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232화 (232/250)

232화

남궁우는 혹시라도 손우자가 살아서 또 무슨 암계를 꾸미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무한이 바로 황도를 떠나려는 걸 남궁우가 간청하여 잡았다. 무한이 황실의 일에 개입하지는 않더라도 남궁문유의 집에 거처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간 남궁우가 자신을 따르며 처음으로 한 부탁이기에 무한은 흔쾌히 들어주었다.

태자당이 일적진인을 생포한 것도 무한의 언질을 받은 남궁우가 남궁문유에게 일러준 것이다.

조정 대신들은 일적진인이 단지 황제를 미혹시킨 사이비 도사라고만 생각했다. 태자당이 일적진인을 생포한 후 황제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며 국정을 농단한 전모가 드러나자 크게 놀랐고, 그렇기에 이를 막은 태자의 승계를 지지하였다.

봄이 될 무렵 황도가 안정되자 무한은 길을 나서 신검산장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금제를 풀지 않았을까?”

무한이 굽이치는 장강을 보았다.

금빛용이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그날 밤 이후 손우자는 사라졌다.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시한부 삶이란 어찌 보면 죽음보다도 더한 극형일 수도 있다. 또 어떤 이에게는 남은 삶을 알차게 쓰고 미련 없이 눈을 감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무한이 손우자에게 그런 기회를 준 것은 마지막 순간 절망으로 물든 손우자의 눈빛 때문이었다.

모든 걸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했음에도 마지막 순간 천령개혼술을 펼친 것은 그만큼 삶에 미련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손우자는 자신의 감정마저도 속이며 살아왔던 것이다.

무한이 손우자를 처리한 건 할아버지 심양조나 아버지 심군하의 복수 때문이 아니었다.

검신도 심군하도 사사로운 복수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 식의 복수라면 심양조나 심군하 역시 갚아야 할 은원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손우자를 처리한 이유는 그가 끊임없이 무림을 흔들고자 하기 때문이었다.

천하방이 사라진 무림에 손우자와 같은 능력을 지닌 자가 나타난다면 또 하나의 거대 세력이 탄생하는 건 시간문제다.

그랬기에 제거하고자 했는데 마지막 순간 절망에 물든 손우자의 눈빛에서 삶 자체에 대한 미련을 봤다.

그래서 기회를 준 것이다.

무한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절세 신의를 만나지 않는 한 심맥을 풀 수 없을 거야. 이미 죽었겠지.”

설령 살아 있더라도 천령혈을 완전히 파괴했으니 더는 사람을 미혹시키지 못할 것이다.

무한의 말에 남궁우가 염려를 떨치고 활기차게 걸어갔다.

남궁우는 무한보다 세 살 연상이었기에 이제는 누가 봐도 여인임을 알 수 있는데도 남장을 하고 다녔다.

마을 객잔에 들어서서 모자를 벗으니 그녀에게 사람들의 눈길이 모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한도 준수한 용모였지만 남장을 한 남궁우에게는 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사람들이 홀린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눈깔아!”

흉악하게 생긴 귀영이 인상을 쓰자 사람들이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나 한 곳에서만은 여전히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남궁우가 시선을 의식하고 보니 꽤 번듯하게 생긴 사내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사내가 있는 탁자에는 일행이 둘 더 있었는데 모두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사내가 일어나서 다가오더니 포권을 하였다.

“혹시 심 방주와 남궁지낭 아니십니까?”

무한이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이미 알면서도 물어본 것이다. 무한이 포권으로 받아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만.”

“충양문 제자 이선필이라고 합니다. 심 방주께서 강호를 주유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혹시나 방주가 지나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대운이 들었나 봅니다.”

충양문이라면 천하방 소속 문파였다.

무한이 지나는 이 길은 중원 남북을 잇는 대로이고, 이 현은 장강수로를 이용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무한이 황도로 갔다는 소문이 있으니 이선필이 기대했다는 것도 공연한 소리가 아니다.

“방주께서 왕림하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문주께서 반가워하실 겁니다.”

이선필의 은근한 초청에 귀영이 반색하였다.

“맞습니다. 비록 지금은 해산했지만 천하방 형제였던 옛정이 있는데 당연히 들러야지요.”

무한도 흔쾌히 초청에 응했다.

천하방 해산 이후 바로 황도로 와서 뜻하지 않게 봄까지 머물렀다. 해산 이후 각 파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충양문은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마저 식사를 하시죠. 우리도 간단히 저녁을 먹어야 하니, 이후에 가는 걸로 하지요.”

이선필이 예를 취하곤 자리로 돌아갔다.

무한 일행은 소면으로 간단히 저녁을 먹은 후 이선필과 함께 충양문으로 향했다.

이선필이 미리 연통을 넣었는지 충양문주 황표가 마중을 나왔다.

문파 예방 당시 직접 만나기도 했고, 천하대전에서 수차례 봤기에 낯설지 않았다.

“하하. 천하를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강호를 주유한다는 말을 들었소만 정말 그랬구려.”

황표는 오십이 넘은 장년으로 비록 작은 문파지만 부근에서는 알아주는 고수였다.

황표가 대청으로 안내하니 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급하게 소식을 듣고 준비하느라 참으로 부족하오.”

“아닙니다. 이 밤중에 불쑥 찾아왔는데 이리 반겨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황표의 옆으로 이선필이 앉고 장로와 제자 몇이 배석하였다.

서로 예가 오간 후 술이 몇 순배 돌자 황표가 말했다.

“방주의 조언을 구하고자 하오.”

“말씀하시지요.”

“무림맹에서 맹원을 모집한다며 충양문에서도 사람을 보내 달라 요청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천하방과는 달리 맹에 충성해야 한다니…… 이건 사람을 그냥 뺏어가겠다는 게 아니오?”

황표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보시다시피 충양문은 장강을 끼고 있소. 이 일대는 수적이 가끔 출몰하는데 그 세력이 만만치 않소. 과거에는 천하방이 있어 든든했는데…… 그런데 무림맹은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하는 데 여념이 없는 듯하오.”

무한이 듣기만 하였다. 그러자 황표가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방주께서 천하방 자리를 무림맹에 내어준 의도가 따로 있으시오?”

무한은 황표가 묻는 의도를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황표가 정색을 하고 재차 물었다.

“강호의 소문에 의하면 방주께서 천하를 주유하는 데는 깊은 뜻이 있다던데, 혹 대계를 들려주실 수 있겠소?”

점점 더 물음의 내용이 이상해지자 무한이 물었다.

“제가 강호를 떠도는 데 깊은 뜻이 있다니.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황표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들은 대로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방주께서 천하를 주유하며 강호 각파를 살핀 후 무림맹주로 등극하실 것이란 소문이 있소.”

“……!”

뜬금없는 소리에 무한과 남궁우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소문이 다른 곳도 아니고 무림맹에서 흘러나왔으니 본 문주도 솔깃하여 고민을 하는 중이오.”

“무림맹에서 소문을 흘렸다는 말입니까?”

남궁우가 재차 확인했다. 황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이 내심 실소를 흘렸다

‘형소, 소소…… 무슨 짓을 꾸미는 거냐?’

형소를 따라 소소도 무림맹 군사부로 들어갔다.

총군사로 제갈세가의 재사 제갈주승이 있지만 형소와 소소는 군사부 실세로 활약하고 있다. 무림맹에서 흘러나왔다면 그 둘이 흘렸을 게 분명했다.

황표가 말했다.

“만일 방주께서 그러한 대계를 품고 계시다면 충양문은 문도 중에 뛰어난 제자들을 골라 무림맹으로 보내고자 하오. 아니라면 굳이 무림맹에 제자를 가져다 바칠 이유가 없소.”

황표가 정말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무한을 쳐다봤다.

무한은 황표의 말에서 무림맹이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충양문이 이 일대에서 제법 알아주기는 하나 중원무림 전체를 놓고 보자면 고만고만한 중소문파다. 그런 문파에서조차 무림맹에 맹원을 보내는 걸 고민하고 있다.

황표는 제자를 뺏긴다는 생각만 할 뿐이지, 무림맹이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제가 맹주를 맡느냐 아니냐에 따라 제자를 파견 보내느냐 마느냐를 결정하신다니,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야 대파와 세가 때문 아니겠소. 무림맹 장로전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장악하고 있소이다. 무림 명숙도 들이긴 했지만 구색 맞추기 아니오? 그들이 과연 본문과 같은 중소문파의 입장을 챙겨주겠소?”

무림맹 장로전은 천하방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십오 인에 중소문파 출신 무림명숙 십오 인을 더해 서른 명에 이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세력이 큰 구파일방 위주로 흘러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감숙 고원에서 구대문파연합을 제압하였다는 말을 들었소. 본 문주가 생각하기에 대파와 세가의 힘을 누를 수 있는 이는 방주뿐이오.”

황표가 우려하는 바도 일리가 있었다. 천하사패와 세력이 큰 문파가 천하방을 좌지우지했듯 무림맹 또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무한이 내심 탄식을 하였다.

이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무림의 속성상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지금 황표는 약자의 입장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해 고심하는 중이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오. 가까이 지내는 문파들의 의중도 비슷하다오.”

“현 무림맹주는 한때 패왕으로 불렸던 분입니다. 누가 감히 그분의 위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형일천은 한때 패왕으로 불렸던 자다. 그러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전횡을 부린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형국은 그렇소.”

결국은 강력한 맹주가 나서서 구파일방과 세가의 힘을 누르고 중소문파의 이익을 돌봐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또한 무척이나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사욕을 챙기는 맹주가 전횡을 부린다면 제어할 세력이 있어야 한다.

‘맹주와 대파, 세가가 서로 타협을 하며 모두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건 그저 이상에 불과한 것일까?’

무한 역시 천하방을 개편하며 이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기 위해 고심을 했는데 무림맹 또한 똑같은 산통을 겪고 있는 듯했다.

무한은 무림맹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형소와 소소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소문을 흘렸을 리가 없으니까.

남궁우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형소와 소소가 장주를 부르는 것 같은데?”

“…….”

두 사람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대파와 세가에도 인재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 모두를 상대하려면 버거울 수도 있다.

“동문이 부르는데 가봐야지.”

무한이 나직이 답을 하고 황표를 향해 말했다.

“앞날이 어찌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천하방을 해체한 것은 무림이 두 쪽 나는 걸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대파와 세가가 중소문파를 줄 세우고 장악하려는 걸 보고자 한 건 아닙니다.”

무한의 말에 황표가 반색하였다.

“그렇다면 소문이 사실이겠구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천하방의 옛 형제들이 대파와 세가의 밑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무한의 단호한 대답에 황표가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술을 더 가져와라. 오늘 밤 취하지 않으면 언제 또 취하겠느냐?”

이윽고 술판이 거나하게 벌어졌다.

귀영이 익살을 부리자 그새 친해졌는지 이선필이 맞장구치며 웃었다.

무한이 웃고 떠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모두가 공생하는 세상이 이상에 불과하더라도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언젠가 다다를 것이다.’

0