소가 털어놓았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무한의 도움이 필요해. 대파와 세가의 압력이 생각보다 커.”
“형 맹주가 있잖아?”
“팽가에서 산동 복호가를 끌어들였어.”
“산동 복호가?”
복호가라는 말이 나오자 형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소소가 대신 말했다.
“형 맹주의 출신이 산동 복호가잖아. 과거의 인연을 내세워 압박하나봐.”
“뭘 원하는데?”
“맹주 자리. 대파에서 맹주를 맡기 원해.”
“…….”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대파에서 설마 무림맹주 자리를 대놓고 노릴 줄은 몰랐다.
“아니 불도를 닦는 인간들이 무림맹주라니…….”
남궁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무한이 생각에 잠겼다.
대파는 소림과 무당이 중심축을 이룬다. 과거 정마대전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봉문 수준의 칩거에 들어갔던 대파들은 힘을 길렀다. 그렇다고 해도 무림맹을 직접 관장하겠다니…….
“더 놀라운 건…….”
이어지는 소소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중원에 일정한 영역을 긋고, 그곳에 소재한 대파와 세가가 관장한다는 안을 구상 중이라는 것이다.
“각자 영역의 치안을 돌본다는 명목인데 과연 그것뿐일까?”
형소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지역의 맹주가 되겠다는 거야?”
남궁우의 물음에 소소가 답했다.
“이제까지 암묵적으로 서로 인정했던 영역을 확실히 정하겠다는 거지. 무림맹에서 치안을 위탁받았다는 핑계로 중소문파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무한은 세 사람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천하방이 있을 때는 감히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각지에 천하방 지부가 있고, 문파의 분쟁이나 무림 대소사는 지부를 통해 본방까지 들어왔으니까.
이제 그 빈자리를 자신들이 채우겠다는 뜻이다.
‘물론 그에 따른 이권도 챙겨가겠지.’
천하방 지부는 본방의 감사를 받기에 이권 사업에는 간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파와 세가는 분명 직접 뛰어들 것이다.
이러면 무림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 대파와 세가의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든다.
무한이 말했다.
“대파와 세가가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야. 너희는 생각해봤니?”
“돈!”
형소가 말했다.
“대파와 세가가 지난 삼십 년 동안 세력이 커지면서 자금 수요도 급증했어. 기존의 이권만으로는 한계에 봉착한 거지.”
“불도를 닦는 인간들이 왜 세력을 자꾸 키우려는 거지?”
남궁우의 말에 형소가 물끄러미 보다 말했다.
“남궁세가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너희는 이미 휘주의 패자잖아.”
“무슨 소리야? 남궁가는 무력을 쓰지 않아. 휘주 상계의 여러 상단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겨우 사업을 꾸려간다고.”
“조상 때부터 상단을 꾸려온 남궁세가도 그런데 다른 곳은 어떻겠어. 그러니 이런 꼼수를 쓰는 거지.”
무한은 대충 사정을 알 것 같았다.
“지금 대파를 주도하는 자가 누구야?”
“그게…… 복잡해. 겉으로는 소림과 무당을 내세우지만, 대파와 세가 내부로 들어가면 거기서도 패권을 잡기 위해 알력 다툼을 벌이는 것 같아. 그래서 영역분할안도 아직 수면 아래 있는 거지.”
“한마디로 사분오열이라는 거로군. 천하방이 사라지니 빈자리를 얻자고 이전투구를 벌이다니.”
남궁우가 탄식을 하고는 무한을 향해 말했다.
“장주, 아무래도 무림맹주를 맡아야겠어.”
그러자 형소와 소소도 무한을 봤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너희는 고작 무림맹 군사에 불과해. 너희가 바란다고 내가 맹주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이제 약관의 나이잖아. 가정도 꾸려야 할 나이지.”
“엥?”
무한의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무한은 이제껏 자신의 앞날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 무공에만 몰두해왔던 무한이 혼인을 한다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혼인을 한다고? 여자가 있었어?”
남궁우가 놀라 눈을 똑바로 떴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나는 그럼 평생 혼자 살아야 하나? 혹시 나를 승려나 도사로 생각한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너무 뜬금없이 혼인 이야기를 하니까.”
“내 말은 내 삶이 우선이라는 뜻이야. 설마 내 인생을 무림의 안녕을 위해 바치라는 건 아니겠지?”
모두 말문이 막혔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너희도 마찬가지야. 대파와 세가가 무림을 좌지우지 하려는 건 막아야 하지. 하지만 그보다 우선은 너희 삶이야. 내겐 행복한 형소와 소소가 더 중요하거든.”
“…….”
“…….”
“강호의 힘을 믿어. 강호에는 대파와 세가 말고도 무수한 문파가 있고 수많은 무인이 있어. 대파와 세가의 세력이 크다 하나 강호 전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하지만 그들은 낱낱이 흩어져 있으니 힘을 발휘할 수 없지.”
남궁우가 끼어들었다.
“그 힘을 모으라고.”
“……!”
“……!”
“무림맹의 취지가 그게 아니었어? 무림의 안녕을 대파와 세가의 힘을 빌려 이루려 한 거야?”
무한의 말에 형소와 소소는 물론이고 남궁우까지 흠칫하였다. 머리가 좋은 이들이기에 바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형소가 중얼거렸다.
“그래…… 어느새 나도 타협할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힘의 균형만 생각했는데, 힘의 원천부터 다시 생각하라니.”
형소가 무한을 와락, 껴안았다.
“너는 정말…… 과연 천무관 문무쌍절이야.”
“이거 왜 이래? 네가 껴안을 사람은 내가 아니잖아.”
무한이 그답지 않은 농을 하자 형소가 어리둥절해하였다.
무한이 자신을 바라보자 소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심무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날 저녁.
남궁우가 슬그머니 무한에게 물었다.
“너 정말 혼인을 할 생각이야?”
“혼인? 해야지.”
“이런 배신자. 대체 어떤 여자야? 어디다 숨겨 놨냐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내가 누구를 배신했다는 거야?”
무한이 시치미를 떼는데 귀영이 들어왔다. 귀영의 손에는 초청장이 들려 있었다.
“무림맹 장로전에서 보내왔습니다.”
무한이 초청장을 열어보곤 남궁우에게 건넸다.
“사흘 후 열릴 장로회의에 참석해달라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