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연회가 끝나갈 때쯤 무한이 황표에게 물었다.
“아까 수적의 세력이 만만치 않다고 했는데 어떤 수채가 가장 큽니까?”
“이쪽에는 장강수로십팔채 산하 강하채가 있는데 그들은 수적이라고까지 할 건 없소. 다만, 그들도 골치 아파하는 놈들이 있소.”
술이 거나한 황표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얼마 전부터 귀선(鬼船)이라 불리는 놈들이 나타났는데 그놈들은 수적이 아니라 살인마들이오.”
“살인마라고요?”
남궁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수적도 대개는 적당한 선에서 통행세를 받고 통과시켜준다오. 그런데 귀선이라는 놈들은 배를 불태우고, 남자는 수장하고 여자는 끌고 가 노리개로 삼다 죽이는 모양이오.”
“저런 나쁜 새끼들!”
귀영이 욕을 하곤 물었다.
“관이나 강하채에서는 뭘 하고 있는 겁니까?”
황표가 탄식하며 말했다.
“놈들의 배는 무척 빠르고, 이쪽은 수로가 많아 숨을 곳이 많소. 본문에서도 수색을 한 바 있는데 아마도 따로 근거지가 없이 강 위를 떠돌며 악행을 저지르는 것 같소.”
“그럼 놈들을 유인해야겠군요.”
“그러잖아도 강하채에서 유인책을 썼는데, 지원군이 당도하기도 전에 배가 불타버렸소.”
무한이 잠시 생각하곤 말했다.
“배를 한 척 내주실 수 있습니까? 상선이면 좋겠습니다만.”
황표가 무한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방주가 절대고수라는 건 아오. 하지만 물에서의 싸움은 또 다르다오. 귀선은 불화살부터 날리는데 배가 불타 가라앉으면 고수도 꼼짝없이 당하고 마오.”
“그런 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주가 나선다면 충양문도 함께 하겠소.”
황표는 못내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쪽의 세가 강하면 귀선이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
다음 날.
고깃배 사이로 한 척의 상선이 지나갔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상선은 그리 크지 않았다.
어느 순간 고깃배들이 사라지고 푸른 강물에 상선만 남았다.
붉은 적벽 사이 외진 물길을 올라가는 상선은 가는 세월이 아쉽지 않은 듯 그야말로 느릿느릿 강을 탔다.
무한과 남궁우는 선수에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여장을 한 남궁우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하얀 옷이 바람에 하늘하늘 날리는데 멀리서 보면 선녀가 하강한 듯 보일 것이다.
남궁우는 바둑을 두면서 연신 투덜거렸다.
“나 참. 대남궁세가의 지낭이 미끼라니. 이거 너무하는 거 아냐?”
“여자를 좋아한다잖아. 미끼가 훌륭하니 반드시 물 거야.”
무한이 다독거렸다.
귀영이 선실에서 나와 하품을 하며 다가왔다.
“이래서야 언제 무림맹까지 갑니까?”
귀영은 굼벵이처럼 나아가는 배가 못마땅했다.
이선필이 이끄는 충양문 제자들이 선원으로 위장하여 배를 움직였는데, 맞바람을 받고 사선으로 나아가니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요. 무림맹으로 가는 길에 수적 몇은 잡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한이 바둑돌을 놓는데 충양문 제자가 외쳤다.
“옵니다.”
무한과 남궁우가 앞을 보았다.
세 척의 배가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뭐로 칠했는지 선체가 시꺼멨다. 활짝 올린 돛에는 귀면이 그려져 있었다.
이를 보는 충양문 제자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어렸다. 귀선의 흉악함을 아니 어쩔 수 없이 두려운 생각이 든 듯했다.
귀선이 쏜살같이 내려오더니 돌연 불화살이 날아왔다. 정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배를 불태우려는 것이다.
“저런 개자식들이 있나?”
귀영이 욕을 하며 선원들과 함께 선실로 들어가 숨었다.
퍽! 퍼퍽!
불화살이 배에 꽂혔다.
하지만 이를 대비해 이미 물을 충분히 적셔 두었기에 바로 불이 번지지는 않았다.
곧이어 충양문 제자들이 미리 준비한 수통을 들고 나와 불을 껐다.
이쪽에서 바로 불을 끄자 귀선이 멈췄다. 대응이 너무 신속하니 약간 놀란 듯했다.
무한이 선수에 서서 귀선을 보다 갑판에 세워둔 활과 화살통을 들었다.
전장에서나 쓰는 커다란 대궁을 든 무한이 활시위를 당겨 강물을 향해 쏘았다.
퍼억!
내력이 담긴 화살이 물속으로 들어가고 잠시 후, 핏물이 번지며 시신이 올라왔다. 물속으로 은밀히 다가와 배에 구멍을 내려던 수적들이 중간에 모두 죽었다.
귀선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더니 머리를 빡빡 민 사내가 선수에 섰다.
웃통을 벗은 사내의 얼굴은 물론 상체에도 흉악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문신 사내가 이쪽을 살피더니 옆에 있는 수하에게 뭐라 뭐라 지시하였다.
‘이쪽에 고수가 있긴 하지만 수가 적으니 덮칠 생각이겠지.’
무한이 남궁우를 향해 말했다.
“너를 본 모양이야. 절대 그냥 돌아가지 못할 걸.”
“쳇! 자식이 눈은 높아가지고.”
남궁우는 어려서부터 남장을 하고 살았기에 하늘하늘한 여자 옷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오기만 해봐라. 다 죽여주마.”
남궁우가 선녀 같은 얼굴을 하고 표독하게 말하자 귀영이 몸서리쳤다.
“넌 그냥 남장하는 게 좋겠다.”
“뭐라고?”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귀선이 빠르게 다가왔다.
가운데 있는 배가 본선인지 약간 컸고, 좌우 두 척은 작고 날렵했다. 날렵한 배들이 먼저 양쪽에서 다가왔다.
쉭, 쉬쉭!
화살이 먼저 쏟아졌다.
“어이쿠.”
귀영과 선원들이 다시 선실로 들어가 숨었다.
화살은 무한을 향해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무한이 세워둔 검을 뽑아 날아드는 화살을 후려쳤다.
파파팟!
강기의 벽으로 막을 수도 있었으나 그러면 본선이 놀라 달아날 수도 있으니 적당히 맞춰줘야 했다.
“어린놈이 제법이구나.”
본선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문신 사내가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무한이 남궁우를 선실로 들여보낸 후 문을 닫고 앞에 섰다. 마치 사랑하는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결사항전 할 듯한 모습이었다.
모두 선실로 숨었으니 다가오는 배를 저지할 사람이 없었다.
날렵한 배들이 상선 좌우에 붙더니 수적들이 뛰어 올라왔다.
휙, 휙!
수적들이 칼을 휘저으며 무한을 공격했다.
역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죽이려 들었다. 무자비한 놈들이었다.
‘이러니 놈들의 정체를 제대로 아는 이가 없지.’
무한이 검을 찔러 수적 한 놈을 거꾸러뜨렸다.
파악!
놈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자 수적들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죽여!”
십여 자루의 도가 한꺼번에 베어왔다.
무한이 검을 크게 저어 쳐내는 순간 배가 흔들리는 바람에 약간 비틀하였다. 멀리서 보면 수에 밀려 고전하는 듯 보일 것이다.
무한이 악전고투를 하는 척 하며 선실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사이 본선이 다가왔다.
그러나 문신 사내는 무척이나 조심성이 있는 자였다. 배를 대지 않고 이쪽을 노려보기만 했다.
‘더 다가올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무한이 문신 사내를 흘깃 보고는 내공을 끌어 올렸다.
쉬쉬쉭!
파앗!
기파가 터지고 거칠게 날아드는 칼들이 일제히 박살이 났다.
“억!”
수적들은 졸지에 병기를 잃자 당황하였다. 분명 아무 것도 없었는데 벽을 친 듯 강한 충격과 함께 칼이 박살난 것이다.
파파팟!
무한이 검을 휘젓자 검기가 사방으로 비산하였다. 무수한 이들을 죽인 살인마를 살려둘 무한이 아니다.
“크악!”
“컥!”
수적들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일제히 튕겨나갔다.
“마무리를 부탁해!”
무한이 크게 외치고는 발을 굴러 솟구치더니 허공을 날아 본선으로 향했다.
그러자 선실 문이 벌컥 열리고 귀영과 남궁우이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병기를 잃지 않은 수적들을 하나하나 처치해나갔다.
뒤이어 이선필과 충양문 제자들이 쏟아져 나와 양쪽에 붙은 배들을 향해 뛰어내렸다.
챙! 채챙!
“크악!”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됐으나 이미 사기가 떨어진 수적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다. 상선에 올랐던 수적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무한이 날아오자 본선 수적들이 당황하였다.
문신 사내가 크게 외쳤다.
“당황하지 말고 화살을 쏴라!”
그러면서 자신의 대궁을 들어 무한을 향해 겨누고는 바로 시위를 당겼다. 무척이나 빠르고 익숙한 솜씨였다.
파앙!
날아오는 화살에 실린 기운이 만만치 않았다. 문신 사내도 절정고수였던 것이다.
문신 사내에 이어 본선의 수적들도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쐐액! 쐐애액!
무수한 화살이 무한을 향해 날아들었다.
“잡았다!”
허공에 있으니 당연히 움직임에 제약이 있을 것이고, 결국 어느 화살 하나는 맞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무한이 허공에서 검을 긋자 막강한 기파가 터지며 화살들이 일제히 튕겨나갔다.
그제야 문신 사내는 무한이 절대고수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무한이 어느새 본선에 내려섰다.
“네가 귀선의 우두머리인가?”
무한이 문신 사내를 향해 검을 겨눴다.
문신 사내가 장도를 뽑아들었다.
그런데 유난히 가늘고 긴 칼이다.
“왜도로군. 어쩐지 말투가 이상하더라니.”
무한은 사내가 한어를 쓰기는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발음이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이제 보니 왜인이었다.
“왜인이 중원에서 수적질을 하다니.”
무한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죽어랏!”
문신 사내가 벼락같이 도를 짓쳐왔다. 무척이나 빠른 움직임이었으나 상대가 좋지 않았다.
서걱, 서걱서걱!
무한이 검을 내려치자 왜도를 든 문신 사내의 어깻죽지가 잘려 나갔다. 이어 양쪽 무릎이 깨끗하게 절단되었다.
무한이 지풍을 날려 문신 사내를 점혈 하고는 본선을 둘러보았다.
수적들은 모두 한인이었다.
“너희가 무슨 이유로 왜인 밑에서 수적질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으니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무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적들 중 반 이상이 배를 버리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순간, 무한이 검을 하늘로 던졌다.
파악!
검이 박살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였다.
강물로 뛰어들던 수적들은 등판에 파편이 박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물속으로 떨어졌다.
샤샤삭!
무한이 문신 사내의 왜도를 들고 배에 남은 수적들 사이로 짓쳐들었다.
수적들이 달아나려 했으나 무한의 신형은 보이지조차 않을 정도로 빨랐다.
“컥!”
수적들은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쿵!
마지막 수적이 쓰러지고, 무한이 칼을 바닥에 꽂았다.
그사이 상선에 올랐던 수적들도 모두 소탕되었다. 살아남은 놈들은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무한이 문신 사내를 잡고 상선으로 건너가 이선필에게 말했다.
“이 형은 수적의 배들을 끌고 돌아가시지요. 상선은 잠시 빌렸다가 나중에 보내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놈들에게 걸린 현상금만 해도 상선을 두세 척은 살 수 있습니다. 그보다 뱃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사제 몇을 남겨두겠습니다.”
이선필은 귀선을 상대로 아무도 다치지 않고 대승을 거둔 게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문신 사내가 왜어로 뭐라 욕을 하자 귀영이 따귀를 후려쳤다.
“이 새끼가! 지금 욕한 거지? 감히 중원에 스며들어 수적질을 해? 맞아봐라.”
한쪽 팔과 양 무릎이 절단된 문신 사내였건만 귀영이 무자비하게 구타하였다.
끝내 무한이 말려야 했다.
“적당히 해요. 무림맹까지 살려서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